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교회]

 

교회를 구성하는 4대 표지가 있다. 하나의(one), 거룩하고(holy), 보편적이며(catholic), 사도적(apostolic) 교회.

 

이 중에서 '보편적'이란 말은 매우 정치적인 용어이다. 교회의 보편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처음 교회가 탄생한 로마제국의 정치/경제적 토양을 알아야 한다.

 

성경시대의 로마제국은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경기로 인해 매우 힘든 시절이었다. 전쟁과 반란이 사회를 뒤흔들었고, 전염병과 기아, 물가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 미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한 채 살아야 했다.

 

정치적 불안의 시대에 '예수의 출현'은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예수 사건' 이후에 생겨난 교회는 자연스럽게 종말 지향적인 사상을 통해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불황 때문에 오는 극심한 고통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서 극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제국의 사람들에게 강한 매력을 전달했고, 삶의 자리에서 고통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특별히 로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들에게 교회는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 죄수들, 강제노역자들, 선원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로마제국 아래서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교회 안에서는 인간 대접을 받았다. , 그들은 교회 안에서 매우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교회, 에클레시아는 유대인들이나 로마제국의 각 나라들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를 파괴했다. 그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허물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없앴으며,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 놓여 있던 담을 허물었다. 요즘 말로 하면, 교회는 메트로폴리타니즘의 실현이었다.

 

교회를 일컬어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야'라는 선교적 또는 지배적 용어가 아니다. 기독교의 보편성은 국가적, 정치적 구조를 초월하는 '화합과 화해'의 원리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보편성은 제국주의를 초월하는 개념에서 제국주의와 결탁한 개념으로 바뀌어 폭력적인 개념으로 오해되고 있다. 교회의 보편성은 기독교 신앙을 믿지 않는 이에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는 원리로 작용할 수 없다. 선교를 '정복'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기독교는 제국주의를 초월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태생은 법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인은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더해, '법의 보호 바깥에 있는'이라는 뜻도 있다. 기독교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죄인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기관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의 은혜로 초청하는 공동체이다. 무엇보다 로마제국과 연결하여 법의 보호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로마제국의 법보다 더 크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법 아래에서 보호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보편적인 교회'라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보편 교회'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별금지법을 촉구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한국의 보수 개신교 계에서는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펼치는가 모르겠다. 아마도 제국으로서의 교회가 되어 누군가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제국주의적 욕망이 그들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보편 교회는 따뜻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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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