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정치철학의 필요성

 

종교적 신념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은 비판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 그 작업을 실행하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은 누군가 고백하고 있는 종교적 신념의 진실성 여부를 검토한다.

 

종교적 신념은 정치행위로 이어진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면 정치행위라는 용어가 필요 없겠지만, 두 사람만 모여도 거기에는 정치행위가 발생한다. 자신의 신념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이상 모인 '사회'에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정치행위는 또 한 번의 검토를 필요로 한다. 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정치철학이다. 본디 철학은 진리를 향한 탐구이다. 어떠한 신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신념을 바탕으로 행하는 행동에 대하여 비판적 검토를 가하는 것이 정치철학이다. 어느 개인의 종교적 신념과 그에 따른 정치행위가 진리인지 아닌지, 그 진실성을 검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진리가 아닌 것은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의 발전과 성숙의 정도를 보려면 그 사회에서 발화되고 있는 신념과 정치행위에 대한 신학적, 정치신학적 검토의 깊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구호만 난무하고, 그 신념에 근거한 활동만 거창한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지금 한국 사회가 딱 그렇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는 '성시화운동'라는 종교적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한 도시를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획이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은 언뜻 보면 성스러운 것 같고 매우 신앙적인 것 같으나, 이러한 신념이 정말로 성스럽고 신앙적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려면 '성시화운동'이라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신학적/정치철학적 논의가 얼마나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그런데, 공신력 있는 논문 게재 사이트(예를들어, DBpia)에서 '성시화운동'에 대한 키워드를 쳐 넣으면, 그에 대한 논문이 거의 없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종교적 신념만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진실성의 검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성시화운동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은혜스러운 운동이 될지 모르나, 사회 안에서는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한 것이다.

 

요즘 한국 교회를 뒤흔들고 있는 '차별금지법반대운동'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발생한 것은 몇 년 되었다. 그래서 그 주제의 논문이 어느 정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주로 법학 관련 학회에서 발표되었고, 장애인이나 젠더 문제를 취급하는 연구소에서 논문을 발표하였다. 정작 '차별금지법'을 강렬하게 반대하는 개신교 측에서 발표된 논문은 별로 없다. 그만큼 종교적 신념과 그에 따른 정치적 행위는 활발하게 있지만, 그것의 진실성을 따지는 신학적/정치철학적 검토는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본인의 신념이 곧 진리는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착각하며 산다. 특별히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에게 이러한 착각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종교적 신념은 신학적 비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정치행위는 정치철학적 비판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적 검토를 전혀 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념과 행동이 난무하다 보니, 사회적 혼란만 더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종교적 신념과 신앙적 문제들에 대한 진실성의 검토, 정치적 신념과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진실성의 검토는 신학과 정치철학을 통해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성급한 성토와 행위는 '믿음'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 있다. 가뜩이나 소수자로서 이 세상에서 고통받고 사는 자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꼴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속히 이루고 싶다면,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다. 진리가 아니면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이 진리인지 아닌지 면밀하게 먼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런 성숙한 종교와 시민사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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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삼위일체론과 인권

 

삼위일체론의 관건은 삼신론(다신론)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각자의 신격(위격)을 통일할 것이며, 일신론(Monotheism)이 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각자의 신격(위격)을 유지할 것이냐에 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기독교가 생긴 이래로 40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보유하고 있는 신성(Godhead)를 그리스도와 성령이 어떻게 동일한 신성(Godhead)를 지닌 존재로 설명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이다. 기독교 신학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유일신관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유일신관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그 두 존재를 신적인 위격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가장 큰 에너지를 쓴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수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뛰어들었고, 단숨에 완벽한 기독교 삼위일체론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씩 생각이 발전했고, 생각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많은 사상들은 비정통적인 생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 그리스도론(Christology of Adoptionism), 가현 그리스도론(docetic Christology), 그리고 양태 그리스도론(modalistic Christology) 등이 있다.

 

각 위격의 동일본질을 유지하며, 각 위격이 서로의 본질을 침범하지 않는 신론을 고안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우를 많이 범했다. 양자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양태 그리스도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일치시켜 버렸다. 모두 올바르지 못한 기독론, 삼위일체론이다.

 

세 위격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조화롭게 유지시키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을 올바로 처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이라는 개념, 진리라는 개념은 우리의 일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진리에서 벗어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발생하는데, 신이라는 개념, 진리라는 개념을 잘못 설명하면 우리는 어처구니없게 폭력의 희생자가 되기 십상이다.

 

오늘날 인권 문제는 삼위일체론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너와 나와 그의 인격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가 인권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다양성이 강조되면 통일성이 사라져 너무 산만한 사회가 되고, 통일성이 강조되면 다양성이 사라져 너무 권위주의적인 사회가 된다.

