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골로새서는 거짓 교훈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교훈은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혼합하여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을 말한다.

 

왜곡된 유대주의와 헬라의 이원론이 만나면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무엇보다 육신을 부정하게 되고, 학대하게 되며, 거짓 겸손에 사로잡히게 된다.

 

왜곡된 유대주의는 율법을 오용하게 만든다. 이는 율법의 몇 가지 행위를 철저히 지키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데, 음식 규정이나 절기 규정 같은 것을 통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율법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종교적 금욕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대신 율법이 생명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종교적 금욕주의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사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헬라의 이원론과 만나게 되면 몸에 대한 자기 비하는 겉잡을 수 없게 번진다. 플라톤의 사상에 뿌리를 둔 헬라철학은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물질세계를 영원의 세계의 그림자로만 볼 뿐이다. 그래서 이원론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악한 물질세계를 탈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몸을 비하하게 만든다.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몸을 정당하게 학대하기 위해서 종교적 금욕주의는 매우 요긴한 도구가 된다. 복음도 이렇게 변한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말을 서슴치 안고 한다.

 

자신의 몸을 비하하는 것은 그릇된 겸손이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몸에 대한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자기의 육신은 저급한 것이니 금욕을 통해 절제하고 통제하고, 괴롭히고 학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것을 효과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요, 그러한 것을 철저하게 실행하고 실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거짓된 가르침에 머물게 된다.

 

골로새서는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일침을 가하며, 이러한 사상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을 이미 성경에서 이렇게 2천년 전부터 경고했는데, 아직도 못알아듣고, 자기 비하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잘못된 금욕은 생득적인 기쁨을 제어하고 빼앗는다. 이러한 헛된 사상과 가르침에 물들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몸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인 것을 실감하고 절감하고 간절히 고백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해볼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과감하게 어겨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현대 그리스도인 중에 이것을 잘 지키는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인들은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거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늘 불안한 인생을 산다. 그러니, 현대 그리스도인은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지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웃긴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께서 몸의 주인이시다"를 선포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함께 하길 빈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초기 기독교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 The Epistle to Diognetus>를 보면 정말 멋진 말이 나온다.

 

"In a word, what the soul is in a body, this the Christians are in the world"(ED, 6:1).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정체성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 될지,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영혼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면, 이 세상은 영혼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지만,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당연히 이 세상은 영혼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 사람에 대하여 만족을 느끼고 칭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시간 낭비와 괴로운 일도 없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증언대로라면, 이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달린 것 아닌가. 이러한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인생을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질 뿐 아니라,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쭐하기까지 하다. 저자가 누구인지, 물론 편지에서 밝히는 저자는 "사도의 제자(a disciple of the Apostles)'이지만, 이렇게 멋진 말을 하는 그가 매우 궁금하다.


Posted by 장준식

만난다는 것의 의미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만남(모에드)의 장막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이와에드)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노아드티)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만남의 장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 29:42~43).

 

이것은 성막 제도 전체의 중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인데,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만나다(모에드)'라는 말이에요.

 

'만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죠. 우리는 그동안 누군가를 수도없이 만났는데, 진짜로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죠.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누군가와 수도 없이 만나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않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을 수도 없이 만나러 교회에 오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사랑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앎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니고,

내어줌이 없으면 만난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랑 없이,

앎 없이,

내어줌 없이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공허한 일만 되풀이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은 공허한 것이겠죠.

 

만나는 일(모에드)은 참 신비로운 일이에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만나는 일의 신비를 깨닫게 되겠죠.

 

"주님, 만남의 신비를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저를 만나주시고, 제가 주님을 만났듯이, 제 삶 속에서의 모든 만남 가운데서 사랑과 앎과 내어줌이 있게 하셔서, 생명의 공허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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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실패 - 아담신학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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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은 교회 목사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부르심/소명)

 

도시의 큰 교회를 가고 싶어하는 목회자는 많아도, 시골의 작은 교회를 섬기고 싶어하는 목회자는 별로 없다.

