[한국 기독교의 과제]

ㅡ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거듭나기

 

기독교는 예수라는 사건의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묻는 신학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했다. 기독교의 토대는 신학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 기반을 둔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울고 웃고 행동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는 이 문제를 놓아두고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여러 현상적인 문제점이 아니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불편한 현상들(보수화, 세습, 차별금지법반대, 반동성애, 성시화운동 등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여러 현상들)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이 많았다.

 

나는 삼대째 목회자로서 기독교에 매우 좋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가 있지만, 기독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게 된 사건은 '세월호 사건'이었다. 그당시 나는 미국 조지아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304명의 무고한 아이들이 물속 생매장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국가와 교회의 태도를 보면서,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전혀 위로와 안식을 전달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사지로 내몰고 핍박하는 국가의 모습, 특별히 교회의 행태를 보면서 아주 깊은 절망을 느꼈다.

 

나는 그때부터 정치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관심,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등 교회가 이 절망적인 사회/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가에 대한, 교회의 존재론적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은 이제 어렴풋이 '왜 한국교회가 이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한 그 근본적인 이유를 조금은 안 것 같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학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비 안에서 이 세상에 있으면서 이 세상에 머물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공동체로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일들, 그리고 우상에 대하여 저항하며 새로운 희망의 공간 열어주는 공공성을 담지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신학 위에 세워지지 못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진 시기는 구한말 극도의 정치적/사회적 혼란기였으며, 그 중에서 특별히 '민족주의'의 이념 아래 민족-국가(nation-state) 운동이 한국 사회를 뒤덮을 시기였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게 되었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한국 기독교는 그당시 한국 사회의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족국가로서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그 이후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한국교회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는 보수적인 색체를 띨 수밖에 없다. 국가와 신앙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설정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렇다보니 국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기보다는 협력하는 '밀월관계'로 들어서기 쉽다. 이승만 정권 이후 한국 기독교는 계속하여 집권세력에 협조하는 보수적 색채를 띤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기독교는 교회의 구조와 생태 자체도 민족적인 색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교회가 하나의 '민족국가, 또는 민족집단'이 되다보니, 배타성을 짙을 수밖에 없고, 차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자신과 다른 '타자'는 모두 배제하는 논리가 들어설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아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국민들이 식민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를 통해서 식민지배 시대에 알게 모르게 몸에 밴 식민성을 의식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연습을 하여 '노예근성'을 버려야만 하듯이,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한 한국 기독교는 자기 자신이 현재 어떠한 상태인지를 거리두기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기독교에서 벗어나 '신학'에 기반을 둔 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한국 교회에 주어진 이 시대의 사명이다. '회개'의 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신학 무용론'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허탄한 신화이다. 기독교가 신학이 아닌 다른 것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기독교는 그 사회에서 공공성을 담지하지 못한다. 공공성을 잃은 집단은, 그것도 그것이 교회라면, 한 사회에서 어느 순간 불필요한 존재로서 외면당하고 퇴출당할 것이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인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를 다시 세우는 작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교회가 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사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시민'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여, 불의한 이들로 인하여 고통 속에서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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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예술작품 같은 설교]

 

나는 언제나 나의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생각 안 하던 사람이 생각하게 되고, 질문이 없던 사람이 질문을 가지게 되는,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작품 같기를 소망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고,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보이고, 조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의 설교가 아름다운 조각품처럼 느껴지길 원한다.

 

그러나 많은 순간 그 소망은 성취되지 않는다. 때로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때로는 청중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실패는 몇 가지에서 오는데, 한 가지는 내가 일주일동안 충분한 영성생활을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어떤 '바쁜 일' 때문에 정해놓은 일상이 흐트러질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다른 한 가지는 나에게 맡겨주신 '양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때 발행한다.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한,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 운동을 못해서 몸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음식을 조심해서 먹지 못했다거나, 괜한 일에 분노를 표출해서 마음을 흐트러뜨려 놓았거나 했을 때 나는 실패를 경험한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경험하는 실패는 대개 내가 통제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나의 쪽에서 오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 노력하고, 기도하며 충분히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몸 컨디션을 언제나 최상으로 유지하려고 조심한다.