 

기독교 신앙인들은 그동안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면서 실제생활 속에서는 군주신론(Monarchianism)을 신봉하는 것처럼 보여 왔다.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인권이 없는 양, 힘 센 사람이 얼마나 힘 없는 사람을 짓밟으며 살아왔는가. 그러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라는 말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말살하는 유체이탈 화법에 불과하다.

 

한국은 지금 차별금지법때문에 큰 논란에 휩싸여 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설교 시간에 죄인죄인이라 하면 처벌받는다는 오해가 팽배하다. 차별금지법은 반기독교적인 법이 아니라, 오히려 친기독교적인 법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 법을 오해하며 반대할까? 나는 그 이유가 한국교회의 개신교인들의 천박한 삼위일체론의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의 도그마, 또는 선동이 아니라 실제생활을 구성하는 세계관이고 생활관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하나님을 군주신론으로 이해하면, 권위주의적인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으로 이해하면 모든 생명(인권)이 존중받는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교에서 삼위일체론을 엉터리로 배웠기 때문에, 또는 삼위일체론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강단에서 헛다리 짚는설교를 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교회가 차별금지법을 반기독교적인 법이 아니라 친교독교적인 법으로 수용 가능한 신학적 사유를 가지려면,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삼위일체론을 진지하게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별히 초대교회부터 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형성된 삼위일체론을 교부들의 문서를 직접 들여다보며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이 형성된 그 신학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알게 될 것이고, 삼위일체론에 담긴 풍성한 사유를 바탕으로 오히려 차별금지법이 왜 아직까지 없었는지 의아해하며 그러한 법에 대하여 더 일찍 발의하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정교하게 정립한 삼위일체론과 더불어, 그들의 삼위일체론과 결이 다른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공부하지 않고, 그리고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읽어보지 않고 목회하는 사람은 해부학 수업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의사의 직업을 가지려는 것과 같다. 해부학 수업을 해본 적이 없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겠는가? 동일하게,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신학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 그리고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공부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영혼을 맡기겠는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팬데믹 속으로 (Into the Pandemic)

 

옛날에 봤던, <폭풍 속으로>라는 영화가 기억나네요. 또는 토네이도 소재 영화에서 토네이도 속으로 들어가 토네이도의 속성을 관찰하려 했던 영화 속의 주인공도 기억납니다. 어디론가 들어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죠.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두려움을 가득 안고 팬데믹안에 들어와 삽니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덥다고 하더니, 진짜 그런 듯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멈추어 세웠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바이러스가 멈춰 세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정말로 우리의 삶을 파괴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일까?

 

재난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문명비평가 리베카 솔닛이 자신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말하고 있는 용어인데요, 재난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은 온 우주의 어느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먼 발치서 경험하기에 그 정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가치이지요.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전거 자본주의를 멈추어 세우는 일을 해냈죠. 자본주의는 속성상 멈출 수 없는 자전거,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은데, 그래서 아무도 섣부르게 자본주의를 멈추어 세울 수 없었는데, 자본주의에 아무런 파토스가 없는 바이러스는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자본주의에 희생당하고 살아왔습니까? 수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해 왔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고통 당하며 신음하며 살아왔지만, 비판과 원망 속에서도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해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무한반복을 통해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통해 사람들은 먹고 살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의 인간성은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 의해 소모되고 맙니다. 생산을 멈출 수 없기에 생산의 원료가 되는 자연을 끊임없이 훼손해야 하고, 소비를 멈출 수 없기에 불필요한 상품을 사는데 시간과 돈을 집중적으로 씁니다. 그야말로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 영혼이 탈탈 털리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 아래 있는 인간의 영혼은 숨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은 우리에게 숨 쉴 틈을 준 것이지요. 그래서 팬데믹은 재난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재난을 통해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숨 쉴 틈 없는 세상에서 숨 쉬고 싶었는데, 비로소 우리는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토피아를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이 불안 증세는 우리가 그동안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의 자본주의 체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무한 생산과 소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묶여버렸으니,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이 불안은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불안입니다. 마치, 술을 매일 먹다, 담배를 매일 태우다, 마약을 매일 하다, 못하게 되었을 때 생기는 불안 같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팬데믹 속에서 느끼는 불안은 오히려 재난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에서 경험하는 이로운 불안이라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불안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불안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불안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지내기 보다 즐겨야 합니다. 고통을 즐긴다는 게 좀 어색하지만, 우리의 왜곡되어 있던 존재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에 생겨난 고통이라면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팬데믹 속에서 불안의 고통에 저항하는 자, 이런 사람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무한 생산과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자 일뿐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고통을 환영하는 자, 이런 사람은 재난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제 그만 무한 생산과 소비를 멈추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휴머니스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 불안의 고통을 즐깁시다.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으므로!

Posted by 장준식

민주주의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양성과 평등'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와 직결된 가치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교육론>에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네 가지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셋째는 이웃 사랑,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다.