 

나는 작은 목회를 해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작은 교회'라고 부른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의 무게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작은 교회 목사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나보고 작은 교회 목사라고 말한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재정의 압박이 아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작은 교회에서 큰 목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나의 노력과 내 메시지의 무게를 몰라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겸손하게 나의 이야기를 해본다. 나는 3대째 목회자이다. 우리 집안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집안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명문대를 졸업했다. 유치원만 안 나왔지, 고등교육의 모든 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러한 나의 배경을 '분뇨'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과 내가 닮은 점이다.

 

나는 교회에서 학교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교단 목사들에게서 가장 꼴보기 싫은 점은 출신학교를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삼는 점이다. 목사가 됐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하나님께 부름 받았으면 그만이지, 자신이 교육 받은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레위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불렀다". 그래서 원래 레위기의 히브리 제목은 '와이크라'이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성막(하나님의 거처)을 완성했지만,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가 비로소 성막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모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이다.

 

'부르심', '소명'이 없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주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 '부르심, '소명'이 없으면 우리는 한 가지의 일도 주님을 위해 할 수 없다. 그렇게 부름 받은 자가 '목사' 아닌가. 그런데, 왜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리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기의 왕국을 세우고 있는 집단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요즘 시대에는 '감독'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소명을 입증하는 것이요, 도시의 큰 교회를 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소명을 입증하는 것이다. 카르텔을 이용하여 감독을 하고, 카르텔을 이용하여 도시의 큰 교회로 자리를 옮겨놓고, '하나님의 부르심' 운운하는 것만큼 역겨운 일도 없다.

 

나는 내 자리에서 '나나 잘하자' 다짐해 본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서 그것이 내 삶의 전부인양,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부르심이 없는 곳엔 절대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심이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 이것은 내가 의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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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김근주 교수가 쓴 책이다.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성경읽기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지를 서술한다.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바로 ''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적 영역에서의 변화'가 일어나야,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이 변하게 되어, 결국 삶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말이 있다. "If you want to change your way of life, acquiring the right image is far more important than diligently exercising willpower.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삶의 방식을 바꾸려면 의지력을 기르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마음과 태도와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 ''이 마음에 들어와야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읽기는 자기계발이 아니다. 저자는 이것을 계속하여 주장한다. 성경을 자기계발 하듯 읽으면, 분주한 세상에 발맞춘 성경읽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기계발 하듯 성경을 읽으면 말씀의 행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니, 그분과 교제 나눌 수도 없다. 발견하지도 못했고, 교제 나누지도 못했는데, 성경을 읽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현대인의 최대 적은 '분주함'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최고 수단은 쉬지 않고 분주하게 만들기라 할 수 있다"(25). 분주함 가운데 짬을 내서 성경을 읽으며 잠시나마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잠시나마 '영적인, '은혜로운' 분위를 맛보고 만다면, 그것은 성경을 격언집이나 좋은 말 모임집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아주 통렬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읽기를 수행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정신 없이 달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노력해야 지 겨우 버텨낼 수 있는 세상에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어떻게든 멈추어 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궁리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사탄을 대적하는 방법이다"(26).

 

'멈추어 서다'는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시편에 보면 '셀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충분히 멈추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그 말씀 안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분주함'은 이 시대에 사탄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기 위해 쓰는 가장 강력한 전략 무기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멈추어야 하건만, 우리는 반대로 최선을 다해 '분주함' 가운데 머물려 한다. 분주함 가운데 자기를 밀어 넣어 놓고, 거기서 자신을 꺼내면 가만히 안 둘 태세로, 그 분주함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분주함 가운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분주함에서 벗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한다고 도전한다. "이 분주한 시대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다"(26).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분주한가? 우리는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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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다른 질문을 먼저 던져보자. "우리는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 공부하는 이유를 물으면, '입시 시험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언어는 일차적으로 '소통'을 위한 것이지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배울 때, '소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시험'을 위해서 배운다.

