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한탄]
"나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곳으로 급히 달려간다. 나는 인간이 나와 밀접하게 연관된 존재이며, 그에게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디선가 기독교인들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나는 더 빨리 그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틀림없이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역시 -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나는 부끄럽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시장들, 법정들, 시청들, 그리고 교회들이 시끄러운 소음 속에 휘말려 있다. 거기서 들리는 다투는 소리는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ㅡ 에라스무스의 <평화의 한탄>에서
에라스무스는 '평화'을 의인화하여, 인간들이,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멀리할 뿐 아니라 픽밥하고 있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인간의 재발견, 이성의 발견이라고 하는 문화적 토양 속에서 에라스무스는 이성을 가진 인간,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그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기대는 산산이 무너진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동시대를 살며 종교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자들과 결이 달랐다. 특별히 인간론에서 그 결의 다름이 드러나는데,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이성을 통한 책임 있는 신앙을 강조한 반면, 루터는 인간의 죄성과 은혜의 구원을 강조했다.
개신교는 루터의 전통에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선호하지만, 이러한 신학 사상이 인간의 실존에 미친 해악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루터가 어거스틴의 전통에 서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시켜 나갔기에 죄와 은총을 강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에라스무스와 결별하게 된 지점은 안타깝다.
기독교 신학은 크게 두 줄기의 싸움이다. 인간의 이성이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는 사상과 인간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아무런 기여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개혁 전통 중에서도 루터와 칼뱅의 전통이 지배적이라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바라는 수동적 의에 매달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제 이러한 신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 대한 스토리는 소위 '은혜롭기'는 하나, 인간을 너무 무력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요즘 가장 큰 이슈인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하여 나는 루터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루터는 인간에게서 '책임적 이성'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망가져가는 지구환경 앞에 너무 무력하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는데, 그가 보기에 교회의 분열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불러올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분열은 '평화'를 핍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에라스무스의 예상대로 교회의 분열은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의 기나긴 전쟁으로 발전했고, 그로 인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개신교 신학은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핍박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사상의 뿌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선 루터와 칼뱅의 신학사상을 비판적으로 돌아보아야 하고,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결국 다른 길로 가게 된 에라스무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무엇을 놓쳤는지 발견하여, 종교개혁사상을 이 시대에 새롭게 재구성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지금 무슨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면서, 자신들은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거라고 착각하며, 영원히 평화를 핍박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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