 

이 중에서 두 번째와 네 번째 사랑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들이 잘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 별로 가르칠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열심히 가르쳐 한다. 이 사랑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매몰되어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거의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것이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기 때문이다. 잘 하지 못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성경은 참으로 정의롭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민주주의 가치로 말하면, 다양성과 평등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일신군주론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이다. 기독교는 신론 자체가 다양성(diversity)과 평등(equality 또는 unity)을 함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매몰되어 있다보니, 다양성과 평등을 공부하고 연마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가치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 가치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를 실현하는 일은 단순히 정치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가치의 문제를 아우른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하나님을 깊이 알아간다는 뜻은 민주적 가치를 깊이 체득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뜻과 같다.

 

우리는 생득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한다. 그러다 보니, 다양성을 불편해 하고, 평등을 싫어한다. 내가 누리는 풍요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을 싫어한다.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하는 바로 그러한 사랑에 흠뻑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생물학자는 그러한 현상을 일컬어 '이기적 유전자'라고 부르는 지 모르겠다. (물론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판넨베르크가 지적하듯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 몰두하는 것을 기독교적 용어로 '교만(자기집중)'이라고 부른다. 인생은 자기 집중, 교만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차별하고 혐오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위선이 없다.

 

믿음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당 가는' 도그마 또는 선동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집중에서 벗어나, 배우지 않으면,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잘 안 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 그 자체이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일생을 걸어야 하는 지난한 영적 싸움이다. 그렇게 해서 일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바로 다양성과 평등이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이다.

Posted by 장준식

플라톤과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

 

형이상학적인(meta-physics)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물체와는 달리 변하지 않는 실재를 다루는 이야기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요즘 인기가 별로 없다. 검증할 수 없고, 사람마다 확연히 다르게 말하기 때문에 '믿음'보다는 '의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드는 생각은 그가 매우 상상력이 풍부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는 말을 했듯이,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플라톤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논의도 진행하기 힘들다.

 

인간 이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영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바깥 세상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장 심오하고 궁금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적인 부분, 격정적인 부분, 그리고 욕구적인 부분이 그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성적인 부분이 격정적인 부분의 도움을 받아 욕구적인 부분을 잘 다스리면, 인간의 영혼은 상승하여 신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다.

 

기독교 영성가 에바그리오스는 이러한 플라톤의 삼분법을 받아들여, 인간의 영혼을 '지성, 화처, 욕처'로 나눈다. 플라톤의 '이성적은 부분'이나 에바그리오스의 '지성'은 헬라어로 '누스(nous)'라고 한다. 영성신학을 공부할 때, '누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에바그리오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누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역동적 성향"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의 상승' 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의 영혼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때, 그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신이 된 인간 Homo deus' 논쟁이 성행하는 요즘과 같은 과학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인가이다. 교양적인 차원에서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이나,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을 아는 것은 나쁠 게 없으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데 얼마나 실제적인 효력이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된다.

 

요즘 나는 미드 <웨스트 월드(West World)> 보는 재미에 빠져 산다. 형이상학적 이야기 또는 신학적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웨스트 월드'에서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신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닮은 AI 로봇을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웨스트 월드에서 AI 로봇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AI가 철저하게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드라마에서 보듯, AI는 차츰 '의식(consciousness)'을 가지면서 자기 자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자신과 닮은 꼴을 창조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신적인 인간'이 자기 위에 복종해야만 하는, 자신을 창조한 신이 있다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 스스로도,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이나, 그것을 기독교적 영성으로 재해석하고 구성한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을 공부하면서, 솔직히, '교양' 이상의 큰 감흥이 오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형이상학적 이야기와 신학은 계속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교양 이상의 감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오리게네스, 또는 오리게네스처럼

 

"그러나 지금도 영지(그노시스)를 구실 삼아, 비전통적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나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을 해석하면서 많은 책을 제멋대로 짜맞추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몸에 좋은 자양분이 부족한 까닭에 금지되고 참으로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양식으로 서둘러 가는 탐구적인 영혼들을 그들이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위하여 참된 방식으로 중재할 수 있고, 이른바 영지를 거짓으로 추구하는 자들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 장엄한 복음 메시지를 인증(인용하여 증거를 삼음)ㅡ 구약과 신약에 공동으로 들어 있는 교의에 일치하여ㅡ 하면서 이설의 위조문서에 반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중재하는 이들이 없었던 까닭에, 당신(암브로시우스)은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한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졌다. 당신은 비이성적이거나 몽매한 신앙을 찾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때마침 이해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했기에 당신은 그들을 버렸다"

(<요한복음 주해> 5).

 

오리게네스가 성경교사로 활동하고 수많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자 암브로시우스(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아님)의 후원이 덕분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지성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실망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영지주의에 빠진다. 그러던 중 그는 오리게네스를 만나게 되는데, 오리게네스를 통하여 암브로시우스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지성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영지주의에서 기독교 정통신앙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요한복음 주해>는 오리게네스가 암브로시우스의 전적인 지원 아래 쓴 첫 저작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저작인 <원리론>은 이 책 다음에 나온다. 암브로시우스의 후원과 격려, 또는 압력이 오리게네스로 하여금 훌륭한 기독교 저작들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견인했다.