 

청중 쪽에서 오는 실패는 사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 있는 일이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두 가지를 말하고 싶은데, 하나는 청중이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 실패를 경험한다. 사랑 안에서 교통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돌처럼 여겨질 것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돌을 주어도 그것이 보석처럼 여겨질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아무리 조악한 작품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청중이 설교자를 향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 50퍼센트는 성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청중의 설교를 듣는 능력이 부족할 때 실패를 경험한다. 대개 음악도 미술도 감상하는 이들의 소양에 따라 그 음악작품과 미술작품에서 느끼는 감동의 정도가 다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아무말이나 지껄이는 개차반 설교자가 아니라, 교양있고 소양있는 설교자라면 그 설교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논증의 틀이 있게 마련이다. 청중이 설교자의 논증과 그 논증에 담긴 메시지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쫒아오지 못하면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설교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내어놓은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이제 청중의 입장에서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청중이 그 예술작품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작품의 가치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 자체로 매우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 가치는 청중이 정할 것이다.

 

작품은 기교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작품에는 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이 담기기 마련이다. 혼이 담긴 작품은 청중이 알아볼 것이고,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청중에게 외면당할 것이다. 물론, 기교만을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혼을 담은 작품을 알아보는 청중이 드물지만, 그렇다고, 작품활동하는 사람이 기교만 부려 청중을 홀리는 것은 직무유기일 뿐더러 사기행각이다.

 

한 편의 설교에서 '은혜'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정말 여러가지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야 한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자의 자리에서, 청중은 청중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가 그 안에서 역사하기를 바라는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질 때, 예술작품 같은 설교는 그 작품을 내놓은 설교자나, 그 작품을 눈과 귀로 경험하는 청중이나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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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맥락의 중요성]

 

우리 아이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모부한테 5,000원을 용돈으로 받았다. 우리 아이들은 그 돈을 받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국 달러와 한국 돈의 가치가 같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한국돈 5,000원을 미국돈의 5,000달러로 생각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집사람은 아이들한테 한국돈의 가치와 미국돈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돈 5,000원은 미국돈 5달러라는 것을 알려주자, 휘둥그레졌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맥락을 알지 못하면 이와 동일한 일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맥락'을 공부해야 한다. 성경의 맥락을 공부하지 않아 위와 같은 해프닝이 우리가 사는 사회/현실에서 너무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성경 시대의 맥락을 21세기 현대사회의 맥락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 물론 어떤 맥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살인에 대한 정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주 많은 맥락에 있어 성경의 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의 맥락은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와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에 대한 것들이다.

 

맥락의 간극 때문에,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삶의 원리로 삼으려고 할 때 '공부'가 좀 필요하다. 공부하지 않고 아무런 여과 없이 성경의 맥락을 현대 사회의 맥락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들 때, 거기에는 '은혜'가 발생하지 못하고 '갈등'만 발생할 뿐이다. 그럴 때, 성경은 어느 '거룩한 책'보다 폭력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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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다윈의 절규]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의 존재,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성장한 기독교는 다윈의 그러한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종의 기원> 1859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 160 여년이 흘렀다. 다윈의 절규를 무시한 기독교는 현재 생태의 위기에 무슨 책임을 지고 있는가? 여전히 초월적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이데아인 천국을 꿈꾸고, 그곳에 가는 것을 삶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가? 언제까지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긍정한 이 세계와 인간을 ''라는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덮어씌워 이 세계와 인간을 이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하는가?

 

우리에게 '어머니 지구' 이외에 다른 세상이 있는가?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생명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해야만 하는가. 생명을 무한 긍정하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왜 우리에게는 죄만 남았는가.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왜 그런 못된 짓을 해놓았는가.