 

이제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를 물어보자. 우리는 왜 성경을 읽는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대부분, '구원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위에서 언어의 존재 이유를 '시험'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존재 이유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것을 간과하면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시험'으로 오해되고 만다.

 

한국에서 영어가 '시험'을 위한 도구로 쓰이니, 한국에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지 영어로 '소통'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어는 시험이기 때문에, 소통 위주의 영어가 아닌 '시험' 위주의 영어를 배우다 보니, 영어가 어렵게 느껴진다. 실제로, 시험에서 다른 이들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일단 시험 문제가 어렵게 출제되어야 하고, 그 어려운 문제를 맞혀야 한다.

 

'구원'을 위해서 성경을 읽으면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경의 언어를 배워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지 않고, 성경의 지식을 통해서 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과제만 안을 뿐이다.

 

그렇다보니, 성경은 온통 현실을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면서 천국을 보려 한다. 구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 죽음 후에 있는 것으로 현실에서 밀려나기만 한다. 성경읽기가 구원에 대한 '시험'으로 전락할 때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언어'. 그리스도인은 언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한다. 사실, 소통하는 것 그 자체가 구원이다. 내 삶의 현실에서 성경의 언어, 언어 그 자체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면, 우리의 현실은 이미 구원에 이른 것이다.

 

성경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일반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옹알이에서 시작해,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성경 언어도 그렇게 배운다. 물론 옹알이만으로도 부모와 아이는 '소통'이 이루어지고 부모는 아이가 '생명'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이처럼 성경 언어의 옹알이 만으로도 하나님과의 소통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듯, 그리스도인은 장성하며 옹알이 수준에만 머물 수 없다. 성경 언어 능력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소통이 깊어지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가히 폭발적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이 그 '소통'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구원'이라는 '시험'의 관점에서 성경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소통'의 관점에서 읽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성경 언어의 능력이 깊어질수록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그 부요한 신비를 알게 될 것이고, 그 신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수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한 그 창조성의 발현,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osted by 장준식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초월'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구원과 초월을 섞어 말하자면, 구원은 초월하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대개 구원을 이렇게 '초월'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 있다. 몸이 아픈 것에 대한 초월,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무엇보다, 죄에 대한 초월을 구원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조금이라도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 수단으로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이 ''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데, 돈이 많으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초월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욕망 덩어리이기 때문에, 구원을 '초월'로 생각하는 데 쉽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 구원인 줄 알았는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구원을 초월로 이해하며, 결국 비참한 인생을 맛본다.

 

기독교의 구원을 '초월'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정말 오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이 '초월'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굳이 '성육신(incarnation)'할 필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종말론도 이 세상으로부터의 초월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완성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은 '성육신'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 또한 놓치면 안 된다. 성육신과 십자가는 '초월'을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의지이다.

 

악이 판을 치는 것 같으나, 결코 이 세상은 그 악에 의해서 멸망당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아름다움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깊이 이해한 사람은 초월적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에 대한 경외를 가지고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사랑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힘껏 끌어안는다. 초월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악과 진실하게 대면하며, 자기의 생명을 긍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가 진정 구원 받은 자이다.

Posted by 장준식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

 

20년 전, 미국과 한국을 강타한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입니다. 얇은 책이었는데, ‘스니프스커리라 불리는 두 마리의 생쥐와 라고 불리는 두 명의 꼬마 인간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치즈를 찾기 위해 복잡한 미로를 헤매 다니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치즈가 어느 날 사라지자, 그들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에 대해 두 마리 생쥐는 지체하지 않고 치즈를 찾아 나서지만, 두 명의 꼬마 인간은 치즈가 사라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여 외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이 책은 치즈가 사라져 버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과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는 의 대조되는 모습을 모여주면서,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개이나 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하는 세상에 발맞춰 변화를 꾀하려면 현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부정만 하면서 세상 탓만 하다가 실패한 인생, 또는 실패한 조직이 되기 십상입니다.