 

기독교는 충분히 지성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를 부축이는 불순한 무리들에 의해 과학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외면당하고 있다. 위에서 오리게네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 즉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짜맞추는 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최근, 반동성애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한국가족보건협회 김지연 대표가 <너는 내것이라>라는 책을 '두란노'를 통해 냈다. 이런 책을 내준다는 것을 통해 '두란노'가 현재 한국교회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너는 내것이라>의 책 내용을 통해 김지연이라는 인물이 기독교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너는 내것이라>의 문제점을 알고 싶으신 분은 최근 올라온 뉴스앤조이의 기사를 참고하세요.)

 

대개 기독교 진리를 수호한다고 전면에 나서서 투사적 행동을 일삼는 보수기독교인들의 성경 이해는 매우 조악하다. 그들은 자신이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추악한 신념과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성경을 짜깁기 하거나 멋대로 해석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오리게네스의 이 말에 감동되어야 한다.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몸에 좋은 자양분이 부족한 까닭에 금지되고 참으로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양식으로 서둘러 가는 탐구적인 영혼들을 그들이 사로잡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독교를 위한 일이라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 신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 속고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열심을 낸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른다. 이정훈 같은 돌팔이가 자칭 '사도 바울'이라고 날뛰는 것을 보면, 그들의 광기는 답이 없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침묵하기 일쑤다. 귀찮고, 하찮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리게네스의 말대로,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들처럼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열심을 내는 그들의 가르침에 '선량한 사람들'을 어처구니 없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러한 일들이 한국교회에 편만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에 맞서, 건전한 신앙을 추구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어벤져스 리그'를 결성하여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며 좀 더 열심을 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암브로시우스가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듣고 거짓 교사들에게서 돌아섰던 것처럼, 그들도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글을 썼다. 오리게네스 뿐만 아니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 전후에 활동했던 초대교회 교부들(Early church fathers)은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그래도 기독교가 21세기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독교를 혼란 속에 몰아넣는 사악한 무리들과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지만, 이 전쟁은 어차피 종말의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주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군사'가 필요한 시대이다.

 

물리적 총성이 울리는 전쟁이 거의 없는 시대이지만, 실제로 총성 없는 전쟁은 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은 비록 정치외교경제에만 발생하고 있는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누가 나의 전우인가, 나는 누구의 전우인가.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싶다. 승리를 위하여!

Posted by 장준식

언어와 사고의 단축과 폭력

 

"기능화된 언어의 요약과 단축은 곧 '사고의 단축'(마르쿠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만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곧 폭력으로 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전재 매체의 약호화된 소통 방식과 언어 폭력 사이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단지 구세대의 자기방어적 공세가 아니라, 상징화, 서사화의 부재와 공백에 밀려드는 원초적 열정을 지적하는 것이다." (김영민, <자본과 영혼>, 25)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짧게, 쉽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폭력성이 짙게 드리워진 이유를 알 수 있는 통찰이다.

 

모든 것을 압축하고 축약해서 메시지를 신속하게 전달하려는 욕구의 밑바탕에는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메시지가 복잡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서비스'라는 명목하에 압축되고 축약되어 전달된다.

 

기독교에서 흔히 발생하는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나타난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시지가 단축되어 전달되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 칼 바르트는 어떠한 주제를 길게 늘어뜨려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도 복잡하다. 한 문장에 마침표가 한 참 뒤에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그럴까? 당연하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있어, 사고의 단축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교부들의 기독론 논쟁을 공부해 보면, 그들의 언어가 매우 복잡하고 지루하고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본다. 기독론에 대한,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부들의 언어는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단축된 언어와 사고를 전개시키면 거기에는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거대서사란 사건(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려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잠재적 폭력을 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폭력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축약된 언어를 쓰고, 단축된 사고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생산하고 동시에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자명하다. 우리는 '언어와 사고의 단축'에 저항하여 '깊고 깊게 사고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 또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쉽고 짧게, 단축된 언어와 사고를 주입시킨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우리의 영혼을 망치는 '악인'이다.

Posted by 장준식

일상을 사랑하기

 

나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공간에 앉아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똑같은 일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이러한 일이 더 정형화됐다. 한마디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일상은 원래 지루하다. 그런데 나는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사랑한다.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는 일이 더 힘들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나는 30대 초반에 조지아의 한 시골에서 개척을 했다. 조지아주 자체가 시골인데, 조지아주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인 애틀란타에서 남쪽으로 2시간 들어가야 있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으니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도시에서만 살던 내가 적응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게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는 소명의식에 하루하루를 잘 견디었다.

 

나는 그곳에서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살았다. 지루한 일상에 '강제적으로' 적응해야만 하는 운명은 때로 불평을 불러왔지만, 그래도 그 불평을 이내 막아준 것은 '사명'이었다. 그곳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야 한다는 사명감 말이다. 그렇게 지루한 일상은 7년동안 계속되었다.

