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 또는 오리게네스처럼
"그러나 지금도 영지(그노시스)를 구실 삼아, 비전통적 가르침을 신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나고,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을 해석하면서 많은 책을 제멋대로 짜맞추고 있다.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몸에 좋은 자양분이 부족한 까닭에 금지되고 참으로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양식으로 서둘러 가는 탐구적인 영혼들을 그들이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위하여 참된 방식으로 중재할 수 있고, 이른바 영지를 거짓으로 추구하는 자들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이 장엄한 복음 메시지를 인증(인용하여 증거를 삼음)ㅡ 구약과 신약에 공동으로 들어 있는 교의에 일치하여ㅡ 하면서 이설의 위조문서에 반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중재하는 이들이 없었던 까닭에, 당신(암브로시우스)은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한때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졌다. 당신은 비이성적이거나 몽매한 신앙을 찾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에, 때마침 이해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했기에 당신은 그들을 버렸다"
(<요한복음 주해> 제 5권).
오리게네스가 성경교사로 활동하고 수많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자 암브로시우스(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아님)의 후원이 덕분이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지성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실망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영지주의에 빠진다. 그러던 중 그는 오리게네스를 만나게 되는데, 오리게네스를 통하여 암브로시우스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지성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영지주의에서 기독교 정통신앙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요한복음 주해>는 오리게네스가 암브로시우스의 전적인 지원 아래 쓴 첫 저작이다. 오리게네스의 주저작인 <원리론>은 이 책 다음에 나온다. 암브로시우스의 후원과 격려, 또는 압력이 오리게네스로 하여금 훌륭한 기독교 저작들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견인했다.
기독교는 충분히 지성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를 부축이는 불순한 무리들에 의해 과학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는 외면당하고 있다. 위에서 오리게네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 즉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짜맞추는 자들에 의해 기독교 신앙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최근, 반동성애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한국가족보건협회 김지연 대표가 <너는 내것이라>라는 책을 '두란노'를 통해 냈다. 이런 책을 내준다는 것을 통해 '두란노'가 현재 한국교회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너는 내것이라>의 책 내용을 통해 김지연이라는 인물이 기독교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너는 내것이라>의 문제점을 알고 싶으신 분은 최근 올라온 뉴스앤조이의 기사를 참고하세요.)
대개 기독교 진리를 수호한다고 전면에 나서서 투사적 행동을 일삼는 보수기독교인들의 성경 이해는 매우 조악하다. 그들은 자신이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추악한 신념과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성경을 짜깁기 하거나 멋대로 해석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오리게네스의 이 말에 감동되어야 한다.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몸에 좋은 자양분이 부족한 까닭에 금지되고 참으로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양식으로 서둘러 가는 탐구적인 영혼들을 그들이 사로잡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기독교를 위한 일이라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의 말과 행위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 신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있다. 속고 있는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열심을 낸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모른다. 이정훈 같은 돌팔이가 자칭 '사도 바울'이라고 날뛰는 것을 보면, 그들의 광기는 답이 없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침묵하기 일쑤다. 귀찮고, 하찮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리게네스의 말대로, 우리가 침묵하고 그들에게 반대하여 참되고 건전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들처럼 열심을 내지 않는다면, 열심을 내는 그들의 가르침에 '선량한 사람들'을 어처구니 없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이미 그러한 일들이 한국교회에 편만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에 맞서, 건전한 신앙을 추구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어벤져스 리그'를 결성하여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며 좀 더 열심을 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암브로시우스가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듣고 거짓 교사들에게서 돌아섰던 것처럼, 그들도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오리게네스는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열심히 글을 썼다. 오리게네스 뿐만 아니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회의 전후에 활동했던 초대교회 교부들(Early church fathers)은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그래도 기독교가 21세기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기독교를 혼란 속에 몰아넣는 사악한 무리들과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지만, 이 전쟁은 어차피 종말의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오늘날은 그 어느때보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주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군사'가 필요한 시대이다.
물리적 총성이 울리는 전쟁이 거의 없는 시대이지만, 실제로 총성 없는 전쟁은 더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것은 비록 정치외교경제에만 발생하고 있는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누가 나의 전우인가, 나는 누구의 전우인가.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싶다. 승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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