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

 

형이상학적인(meta-physics)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물체와는 달리 변하지 않는 실재를 다루는 이야기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요즘 인기가 별로 없다. 검증할 수 없고, 사람마다 확연히 다르게 말하기 때문에 '믿음'보다는 '의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드는 생각은 그가 매우 상상력이 풍부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이다"라는 말을 했듯이,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플라톤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논의도 진행하기 힘들다.

 

인간 이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영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바깥 세상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장 심오하고 궁금한 질문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적인 부분, 격정적인 부분, 그리고 욕구적인 부분이 그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성적인 부분이 격정적인 부분의 도움을 받아 욕구적인 부분을 잘 다스리면, 인간의 영혼은 상승하여 신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다.

 

기독교 영성가 에바그리오스는 이러한 플라톤의 삼분법을 받아들여, 인간의 영혼을 '지성, 화처, 욕처'로 나눈다. 플라톤의 '이성적은 부분'이나 에바그리오스의 '지성'은 헬라어로 '누스(nous)'라고 한다. 영성신학을 공부할 때, '누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에바그리오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누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인간의 역동적 성향"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의 상승' 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의 영혼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때, 그 아름다움이 완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신이 된 인간 Homo deus' 논쟁이 성행하는 요즘과 같은 과학시대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인가이다. 교양적인 차원에서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이나,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을 아는 것은 나쁠 게 없으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데 얼마나 실제적인 효력이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된다.

 

요즘 나는 미드 <웨스트 월드(West World)> 보는 재미에 빠져 산다. 형이상학적 이야기 또는 신학적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다. 그런데 '웨스트 월드'에서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신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닮은 AI 로봇을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웨스트 월드에서 AI 로봇은 인간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AI가 철저하게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드라마에서 보듯, AI는 차츰 '의식(consciousness)'을 가지면서 자기 자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문다.

 

자신과 닮은 꼴을 창조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신적인 인간'이 자기 위에 복종해야만 하는, 자신을 창조한 신이 있다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나 스스로도, 플라톤의 영혼의 삼분법이나, 그것을 기독교적 영성으로 재해석하고 구성한 에바그리오스의 영혼의 삼분법을 공부하면서, 솔직히, '교양' 이상의 큰 감흥이 오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형이상학적 이야기와 신학은 계속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교양 이상의 감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