 

7년 정도 지나니, 지루한 일상에 불평이 사명감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은 나에게 책 한권을 던져 주셨다. 그때 만난 책이 CBS의 정혜윤 PD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일상이 삶의 전부다'라는 말을 읽었다. 그리고 일상을 여행처럼 살지 못하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지 알게 되었다. 일상은 삶의 전부인데, 삶의 전부인 그 일상을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결국 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을 만난 이후로, '지루한 나의 일상'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7년동안 지루한 일상을 '강제적으로' 사랑했는데, <여행, 혹은 여행처럼> 책을 읽은 뒤, 강제적 사랑은 '자발적 사랑'으로 바뀌었다. 일상을 자발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니, 삶의 모든 게 달라 보였다. 그야말로, 삶 자체가 '여행, 혹은 여행처럼'으로 보였다.

 

지루한 일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지 7년이 또 지났다. 그러니까, 내가 '지루한 일상 사랑하기'를 강제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한 뒤로, 도합, 14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7년동안 '강제적으로' 일상을 사랑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 강제적 사랑의 시기가 없었다면, 자발적 사랑의 시기는 그만큼 깊고 풍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루한 일상에 대한 강제적 사랑의 시기가 있었기에, 자발적 사랑 이후의 삶은 만족과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고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뇌 가운데서도 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이 있다. 이게 신비한 거다.)

 

어느덧 20년 목회 경험을 지니게 된 나는, 목회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한 가지만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누가 해온다면, 이런 조언을 해주고 싶다.

 

"젊은 시절, 불혹의 나이 40에 들어서기 전, 10년 정도, 시골에 가서, 자기 자신을 아주 지루한 일상 속으로 던져 넣으십시오. 그곳에서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고독해 하며, 고통스러워 하며, 하나님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지루한 일상을 마침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축복을 안아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나머지 목회 인생은 '여행, 혹은 여행처럼'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

역사의 4대 악과 비판

 

역사의 4대 악으로, 파시즘, 공산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를 꼽는다. 모두 인류 역사에 해악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별히 위의 4가지 '이데올로기'는 인간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서 4대 악으로 분류된다.

 

민주의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자유시장경제를 주창하는 서구사회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서구사회에서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맹렬한 비판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한계 내애서만 세상에 눈을 뜨고, 그 세상에 대하여 비판을 가할 수 있다. 서구사회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비판을 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데올로기들 때문에 고통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사회가 인종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하여 비판을 쏟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인종주의나 식민주의의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종주의나 식민주의 비판은 서구사회가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같은 제3세계에서 가해져 왔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제3세계가 가하는 인종주의나 식민주의 비판에 대하여 들어주는 척 하나, 실상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니, 그러한 감수성이 서구사회에는 없다. 인종주의나 식민주의를 통해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제국주의'적인 사고가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고, 역사의 4대 악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여,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는 역사의 4대 악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한 일상에서 역사의 4대 악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실상 내면에 흐르는 메커니즘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성을 해쳐온 이들 이데올로기가 꿈틀댄다.

 

세상은 자꾸 인간들로 하여금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야수가 될 것인가, 인간이 될 것인가. 야수가 되면 상대방을 제압할 때 느끼는 짜릿함을 맛볼 것이나 인간성을 잃게 될 것이고, 인간이 되면 온통 절제로 가득 찬 인생이라 고통스러울 것이나 인간성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이미 세상은 야수사회가 된 듯 하나, 여전히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요즘 '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며 피곤한 삶을 산다. 그러나, 정신의 바이러스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이미 정신의 바이러스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두려운 마음을 갖는 것만큼, 정신의 바이러스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 시대에 정작 필요한 'Quarantine(격리)'은 무엇인가?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다 죽으면 영예로운 것이지만, 백 년을 살아도 짐승처럼 살다 죽으면 수치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짐승처럼 백 년을 살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만, 정작, 인간답게 하루를 살기 위해 어떠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

죽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대상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사랑할 때만 사람은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죽음의 치명적인 힘을 인정할 수 있다"(몰트만, <희망의 신학> 229).

 

아름다운 통찰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죽음도 남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는다. ?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이 되지 못하고, 그저 '뉴스'로 남을 뿐이다.

 

죽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실은 누구에게나 그 힘을 쓰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오직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그 힘을 쓴다. 이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거다.

 

상황이 이렇다면, 인간은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일'을 멈춰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사랑하기를 그만 두느니, 고통 당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 당하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는 일을 멈춘 사람이다. 그들은 항상 타인과 거리를 둔다. 그가 타인으로 머물러 있는 이상, 나는 그들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고통 당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그들은 항상 타인과의 거리 두기를 포기한다. 거리 두기를 포기함으로, 사랑함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선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신화(Theosis)'되는 길은 '사랑'에 놓여 있다. 사랑은 '죽음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 놀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거룩한 행위인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죽음이 주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 중 사랑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거룩하고 위대하다. 그 죽음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지불한 사랑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많냐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많은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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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마르크스의 유령

 

마르크스는 '물질'을 긍정했다. 물질에 대한 그의 긍정은 매우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다. 마르크스는 형이상학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물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내세운다.