 

진화의 신학적인 의미는 우리가 이 땅의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다윈의 절규를 왜곡하여 이 땅을 보듬지 못하게 하려는 자, 이 땅을 떠나야 할 자들은 바로 그들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그너와 톨킨]

 

바그너는 19세기 사람이고, 톨킨은 20세기 사람이다. 바그너는 자본주의의 병폐와 낭만주의와 이성의 극대화를 경험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20세기의 두 비극, 1,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톨킨은 바그너를 잘 알고 있었고, 그의 <니벨룽의 반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톨킨은 20세기의 두 비극을 모두 경험했다. 그리고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집필했다.

 

바그너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답게, 그리고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이성의 긍정에 동의했던 사람답게 <니벨룽의 반지>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바그너는 니체의 영향 아래 신들의 세계의 몰락과 '위버멘쉬(초인/영웅)'를 통한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그러나, 톨킨은 이성의 정점에서 스스로 몰락한 인간들의 군상을 직접 목도했고, 모든 인간의 노력과 진보가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이 없는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그렇다고 존재하는 신은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되, 신비에 휩싸여 나갈 뿐이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와 톨킨의 <반지의 제왕> '반지'라는 모티프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만, 그 전개방식이나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결국(end)은 무엇인가? 바그너는 '반지'에 의해 파괴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지만, 톨킨은 '반지'를 파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19세기의 인물인 바그너와 20세기의 인물인 톨킨의 이야기는 같을 수 없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21세기, 우리는 바그너와 톨킨을 안다. 그런 우리의 경험은 그들의 경험과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내려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신학하기]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말하고 있는 식민주의는 통렬하다. 그에 의하면, 식민주의란 같은 인간이지만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근원적 폭력이다. 식민지의 사람들은 제국주의가 만든 특정한 '인간형'에 적응할 때에만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고, 그런 대우를 받는 식민지인은 자신과 같은 식민지인을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식민지의 피지배층은 시민 자격에서 소외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소외된다. 따라서 식민주의는 식민지 사람들이 이중의 소외를 겪고 자아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승우, <공공성>, 126)

 

프랑스의 식민지를 겪었던 알제리 출신의 정치 철학자 파농이 폭로하고 있는 식민주의는 동일한 경험을 한 한국인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특별히 그가 주장하고 있는 정치 교육의 정의, "영혼을 창조하는 것"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시민들이 식민경험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형성된 식민주의 인간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파농이 말하는 "영혼을 창조하는 것"의 정치 교육은 대단히 신학적이다. 그는 대중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창조하도록 정치 교육을 해야한다고 말하며, 이를 통해, "조물주 같은 존재는 없고, 어떤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일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식민주의는 사람을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게 만든다. 식민주의가 더이상 현실에서는 없는 일이지만,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된 '인간형'은 계속해서 의존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이미 스스로의 영혼을 창조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때 독재자는 폭군이 아니라 메시아로 등극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많은 독재자들이 한국사회를 망쳐 놓았지만 그들을 향해 ''을 하기보다 그들에 대해 오히려 '향수'를 지니는 한국인의 특징은 바로 그런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는 이러한 성향을 더 강화시킬 수도 있고, 그러한 성향을 끊어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의 신학하기란 매우 세심해야 하며, 매우 정치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종교가 사람들을 더 의존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한다면,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시민들은 식민주의가 심어 놓은 의존적인 인간형에서 벗어나기 더욱더 힘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복음'은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신자들(또는 시민들)을 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었을 뿐, 파농이 말하고 있는 "영혼을 창조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파농이 주장하고 있는 '영혼을 창조하는 것'"조물주 같은 존재는 없고, 어떤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일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것을 '무신론'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사실 이것은 그 반대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을 통해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지, 의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쓰는 용어가 얼마나 사람들을 무의식 중에 '의존적인 인간'으로 만드는가. '죄인', '속죄', '주일성수', '십일조' 등의 종교적 언어는 그 행위에 매이게 만들어 사람들을 '컨트롤'할 뿐이다한 가지만 물어봐도 교회가 얼마나 "영혼을 창조하는 일"에 실패했는지 알 수 있다. 교회는 차이와 다양성을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을 억압하는가? 교회의 대형화는 차이와 다양성을 죽이는 방식으로 이룩될 수밖에 없다.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의 고발은 정확하게 교회에서도 발생했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신학하기, 또는 신앙생활 하기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이 또는 신앙이 영혼을 창조하기는 커녕 영혼을 더 형편없이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신학하는 이들, 목회하는 이들,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역사공부와 정치교육을 더 넓고 깊게 해야 한다. 종교가 영혼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종교가 영혼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악마일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점: 정치철학의 부재]

