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사고의 단축과 폭력
"기능화된 언어의 요약과 단축은 곧 '사고의 단축'(마르쿠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만으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곧 폭력으로 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므로 전재 매체의 약호화된 소통 방식과 언어 폭력 사이에서 어떤 관련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단지 구세대의 자기방어적 공세가 아니라, 상징화, 서사화의 부재와 공백에 밀려드는 원초적 열정을 지적하는 것이다." (김영민, <자본과 영혼>, 25쪽)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짧게, 쉽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폭력성이 짙게 드리워진 이유를 알 수 있는 통찰이다.
모든 것을 압축하고 축약해서 메시지를 신속하게 전달하려는 욕구의 밑바탕에는 상업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메시지가 복잡하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서비스'라는 명목하에 압축되고 축약되어 전달된다.
기독교에서 흔히 발생하는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나타난다. 이렇게 기독교의 메시지가 단축되어 전달되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기독교 신학자 중에 칼 바르트는 어떠한 주제를 길게 늘어뜨려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도 복잡하다. 한 문장에 마침표가 한 참 뒤에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그럴까? 당연하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있어, 사고의 단축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교부들의 기독론 논쟁을 공부해 보면, 그들의 언어가 매우 복잡하고 지루하고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본다. 기독론에 대한,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삼위일체론에 대한 교부들의 언어는 길고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단축된 언어와 사고를 전개시키면 거기에는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거대 서사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거대서사란 사건(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려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잠재적 폭력을 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의 단축은 폭력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축약된 언어를 쓰고, 단축된 사고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생산하고 동시에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자명하다. 우리는 '언어와 사고의 단축'에 저항하여 '깊고 깊게 사고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폭력의 가해자, 또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쉽고 짧게, 단축된 언어와 사고를 주입시킨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우리의 영혼을 망치는 '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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