 

그는 물질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플라톤의 생각을 이어받은 거다. 플라톤의 생각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이 세상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매우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닮아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선재하는 것이고, 그 물질을 가지고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악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구원은 이 악한 물질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플라톤의 생각을 종교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지주의자들과 생각의 결이 다르다. 우선 마르크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생각을 종교화시키지 않는다. 물질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선재(원래 있었던 것)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같으나, 그렇다고, 구원을 탈물질, 탈세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구원관은 매우 역사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한없이 긍정한 근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을 통해 인간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역사 발전의 토대는 '물질'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역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을 남겼다. 첫째, 노동이 참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둘째, 물질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이다.

 

마르크스를 통해 노동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천시하며, 노동을 하지 않는 양반 그룹과 노동을 하는 천민 그룹으로 나뉘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에 '물질이 전부다'라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게 된 것 같다. 다른 말로, 요즘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물질이 전부다'라는 마르크스의 유명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정신이 삶의 토대가 아니고, 물질이 삶의 토대라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파급력이 매우 크다.

 

마르크스가 등장한 이래, 기독교는 맥을 못 추게 되었다. 기독교가 세계사에 출현한 이후로, 기독교는 정신(Spirit)이 물질보다 먼저이고, 정신이 물질보다 고귀하며,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삶의 토대라고 가르쳐 왔기에, 그 반대를 말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당연히 맥을 못 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을 정신보다 저급하게 보는 생각은 기독교의 사상이 아니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기독론, 특별히 성육신은 결코 물질을 정신보다 저급하게 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성육신에 의해서 재평가되어야 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이 사람의 마음을 그릇되게 미혹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안타까운 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에 의해 더 잘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물질적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그것은 마르크스의 유령이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마르크스의 유령에 홀려 산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경하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읽었다.

 

첫 번째 챕터에서 김누리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챕터를 읽으며 정확히 한국 기독교의 괴리 현상과 오버랩 됐다.

 

왜 김누리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라고 평할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광화문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이 집에 가서는 완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아이들을 쥐 잡듯이 들볶는 권위주의적 교사요, 혹은 회사에 가서는 갑질을 일삼는 상사라면, 민주주의는 어디서 하지요? 다시 말하면 이 나라에서는 '광장 민주주의' '일상 민주주의'가 괴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32).

 

그는 한국의 일상 민주주의가 낙후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 군사독재 시대가 남긴 집단주의, 그리고 군사주의와 병영문화'를 꼽는다. 특별히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 '군사문화'이다.

 

한국의 모든 집단에서는 '군사문화'가 그 근본에서 작동한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물론 이것은 유교 문화라고 볼 수 있으나, 나이가 깡패 역할을 하는 것은 군사문화다), 학번을 따져 서열 세우는 문화, 정신교육 같은 것도 해병대 가서 받는 문화 등이 그것이다.

 

군사문화가 그 기저에 작동하는 한국사회를 일컬어 김누리 교수는 "사디스트(sadist)와 마조히스트(mashchist)들의 향연"이라고 말한다(33).

 

최근 한국교회에서 '빛과진리교회' 사건이 이슈다. 이 교회에서 발생한 사건은 한국의 군사문화가 한국사회에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들은 '교회리더훈련' 명목으로 교인들에게 공동묘지에서 매를 맞고, 인분을 먹는 일을 요구했다. 그들이 '리더훈련'을 위해서 내세운 성경말씀은 고린도후서 6장의 말씀이다.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까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빛과진리교회의 문제를 언론을 통해 밝힌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위의 성경구절이 이렇게 적용되었다고 말한다. "특정 행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느나, 훈련 참가자들은 이 구절을 적용해 '믿음이 뛰어나다'는 점을 보여줘야 했다. 예를 들어, B LTC 훈련은 이렇게 구성됐다. '먹지 못함' 3일 금식, '매 맞음'은 종로 게이 바 골목에 가서 매 맞을 때까지 전도하기, '영광과 욕됨'은 사창가에 가서 전도하기, '많이 견디는 것'은 양수리에서 교회까지 약 30k 7시간 30분 만에 행군해서 도착하기, '갇힘'은 음식물 쓰레기장에 3시간 갇혀 있기 등으로 진행됐다.' (뉴스앤조이, 2020 4 30일 자 보도)

 

물론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비뚤어진 이해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이러한 문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가 작동하는 것이다.