 

다음은 바울 피우스 11(Pius XI) 1931년도 <사회의 혁신>에 대한 회칙의 일부이다.

 

"사람들의 번영을 구성하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재화들이, 자신의 힘으로 직접 일을 하는 손을 통해서건, 혹은 그들의 노동생산성을 놀라울 정도로 높여주고 있는 기구들 혹은 기계들을 통해서건, 하여튼 일하는 자들의 손들로부터 계속 생산되고 있는 것을 우리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국민 모두의 힘을 다한 공동의 노력이 없었다면, 그 어떤 국민이라 할지라도 결핍과 가난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번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 중에는 지도자 역할을 맡은 자들도 있고, 직접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명한 사실은,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하심 속에서 자연의 부요함과 각종 수단들, 보배들, 그리고 자연의 힘들을 우리에게 미리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들이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열매도 없은 일이 되었을 것이며, 그 노력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이라는 것이 자연의 선물들에 대하여 우리의 육체적 혹은 정신적 능력들을 적용시키고, 또 그 선물들을 사용하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있는 자연법은 지금 인간들의 필요를 위해 자연의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 올바른 질서가 보존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 질서는 각각의 사물이 그 자신의 주인을 갖는다는 사실 속에 존재한다."

.......................................................................................................

 

이 회직에서 교황 피우스 11세는 '국가들의 부는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교황이 이 문서에 정립하는 정치철학은 자본과 노동의 결합이다. 어떤 자본도 노동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어떤 노동도 자본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라고 이름 붙여진 경제-사회체제를 보면 노동보다 자본이 우선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 우리가 경험한 역사에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우위에 올라서서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그래서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했다. 자본이 노동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가톨릭은 1981년의 <노동 회칙>을 통해서 그 문제를 지적하며, 노동이 자본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자본은 항상 노동의 결과라는 것을 명시한다. 이러한 회칙들은 자본주의를 견제하며, 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종부리듯 마음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이 득세하는 정치 집단은 자본가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제정을 하고, 자본가와 결탁한 국가 정부는 자본가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정을 펼치며 규제를 풀어간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폐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종교세력' 밖에는 없다. 가톨릭은 여러 회칙을 통해서 그 일을 해왔다. 물론 실효성 측면에서는 의문이 남지만 말이다.

 

나는 뼛속까지 개신교인이지만 때로 가톨릭이 부러울 때가 있다. 바로 이러한 가톨릭의 정교한 '정치철학'을 접할 때이다. 가톨릭은 사회/경제/정치 문제에 대하여 교회의 회칙을 통해 본인들의 입장을 밝혀왔다. 그것은 대사회적 메시지가 되고,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 규범이 되며, 교회가 국가 또는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협력과 견제를 해야 하는 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시도들이 언제나 성공을 거두고 세상을 변혁시키며 효과를 거두었던 것은 아니나, 가톨릭의 '정치철학'은 현실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만드는 가교 역할을 해 온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점을 '정치철학'의 부재로 꼽는다. 각교단이 보유하고 있는 '교단헌법'은 매우 어설플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을 전혀 담아내고 있지 않다. 각 교단의 교단장 명의로 발표되는 대사회 메시지는 수준이 너무 낮고, 철학과 신학을 기반으로 한 담화가 아니라 감정과 집단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한 담화가 태반이다.

