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속으로 (Into the Pandemic)
옛날에 봤던, <폭풍 속으로>라는 영화가 기억나네요. 또는 토네이도 소재 영화에서 토네이도 속으로 들어가 토네이도의 속성을 관찰하려 했던 영화 속의 주인공도 기억납니다. 어디론가 들어가는 일은 두려운 일이죠.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두려움’을 가득 안고 ‘팬데믹’ 안에 들어와 삽니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덥다’고 하더니, 진짜 그런 듯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멈추어 세웠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바이러스가 멈춰 세운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정말로 우리의 삶을 파괴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일까?
‘재난 유토피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문명비평가 리베카 솔닛이 자신의 저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말하고 있는 용어인데요, 재난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은 온 우주의 어느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값어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먼 발치서 경험하기에 그 정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면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가치이지요.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자전거 자본주의’를 멈추어 세우는 일을 해냈죠. 자본주의는 속성상 멈출 수 없는 자전거,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와 같은데, 그래서 아무도 섣부르게 자본주의를 멈추어 세울 수 없었는데, 자본주의에 아무런 파토스가 없는 바이러스는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자본주의’에 희생당하고 살아왔습니까? 수없이 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해 왔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고통 당하며 신음하며 살아왔지만, 비판과 원망 속에서도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해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의 무한반복’을 통해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그렇게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통해 사람들은 먹고 살지요. 그러는 사이 우리의 인간성은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 의해 소모되고 맙니다. 생산을 멈출 수 없기에 생산의 원료가 되는 자연을 끊임없이 훼손해야 하고, 소비를 멈출 수 없기에 불필요한 상품을 사는데 시간과 돈을 집중적으로 씁니다. 그야말로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에 영혼이 탈탈 털리고 마는 것이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 아래 있는 인간의 영혼은 숨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은 우리에게 숨 쉴 틈을 준 것이지요. 그래서 팬데믹은 ‘재난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재난을 통해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숨 쉴 틈 없는 세상에서 숨 쉬고 싶었는데, 비로소 우리는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토피아를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불안해합니다. 이 불안 증세는 우리가 그동안 ‘무한 반복되는 생산과 소비’의 자본주의 체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무한 생산과 소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이 묶여버렸으니,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이 불안은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불안입니다. 마치, 술을 매일 먹다, 담배를 매일 태우다, 마약을 매일 하다, 못하게 되었을 때 생기는 불안 같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팬데믹 속에서 느끼는 ‘불안’은 오히려 ‘재난 유토피아’로 향하는 길에서 경험하는 ‘이로운 불안’이라고 말해야 할 듯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불안’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불안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불안의 시대를 고통스럽게 지내기 보다 즐겨야 합니다. 고통을 즐긴다는 게 좀 어색하지만, 우리의 왜곡되어 있던 존재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에 생겨난 고통이라면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죠.
팬데믹 속에서 불안의 고통에 저항하는 자, 이런 사람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무한 생산과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자 일뿐입니다. 그러나 불안의 고통을 환영하는 자, 이런 사람은 ‘재난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제 그만 ‘무한 생산과 소비’를 멈추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휴머니스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 불안의 고통을 즐깁시다.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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