 

저자는 '군사문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작동하는 것을 에리히 프롬의 책 <건전한 사회>에서 말하고 있는 '정상성의 병리성(pathology of normality)'의 용어를 들어 설명한다. 이는, 너무나 병든 사회인데,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정상생활 하는 사람들을 정상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와 군사문화가 합쳐져 생긴 기형적인 믿음 때문이다. 군사문화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목사를 섬기는 것이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오도되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군사문화에 대한 청산과 민주주의의 일상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을 안다면, 대한민국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작동하고 있는 군사문화를 해체하고 일상의 민주주의가 자리잡는 일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결코 그 사회의 컨텍스트와 분리되어 생존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를 막아 설,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속속히 일어나길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Psilanthropism 그리스도 인간론

 

'싸일랜뜨로피즘'이라고 발음한다. 한국말로 '그리스도 인간론'이라 번역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인간'이라고 말한 분파는 모두 이단으로 몰렸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두 본성'이 있다. 인성과 신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뉘는 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들어 있는 본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인성을 말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인간'이라고 하면 안 되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인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 된다. 이것은 5세기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의 논쟁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고,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다. 그 당시 '뜨는' 신학은 'Theotokos'였다. Mother of God'이라 한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는 명칭이다. 여기서 마리아 신학이 시작되지만, 그 당시 논쟁은 마리아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마리아를 'Mother of God(Theo-Tokos)라고 부른 이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고백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소위 아리우스주의자들은 'Anthropotokos' 'Mother of Man'을 고백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마리아는 '인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에 이 문제가 발생하자, 네스토리우스가 두 진영이 만족할 만한 신학적 해결을 위해 고안해 낸 용어(title)가 바로 'Christotokos', 'Mother of Christ'이다.

 

지금 보면, 재치 있는 해결책 같지만, 그 당시 이 문제는 엄청난 저항을 불러왔고, 급기야 '국제적인' 신학논쟁을 불러왔고,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두 번이나 소집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마련된 공의회가 바로 에베소 공의회(431)와 칼케돈 공의회(451)이다.

 

'Mother of God'의 고백을 지켜내기 위해 등판한 신학자가 바로 키릴로스이고, 키릴로스의 학식과 정치적 수완과 영향력은 결국 마리아에 대한 정통 고백을 'Mother of God'으로 이끌며,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추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John McGuckin의 책 <Saint Cyril of Alexandria and Christological Controversy>에 보면, 네스토리우스가 위의 신학논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이 논쟁에는 명백히 정치가 개입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그 당시 황제의 섭정인이었던 황제의 누이 the Augusta Aelia Pulcheria의 개입이 두드러진다. 그녀 자신이 '처녀'로서 마리아 신학에 관심이 많았고, 마리아를 'Mother of God'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지지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처녀'로서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archbishop)으로 부임한 후, 그 이전에 교회의 예전에서 여성인 Pulcheria에게 제공되는 특권이 중단되었다. 그 당시 성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황제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는데, 황제를 섭정하던 Pulcheria는 황제 옆에서 황제와 같이 성찬 받는 것이 허락되어 왔다. 네스토리우스는 이것을 부당하게 여겨 Pulcheria에게 성찬 주는 것을 거부했고, 그로 인해 Pulcheria는 감정적인 상처를 받았다. 이 일로 인해 네스토리우스는 Pulcheria와 정적이 되고, 그 이후에 진행된 신학논쟁에서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정치적 싸움에 휘말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몰려 대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이집트로 유배를 가게 되지만, 그의 신학 논쟁은 여전히 논란 중이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에 대하여 'Mother of God'을 인정하지 않고, 'Mother of Christ'했던 것은 그가 안디옥학파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안디옥학파 전통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안디옥 학파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분명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다만, 위격과 본질의 언어적 이해가 달랐을 뿐이다.

 

기독론, 또는 삼위일체론 논쟁에서 중요한 용어는 '본성(ousia), '실체(hypostasis)', 그리고 '위격(persona)'이다. 위격은 그리스도의 겉모습을 말하고, 실체는 그리스도의 내적 실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실체'에 대한 이해가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간에 달랐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했던 키릴로스는 '실체'라는 용어를 '위격'이라는 용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키릴로스는 '두 개의 다른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기 위해 실제적인 결합체로 함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안디옥 학파였던 네스토리우스에게 '실체'라는 용어는 위격 이전의 실제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것을 두 본성의 혼합이라고 보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혼합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 출생, 고난,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일컫는 'Mother of God'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용어에 대한 개념 이해가 다르다 보니,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도 다르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몰릴 정도로 잘못된 주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로스의 기독론 논쟁은 오해와 불신으로 빚어진 비극처럼 보인다. 13세기 시리아 정교회의 신학자 바르 에브로요(Bar Ebroyo/Bar Hebraeus)도 다음과 같이 이런 의견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논쟁은 실제적인 본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용어와 개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비록 기독론적인 입장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심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신앙고백 문제로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Bar Hebraeus's Book of Dove, 60).