21세기의 기독교를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시대는 끝났다!” 미국의 유명한 두 신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H. Willimon)은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교회를 위한 무료입장권, 무임승차권은 사라져 버렸다라고 표현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교회의 시대가 끝나고,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교회가 죽음에 이를 지경에 처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 정체성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에 대한 정체성 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걱정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교회에는 과연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모델의 교회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기존 교회에 실망감을 피력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는 세대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용기와 헌신을 유도할 수 있는 창조적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가? 교회에 대한 분신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는 세대들을 향해 참된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통로가 만들어지고 있는가?”(이상훈, ReThinkChurch, 57).

그동안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나누고 성경공부를 하고 회의를 하면서 나눈 교회의 가치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를 세워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대를 따라가기 급급한 교회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는 교회가 되려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새롭게 깨닫고,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입니다.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종교 없이도 삶을 의미 있게 살수 있다고 외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외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라는 것을 구상해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 주도적 인생을 살기 원하며, ‘워라벨(Work+Life Balance)’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현대인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강합니다. 일만 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삶을 가꾸어 가며 인생의 의미와 공동체의 가치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그러한 현대인들의 바람과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회 공동체의 만들기 위해서 고안된 소그룹 모임입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성장(spiritual growing)을 위한 통합적 소그룹 모임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지닌 ‘good spirit’의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집니다. ‘Mission’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세상을 향하여 부여 받은 사명을 말합니다. 그 사명은 소그룹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며 의논해서 정한 ‘Project’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삶의 흥미와 신앙의 흥미를 가지게 되고, 우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삶과 신앙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자기주도적인 신앙을 형성하며, 자립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향상시키며, 실제의 삶과 밀착된 신앙생활을 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결국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교회 공동체는 요엘서에서 예언한 성령의 임재가 사도행전에서 성취된 것을 보는 것처럼, 성령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몸의 세포가 살아 숨쉬는 교회, 사람 냄새 나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자 합니다.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에 대한 개념을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313, 로마의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의 박해가 그치고, 그 이후 로마의 공식 종교로 기독교가 채택된 후 세월을 거듭하며 기독교는 이 세상의 왕좌의 자리를 누려왔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상황처럼 소수자와 거류자의 위치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기독교가 이 세상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지닌 그 엄청난 사회변혁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려면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선교적 상상력을 지닌 역동적인 성령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역사를 이루는 데, Mission Project Driven 속회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2018년도 한국에 출판된 책 중에 많이 읽힌 책 목록에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19년도에도 여전히 많이 읽힌 책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세속(secula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죠. 대개 세속적이라는 말은 속물적이라는 뜻으로 통하거나, ‘신을 믿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통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를 일컬어 세속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종교 없는 삶>에서 세속(secular)’라는 용어는 가치 중립적인 용어로서 무종교적인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책의 저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nn)은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에 위치한 피처 칼리지의 사회학과 교수입니다. 그 자신이 무종교인입니다. 그는 종교 없는 삶을 택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사회적 현상을 바라보면서 종교 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서,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덜어내려고 연구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종교 없는 삶>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연구를 통해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신뢰와 생각의 자유, 지적인 탐구, 아이들의 자율성 함양, 진리 추구, 황금률 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공감적 호혜를 도덕성의 바탕으로 삼기, 죽음의 불가피성 받아들이기, 내세가 아닌 지금의 세상을 기초로 하는 온건한 실용주의로의 삶을 항해하기, 그러면서 설명할 수도 헤아릴 수도 없이 심오한 존재의 한가운데서 때때로 깊은 초월감을 만끽하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24).

그는 이어서 무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활력과 의욕, 열정, 끈기를 갖고 지금 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또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것신이나 구원자보다 가족과 친구들을 더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타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또 갓난아기나 폭풍우, , 눈물, 조화와 내적인 것들, 대수학, 용서, 오징어, 아이러니 같은 삶의 설명할 수 없는 경이들에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인 보호테이프를 붙이지 않고 이것들 속에서 기쁨과 충족감을 발견하는 것…”(24-25).