 

한국 개신교는 '성경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정작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메시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지만, 정작 성경의 메시지를 오늘날 우리 시대의 언어로 풀어내는 데는 너무너무 서툴다. 그렇다 보니, 성경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정치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건물을 세우고 아무리 많은 신자들을 모은다 해도,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할 것이고, 사회의 그림자로 밖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누가 그림자를 무서워하며, 누가 그림자를 따르겠는가. 그림자를 무서워하고 그림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림자에게 속아넘어간 '바보들' 밖에 더 있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Two Great Disasters / 두 가지 거대한 재앙]

 

Do not stand aloof from your reality. Do not be a bystander at the presence of something happening.

 

우리는 지금 두 가지의 거대한 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적 재앙(natural disaster)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재앙(social disaster)이다. 성질은 다르나 원인은 같다. 모두 '인간'에게서 비롯된 재앙이다.

 

우리는 지금 '기후변화'의 자연적 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재앙이 닥쳤고 지금 그 재앙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여전히 '감사'를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평안하지 않은데 평안하다고 외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또한 우리는 지금 '불평등'의 사회적 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등에 업고 달리는 인간의 욕망은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가 되었다. 큰 사고를 일으키며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고 강제로 멈추어 서게 될 것이다.

 

인류는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까. 물론 남은 자들은 존재할 것이다. 남은 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하나님께서 택하신 남은 자들 외에 모든 인류는 재앙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단이 판을 치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습하고 어두우면 바퀴벌레가 들끓듯이, 이단들이 들끓을 것이다. '지혜'가 없는 자들은 이단의 '후려치는 언사'에 모두 넘어갈 것이다.

 

이단들은 종말을 말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이 종말의 증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이단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을 조성할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안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단들의 말에 더 추종할 것이다.

 

이단들은 그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할 것이다. 처음부터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불안을 조성한 뒤 착취할 것이다. 충분한 불안이 조성되어야 본인이 착취당하는지 모르고 자발적 착취를 당할 것이다.

 

이단들은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강변하며 '저 세상에 관심을 둘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요청할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재앙들(자연적 재앙과 사회적 재앙 / 기후변화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기후변화와 불평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요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로 치부할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들은 이 세상을 초월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신들을 치장할 것이다.

 

이단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 삶의 현실의 문제에서 초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에 대하여 '구경꾼(bystander)'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제사장과 레위인을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현실의 문제를 못 본채 지나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거룩한 것 같으나 위선적인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참 인간이 된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초월해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현실의 문제에 '참여'하게 될 때 비로소 참 인간,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참여(participation)'이다.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 된 것은 인간 운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된 것은 하나님의 운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두 개의 거대한 재앙을 마주하고 있다. 그 재앙은 피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참여'할 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한 마음(파레시아)를 가지고 기후변화의 문제에 참여하고, 불평등의 문제에 참여할 때 우리는 파국을 면할 수 있다.

구원은 초연이 아니라 참여이다.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잘못을 가슴 깊이 회개하며, 두 가지 거대한 재앙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는 참 사람, 참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한다. 

 

Do not stand aloof from your reality. Do not be a bystander at the presence of something happening.

Posted by 장준식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탄식과 회개를 한다.