 

물론 명백히 틀린 고백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고백들까지 모두 기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적어도 오해와 불신에서 생겨난 논쟁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로 포용하고 이해하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

분석하지 않기 - 신비에 잠기기

 

과학적 사고란 대상을 분석하는 사고를 말한다. 학문은 이렇게 발전되어 왔다. 대상을 분석하여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파악'하는 것이 학문의 원리이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를 한다. 가령 상대방의 성격을 분석하여, 그 사람이 어떠한 유형의 사람인지 '파악'한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며 안심해 한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대상(타자라고 불러도 좋다)을 분석하는 일은 가능한가? 우리는 왜 대상을 분석하고 싶어하는가?

 

가령,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이유는 아직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이유는 그것을 정복하여 더 이상 그것의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떤 면에서, 뭔가를 분석하여 파악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분석은 대상에 대한 '신비감'을 무너뜨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상이 파악되고 나면 사람은 그 파악된 대상에 대하여 지배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파악된 존재는 나에게 더이상 신비를 줄 수 없다. 내 존재보다 아래의 존재인 것처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에게는 결코 신비감을 갖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발휘해야 하는 삶의 부분과 그러면 안 되는 삶의 부분을 구별하고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상대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일을 삼가는 게 좋다. 상대방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신비는 무너지고 만다. 신비감 없는 사랑은 타다 만 장작이 될 뿐이다.

 

현대인들이 가진 최고의 비극 중에 하나는 세상을 모두 '과학적 사고'로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약육강식'의 세상처럼 서로가 서로를 자기의 발 아래 두려 할 뿐, 상대방에 대한 신비감과 경외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그리고 인간과 신(God) 사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분석하지 않고 신비에 잠기는 연습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분석하면 대상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착각을 거둘 필요가 있다. 분석하면 자신이 분석한 만큼만 알게 될 뿐이고, 나머지 분석하지 못한 부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어, 분석된 존재는 그 존재의 크기가 내가 분석한 만큼의 깊이와 넓이를 가지게 될 뿐이다. 이 얼마나 낭비인가.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분석하지 않고 신비에 잠길 때,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분석은 '냉소'를 불러오지만, 신비는 감사와 경탄을 불러올 것이다. 냉소가 판 치는 세상에 살기보다 감사와 경탄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싶다.

 

나는 그대를 분석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를 신비롭게 사랑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

한국의 지배계급의 주요 논리

 

1) 성장과 발전 가치의 절대화

2) 반공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확대

3) 미국 없는 독자생존의 불가능성

(현대정치의 위기와 비전, 121)

 

이번 한국의 총선 결과는 팬데믹 영향일까, 아니면 위에서 열거한 지배계급의 주요 논리에 대한 반발일까?

 

'자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1번과 2번의 논리에 맞닿아 있다. 자유 민주주의를 거역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적인 이념인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패배하는 것이라 여긴다.

 

성장과 발전 가치의 절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끝없는 탐욕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과 같다. 탈북자 출신들이 보수당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게 된 것은 한국의 보수당이 아직까지 얼마나 2번의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지 알 수 있는 예시이다.

 

탈북자 출신 정치인들이 한국 사회에 희망이 되려면 '반공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확대'를 공고히 하는 데,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치에 활용하는 데 그치면 안 된다. 그러한 논리와 기반으로 한국에서 정치활동을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들은 '새터민'의 인권과 번영을 위해 일해야 함과 동시에 '사회적 약자층'의 인권과 번영도 함께 챙겨야 한다. 더 나아가, 남북통일을 위한 지렛대가 되어야지, 반공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활용하여 남북분열을 조장하면 안 된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대국'에 기대어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오랜 세월 한국은 중국에 기대어 살았고, 미국에 기대어 산지도 벌써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게다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현상에 대처하고 있는 미국의 그 부족한 역량을 목도하고서도 아직까지 '미국 만세'를 부르고 살 것인가? 한국은 더이상 미국의 헐리우드 액션에 속지 말아야 한다. 미국은 그동안 헐리우드 영화 등을 통해 거대서사를 창조하여, 그 거대서사 속에서 자신을 극대화시키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미국은 지구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기를 구원해 주는 메시아의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자연발생 위기가 닥쳐도, 외계인이 침입해도, 미국은 언제나 앞장서서 자신들의 발전된 문명과 기술을 바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해 왔다.

 

그런데, 미국의 거대서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 비참하게 무너졌다. 실제 문제가 발생하니, 대처 능력이 없는 게 탄로났다. 동네에서 제일 싸움 잘 하는 '형님'인 줄 알았는데, 막상 붙어보니 별거 아닌 허풍쟁이였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의 논리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의 지배계급의 논리는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아직까지 이 논리를 통해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든다면, 그들은 스스로 멍청이인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내가 보기에 민주당의 국정철학도 그렇게 진보적이지 않다. 민주당의 국정철학은 보수당이 가질 만한 정도 밖에 안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국의 보수당이 얼마나 시대에 뒤쳐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시대는 변한다. 그 변화에 맞춰 정치도 열심히 변해야 한다. 안 그러면 그 어느 당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불한당'이 될 뿐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