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대상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오직 사랑할 때만 사람은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죽음의 치명적인 힘을 인정할 수 있다"(몰트만, <희망의 신학> 229쪽).
아름다운 통찰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고, 죽음도 남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는다. 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나에게 고통이 되지 못하고, 그저 '뉴스'로 남을 뿐이다.
죽음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나, 실은 누구에게나 그 힘을 쓰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오직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그 힘을 쓴다. 이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거다.
상황이 이렇다면, 인간은 죽음의 힘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일'을 멈춰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사랑하기를 그만 두느니, 고통 당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 당하지 않기 위하여 사랑하는 일을 멈춘 사람이다. 그들은 항상 타인과 거리를 둔다. 그가 타인으로 머물러 있는 이상, 나는 그들 때문에 고통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고통 당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기로 결단한 사람이다. 그들은 항상 타인과의 거리 두기를 포기한다. 거리 두기를 포기함으로, 사랑함으로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선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신화(Theosis)'되는 길은 '사랑'에 놓여 있다. 사랑은 '죽음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사랑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 놀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거룩한 행위인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은 죽음이 주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 중 사랑을 포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거룩하고 위대하다. 그 죽음의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지불한 사랑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많냐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렇게 고통이 많은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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