저자가 연구를 통해 밝혀낸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 가치들을 보면 종교를 가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므로, 이 세상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 신앙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혀를 차거나 그들의 삶을 혐오하거나 불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구원 받은 의인으로 포지셔닝을 하며, 구원 받지 못한 그들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과 정죄의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혐오와 불신의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대림절(또는 대강절, Advent)을 맞았습니다. 기독교 교회력은 대림절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약속하신 구세주가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기독교의 신앙은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종교 없는 삶>에서 말하는 핵심 주장은 종교 없는 삶도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다!”입니다. 그러니 종교 없는 삶을 산다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함부로 혐오와 불신의 마음을 갖지 말라고 외칩니다. 이처럼 종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연구하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설마, <종교 없는 삶>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긍정하며 신앙을 떠나 종교 없는 삶의 반열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혹시, 아직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함께 그 의미를 발견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종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외치는 이 시대에, 우리도 부지런히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우리의 삶을 던져 보죠.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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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보아스 헌금

 

보아스 헌금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이름을 정해 놓고, 참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했고, 간구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이름이냐고요? 우리가 지난 임원회 때 결정한 교회 Loan Payoff 헌금에 대한 이름입니다.

 

참 의미 있는 이름입니다. 보아스의 마음으로 헌금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보아스!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요? 룻기서를 보면, 보아스는 어려움에 처한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기업 무를 자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해서 일 처리를 얼마나 똑부러지게 하는지, 보아스를 보고 있으면, 이렇게 반듯한 사람이 있나 싶습니다.

 

나오미는 가뭄이 든 유대 땅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끼니 걱정하지 않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이국 땅에서 여자의 몸으로 살아남기 힘든 환경과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며느리를 남겨두고 고국 땅으로 돌아오고자 했습니다. 두 며느리 중, 한 며느리는 제 갈 길을 갔고, 다른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땅에 함께 왔습니다. 그 며느리의 이름이 룻입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기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인생이 고달팠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오미를 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이었기 때문에 나오미의 고향에서 그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지켜주지 않으면 꼼짝 없이 굶어 죽을 처지에 놓인 신세였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느끼고 있지 못해서 그렇지, 공동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잘 품어주지 못하면, 한 사람의 인생은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잘 돌보아주면 공동체 전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방 여인 룻과 고단한 삶을 산 여인 나오미의 운명은 공동체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룻과 나오미는 드라마틱하게도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바로 보아스 덕분입니다. 보아스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다는 뜻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다고 해서 모두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기업 무를 자의 법을 지키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실제로, 룻과 나오미에 대하여 기업 무를 자의 법을 지켜야 하는 촌수가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 법 지키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룻과 나오미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교회의 부채(loan)를 갚기(payoff)하기 위하여 드리는 보아스 헌금룻과 나오미 같은 교회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우는 기업 무를 자같은 헌금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아스와 같은 따스한 마음으로, 보아스와 같은 믿음의 마음으로 뜻과 정성을 다해서 헌금하면, 거기에 하나님이의 무한하신 은혜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보아스가 지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거기에서 맺힌 열매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믿음으로 지켜낸 룻을 통해서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우리가 드리는 보아스 헌금을 통해서도 그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리라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이 작은 보아스 헌금을 받으시고, 보아스에게 내리신 하늘의 축복을 우리에게도 부어주소서. 보아스의 헌신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남기기 위해 버리기

 

곤도 마리에(Kondo Marie)를 아세요? 넷플릭스에서 그녀를 앞세운 프로그램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Tidying Up With Marie Kondo>를 통해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된 일본 여성이에요. 평범했던 그녀의 삶은 바꾼 것은 정리의 기술입니다. 2014년도 세상에 내놓은 그녀의 정리 노하우를 담은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 베스트 셀러가 되자, 미국까지 진출하여 넷플릭스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그녀의 정리법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는 풍요에 지친 미국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난만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게 아닙니다. 풍요도 우리를 지키게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풍요에 지쳐 있는지. 너무 풍요로워서 우리는 지쳐 있습니다. 무기력증에 걸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죠. 그 풍요의 무기력증을 일깨워준 인물이 곤도 마리에입니다.