 

어떻게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찬양과 감사만 있을 수 있으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면 마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것처럼 불경해 하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일은 신앙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식의 신앙과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방식의 신앙, 이 두 경험을 모두 안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찬양과 감사를 돌리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은 찬양과 감사가 아니라 탄식과 회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싫어한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마누엘 신앙은 하나님의 부재를 포함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부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부재가 싫다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부재를 부정하는 식의 신앙은 정직하지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부재를 임재로 바꾸려는 불신앙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할 때 눈 앞에 나타나야 하는 우리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나는 나다).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드러난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일이 곧 나의 믿음 없음이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다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두려움 때문에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부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향해 탄식과 회개를 올려야 한다. 그 깊은 부재의 고독이 우리의 신앙을 더 진지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우리의 인간성을 더 성숙시킬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왜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인문학 공부는 사람에게 길을 잃도록 만든다. 인문학을 깊이 공부해 본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 것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길을 잃는다. 분명하다.

 

사람은 그렇게 길을 잃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도 확실한 길만 걸으려 한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은총을 꺼려한다.

 

길을 잃어야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그 절대적 경험은 길 잃은 자만이 누리는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을 잃어야 한다. 길을 잃게 만드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또한 인문학 공부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낮은 곳에 이르게 한다. 인문학을 깊이 제대로 공부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인지를, 뼛속까지 사무치게 느낄 것이다.

 

인간 존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겸비하여 낮은 데 임할 수 있다. 우리는 낮은 곳에 거처해야 한다.

 

낮은 데 거처해야 낮은 곳에서 있는 자들을 보듬어 주시고 안아 주시는 따스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경험 없이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따스한 손길을 내밀 수 없다. 이 잔인한 세상을 이길 힘은 사랑 이외에 무엇이 있으랴.

 

인문학 공부는 길을 잃게 하고 낮은 곳에 거처를 정하게 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절대자를 경험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이 경험 없이 이 악한 세상을 미치지 않고 건널 힘(정신/spirit)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Posted by 장준식

[정치신학: 나의 전공]

 

내 전공은 정치신학이다. 나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Democracy를 번역한 말이다. 정확한 번역은 '민중정치'이다. 민중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 정치하는 체제, 그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참 골치 아픈 체제이다.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래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정치철학자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이 있다.

 

민주주의는 실로 아무 민족이나 갖출 수 있는 정치체계가 아니다. 합리적 사고,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독교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추구하는 밑바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와 높은 도덕성을 갖추는 일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요즘 미국이나 한국이나 민주주의가 위협 받고 있다. 합리적인 사고를 결여하고, 도덕성을 상실한 자들이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의 신앙의 올바름과 민주주의의 성패는 같이 간다고 믿는다. 삼위일체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기독교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할 때, 민주주의는 흥황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해야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은 기독교 신학의 올바른 이해이다. 요즘은 너무도 '유사 기독교'가 많다. 교회 간판을 달고 있으나, 거기에서 선포되는 메시지, 또는 거기서 해석되는 성경의 말씀은 전혀 기독교의 원래(original) 메시지를 담아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천당 불신지옥' 프레임이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어 나의 몸과 생각과 마음과 사회와 미래를 결정해 나갈 수 있는 인생, 그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이고 그러한 메시지를 실현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 체계라고 믿는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생명에 손댈 수 없다. 하나님만이 내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내 생명에 손을 대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려 든다면,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면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생명을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착취하려 했던 세력에 대한 정치적/민주적 저항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하나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기고 내어주는 자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하나님께만 생명을 드리겠다고 자기 생명을 지키며 죽어간 자는 다시 생명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20:17).

 

누구도,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은 생명에게 손댈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민주주의는 내 몸을, 내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다. 내 몸은 거룩하므로!


Posted by 장준식

[큰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

 

지금 시대는 큰 이야기(거대담론)를 상실했다. 대표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건물주'에 대한 이야기지, '조물주'가 아니다. 건물주는 작은 이야기다. 조물주는 큰 이야기이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조물주' 이야기는 사람들 입에서 나오지 않고, '건물주' 이야기만 나온다.

