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유령
마르크스는 '물질'을 긍정했다. 물질에 대한 그의 긍정은 매우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다. 이게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다. 마르크스는 형이상학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물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형이상학적인 근거를 내세운다.
그는 물질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플라톤의 생각을 이어받은 거다. 플라톤의 생각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이 세상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매우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 닮아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선재하는 것이고, 그 물질을 가지고 신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악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에게 구원은 이 악한 물질 세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플라톤의 생각을 종교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영지주의자들과 생각의 결이 다르다. 우선 마르크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생각을 종교화시키지 않는다. 물질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선재(원래 있었던 것)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같으나, 그렇다고, 구원을 탈물질, 탈세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구원관은 매우 역사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한없이 긍정한 근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을 통해 인간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 역사 발전의 토대는 '물질'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을 역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두 가지 중요한 통찰을 남겼다. 첫째, 노동이 참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둘째, 물질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이다.
마르크스를 통해 노동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노동을 천시하며, 노동을 하지 않는 양반 그룹과 노동을 하는 천민 그룹으로 나뉘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에 '물질이 전부다'라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게 된 것 같다. 다른 말로, 요즘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물질이 전부다'라는 마르크스의 유명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정신이 삶의 토대가 아니고, 물질이 삶의 토대라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 파급력이 매우 크다.
마르크스가 등장한 이래, 기독교는 맥을 못 추게 되었다. 기독교가 세계사에 출현한 이후로, 기독교는 정신(Spirit)이 물질보다 먼저이고, 정신이 물질보다 고귀하며,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 삶의 토대라고 가르쳐 왔기에, 그 반대를 말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당연히 맥을 못 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질을 정신보다 저급하게 보는 생각은 기독교의 사상이 아니다. 기독교의 창조론과 기독론, 특별히 성육신은 결코 물질을 정신보다 저급하게 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성육신에 의해서 재평가되어야 하고, 마르크스의 유령이 사람의 마음을 그릇되게 미혹하지 않도록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안타까운 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에 의해 더 잘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물질적인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그것은 마르크스의 유령이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마르크스의 유령에 홀려 산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경하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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