 

그녀가 가르쳐 주는 정리법의 핵심은 버리기 기술입니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 보면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의 더미가 생깁니다. 그 물건들 하나하나에 손을 대서, 그 물건이 나의 마음을 설레게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의 정리법의 핵심입니다.

 

그녀의 정리법이 얼마나 강력하게 미국인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는지, 그녀의 이름 ‘kondo’는 영어 신조어가 되어 정리하다의 뜻으로 쓰일 정도입니다. ‘Konvert’라는 신조어도 생겼는데, 이는 곤마리 정신으로 개종한 사람을 뜻합니다. 거의 종교 수준이죠.

 

실제로, 그녀의 정리법에 따라 집을 정리한 사람들은 단순히 좋았다의 감정을 넘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정리법은 단순한 테크닉이 아니라 마음가짐이고, 인생철학이며, 영적인 행위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단지 집에 있는, 어지럽혀 있는 물건들을 정리만 했을 뿐인데, 삶이 변한다는 것이 말이죠.

 

그녀의 정리법의 핵심인 버리기 기술설레지 않는 과거를 떠나 보내고, ‘설레는 기억은 남기면서 새로운 삶을 맞이하는, 일종의 의식(ritual)입니다. 사실 이러한 의식(ritual)은 종교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이지요. 그런데, 그 종교의 역할을 한 여성이 넷플릭스라는 대중매체를 등에 업고 대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죠.

 

곤도 마리에는 종교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그녀가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자신의 정리법을 통해서 종교의 핵심을 무의식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녀의 정리법이 말하는 것처럼, ‘남기기 위해 버리기기술(art)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풍요에 물들어,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앙을 사용하는 데만 그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얘기했듯이, 가난만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게 아니라, 풍요도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지친다는 뜻은 가난이나 풍요 때문에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가난도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하지만, 풍요도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 영성에 케노시스(kenosis)’라는 게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6-8).

 

케노시스란 자기를 비워내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내고 버리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해서 인데, 그 비워낸 자리에 오롯이 남는 것은 하나님과 나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인 것이죠.

 

저는 곤도 마리에의 책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님에도 누구보다 기독교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냥 입으로 예수를 라 시인하면 기독교인일까요?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경계하셨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버려야 하는 것과 남겨야 하는 것을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단, 모든 것(외적인 것, 내적인 것)을 꺼내 놓고, 그 앞에 무릎 끓고 앉아 심호흡을 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 뒤, 그것에 손을 올려 놓아 보세요. 그리고, 마음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면 버리고, 마음을 설레게 한다면 남기세요. 그리고, 그 설레는 것들 위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 보세요.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삶이 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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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인가?

 

도덕과 윤리가 종교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들을 종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를 도덕과 윤리에 가두어 놓는 결과를 범하게 될 수 있다.

 

도덕과 윤리는 절대적이 아니고 가변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덕과 윤리는 달라진다. 가변적인 것에 종교를 가두어 놓으면, 종교는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과 윤리라기 보다는 '생명'이다. 생명이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는 게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생명에 봉사해야 한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를 핵심 과제로 삼을 때, 종교는 생명을 도덕과 윤리에 봉사하도록 희생시킬 수 있다. 종교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생명(인간)을 인간 취급 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해서,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할 것인가?

 

기독교,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믿음의인'에서의 믿음은 '사람의 도덕성과 윤리성을 담고 있는 성품의 변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믿음을 도덕성과 윤리성, 그리고 성품의 변화와 연결시키면 믿음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도덕성과 윤리성에 옭아매 놓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믿음의 문제를 도덕성과 윤리성에 결부시키면, 그것은 어거스틴에게 정죄당했던 도나투스주의로의 회귀 일 뿐이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성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결국 믿음을 통한 인간의 알량한 도덕적/윤리적 구원만 남는다.