 

TV 예능이 그것을 매우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전의 예능, 특별히 코미디 프로그램은 코미디 형식이었지만 그 내용은 '큰 이야기'들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러나 요즘 예능은 육아예능이나 가족예능, 그리고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프로그램이 대세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지상파에서 모두 폐지된 것은 당연하다. 코미디언들의 자리가 없어진 것은 프로그램이 폐지되어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큰 이야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가 공존해야 한다. 큰 이야기가 너무 압도하면 작은 이야기가 억압을 당하고, 작은 이야기가 너무 편만하면 큰 이야기가 사라져버린다. 작은 이야기가 없으면 자유와 평등이 없고, 큰 이야기가 없으면 진리와 정의가 없다.

 

작은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면 개인이 중요해지고, 큰 이야기만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면 개인이 없어진다. 인간 사회에서 개인만 중요해지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고, 개인이 없어지는 것도 건강하지 못하다. 개인과 공동체는 언제나 상호보완적이다.

 

그러므로 요즘 시대는 작은 이야기보다 큰 이야기를 하도록, 훨씬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한 균형은 종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설교자들의 설교가 작은 이야기로 흐르면 안 되고 큰 이야기들을 담아내야 하는 시대이다. 문제는 큰 이야기를 담아내려면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한데, 거시적 안목은 하루 아침에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랜 공부를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자는 선비처럼 엉덩이 붙이고 앉아 진지하게 공부하는 설교자이다.

 

여러분, 그만 돌아다니고,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합시다.


Posted by 장준식

[기독교 종말론: 같은 시공간, 다른 차원]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산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차원에서 살아야 하는가? 바로 종말론적 차원에서 살아야 한다.

 

기독교의 종말은 파멸과 멸망이 아니다. 기독교의 종말을 파멸과 멸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기독교 종말론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말은 생명의 완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완성, 그것이 기독교의 종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그 완성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통해서 그 완성이 마무리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과 다른 차원을 산다는 뜻은,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완성을 맛보았고 꿈꾸며 지향하며 산다는 뜻이다. 세상은 온갖 폭력으로 물들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시공간에서 생명의 완성을 갈망하며 드러낸다.

 

오늘 하루,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형태의 폭력, 즉 생명을 축소시키고 해치는 일에 저항하여, 조그맣더라도 생명을 증진시키고 풍성하게 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루를 매우 의미있게, 그리고 복되게 산 것이다. 그는 이미 '천국'에서 사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개신교]

에모리대학교 수학시절, 나의 스승이었던 테드 런연(Ted Runyon) 교수는 수업 시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셨다. 본인이 그당시 개신교 신진학자로서 초청을 받아 참관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공의회가 갖는 역사적, 사회적, 신학적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는 이승원의 <민주주의>는 그 공의회를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화와 관련하여 이 공의회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중시하면서, 사회 정의에서의 참여,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사회 내 여러 피억압 계층의 청지사회적 구원을 위한 가톨릭교회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 등 가톨릭의 사회적 역할을 명시했기 때문이다"(이승원, <민주주의>, 140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발맞추어 개신교 측에서는 WCC 모임을 통해 기독교가 나아갈 바를 명시한다. 특별히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던 제 4차 웁살라 WCC 총회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계21:5)"는 주제 아래, 교회의 일치를 넘어 인류의 일치를 종말론적 비전으로 제시한다.

인류의 역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고, '냉전'이 극에 달하던 1960년대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참담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 진영의 핵무기 경쟁, 사회주의 진영의 부다페스트와 프라하 사건, 자유주의 진영의 케네디 암살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암살,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그로 촉발된 68혁명운동 등, 세계사의 가장 극심한 혼란 시기였다.

무엇보다, 냉전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땅에 떨어진 때였기에, 종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웁살라 WCC 총회를 통해 사회정의와 경제정의에 대한 '저항운동'의 기초를 기독교 세계가 놓았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남미의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에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해방신학은 그동안 기독교가 등한시 해왔던 '사회구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것은 구원론에 대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동안 기독교는 개인구원에 치중하여 이 세상의 일에는 관심을 적게 가지고 '죽어서 천국가는 문제'에만 집중하였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웁살라 WCC 총회를 통하여, "현실에서 발생하는 가난, 불평등, 불의로부터 해방된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구원론에 편입시켰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창조한 현실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선언인 것이다. (이승원, 141쪽)

한국 개신교의 불행은 신학의 부재로부터 온다. 현재 '사랑제일교회'로 대표되는 보수 한국 개신교회의 반사회적 일탈은 현대신학의 과제를 끌어안지 못하고 한참 지나간 세대의 구시대적 신학 유물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개신교회는 결코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놓은 새로운 신학의 비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와 발맞추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신학의 과제를 정립해 나가는 WCC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세상은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시대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배제한 채 '자본'이 공중권세 잡은 자 되어 세상을 뒤흔드는 시대이다. 인간이 배제된 마당에, 하나님은 설 자리가 전혀 없는 시대이다. 이런 '사탄의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협력하는 일은 '신학의 부재'가 불러오는 재앙이다. 그 일이 지금 한국 보수개신교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 뿐 아니라, 한국개신교 전반이 그렇다. 무리한 교회건축, 세습 등을 보면 어렵지 않게 그 현상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신학생들/목사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갖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공부하지(배우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의 '적대세력'의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다(가톨릭은 개신교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형제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거대한 물줄기이다. 지금이라도 한국의 개신교회가 그 거대한 물줄기에 발을 담그고, 그것이 가져온 '사회적 구원'이 기독교의 구원론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자각했으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문재인 정부의 무지인가 실패인가]

 

한국은 지금 부동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검찰개혁 문제와 더불어 부동산 문제 때문에 민주당의 지지율은 미통당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권과 사유재산이다. 지금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부동산 개혁에 대한 저항은 이러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곧 '조세 저항'이기도 하다. 근대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영국이나 프랑스의 혁명의 대부분은 '개인' 또는 '개별 집단'의 사유재산 침탈에 대한 저항이었다.

 

아무리 고위공직자들에게 한 채의 집만 가질 것을 주문해서, 솔선수범하여 부동산 정책을 이끈다 하여도, 국민 개개인은 자신들의 권리라고 여기는 '사유재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재산을 지키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자유를 침탈당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생각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경험한 홉스와 로크와 루소를 거치며 탄생했다. 아래와 같이 그들의 정치사상은 미국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한다.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으며, 생명권과 자유권과 행복 추구권은 이러한 권리에 속한다."

 

새마을 운동 이후 경제발전이 실현된 이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부동산()은 생명이고 자유고 행복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을 펴겠다며 1가구 1주택 운동을 벌이며, 그 이상 가진 사람들에게 '조세'를 물리는 정책은 조세 저항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고 정의로운 정책이라도 국민들이 느끼기에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 자유,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조세 저항에 부딪혀 혁명을 경험한 인류의 역사를 문재인 정부는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가? 나는 근본적으로는 문재인 정부가 실현하려고 하는 부동산 정책의 방향을 지지한다. 땅의 하나님의 것이기에 땅으로 이윤을 취하는 것에 반대한다. 집은 인간의 기본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이기에 집 가지고 가난한 자에게 이윤을 추구하는 행태에 반대한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은 정부의 정책으로 밀어붙여서 성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먼저 바꾸어 놓아야 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다"라는 사회의 도덕적 합의 없이 어떻게 정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가.

 

오히려, 그러한 도덕적 합의는 종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가 부동산 정책의 철학과 실행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누구보다 종교인들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문제를 종교와 전혀 소통하고 있지 않은 듯한 문재인 정부는 무지한 정부인지 실패한 정부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생명권, 자유권, 행복권을 '부동산 투기'에서 추구하지 않도록, 정부는 종교와 연합하여 국민들의 도덕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