 

종교의 핵심을 도덕성과 윤리성으로 규정하는 일은 구원을 개인에게 책임지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논리이다. 모든 결과를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주체(다른 말로, 능력이 없으면, 그것이 실력이든 도덕이든)가 발붙일 공간이 없다.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종교의 핵심은 생명이어야 한다. 도덕성과 윤리성이 생명에 봉사하게 해야지, 생명이 도덕성과 윤리성에 봉사하게 하면 안 된다. 도덕성과 윤리성을 통해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믿음'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충분하다.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것, 성품의 변화가 없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어서 그렇지, 믿음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강화하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쪽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다.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는 기도도 좋지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도이다.

 

* 이 글은 박충구 교수님이 쓰신 '몇 가지 생각'(10 27일 페이스북에 쓰신 글)에 대한 일종의 반론입니다. 마침, 제가 고민하던 주제에 관한 글을 올리셔서 반론을 펴 봅니다. 제가 고민하던 주제는 '종교의 핵심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아니다'인데, 박충구 교수님의 글은 제 생각과 반대의 주장을 펴시는 것 같아,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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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

 

요즘 한국 신문을 보면 외래어 표기법이 달라진 것을 본다. 가령, 할로윈을 '핼러윈'이라고 쓴다던가, 산호세를 '새너제이'라고 쓰는 경우를 본다.

 

원어의 발음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으로 보이나 매우 어색하다. 원어를 그대로 표기할 것 아니라면, 굳이 원어의 '발음'을 따라서 표기할 필요가 있나 싶다.

 

외래어는 우리 나라 말에 없는 단어를 그 나라 말에서 가져다 쓰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버스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버스를 가져다 쓴다. 택시도 마찬가지다.

 

외래어를 가져다 쓸 때, 단순히 외래어를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지칭하는 것을 잘 표현해 주는 한국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외래어도 한국어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이다.

 

'산호세'라는 외래어는 단순히 영어의 발음을 옮겨 적은 것을 넘어 '산호세'가 지칭하고 있는 도시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렇다고 산호세가 영어 발음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영어 발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요즘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을 보면, 산호세가 아니라 '새너제이'라고 함으로써 외래어 발음을 최대한 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외래어 발음을 살리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럴거면 그냥 외래어를 적지 왜 한글로 옮겨 적는가. 산호세라는 외래어는 산호세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떠올려 주는 동시에 외래어의 한글화가 된 것 같지만, 새너제이는 왠지 그냥 외래어 발음을 적어놓은 것 같다.

 

외래어인 '오렌지' Orange의 발음 표기를 넘어서, 그것이 지칭하고 있는 과일을 떠오르게 만들어 준다. 굳이 Orange의 영어 발음을 최대한 구현하겠다고 '오륀지'라고 표기하면, 왠지 어색하다. 한국어 느낌이 안 나고 그냥 번역투 느낌이 날 뿐이다.

 

Halloween '핼러윈'이라고 표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어 발음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핼러윈'이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영어 발음을 완벽하게 한국어로 표기할 수 없다. 'San Jose'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새너제이'라고 표기한다고 영어 발음을 완벽히 구현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San Jose '새너제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래어를 한국어로 표기할 때는 우리 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언어적 특성을 살려 외래어를 한국어화시켜서 창조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핼러윈'보다는 '할로윈'이 더 좋은 한국어 표기라 생각하고, '새너제이'보다는 '산호세'가 더 좋은 한국어 표기라 생각한다.

 

언론사들이 외래어에 대한 한국어 표기를 조금 더 창조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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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Halloween is just around the corner

[할로윈]

 

할로윈 때가 되면 참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다. 할로윈을 지키면 안 된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인터넷을 떠돈다. 마치 그들은 할로윈 때 나타나는 '유령/귀신'들 같다.

 

할로윈을 제대로 알자며,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매우 조악하다. 켈트족의 문화를 운운하며, 할로윈이 마치 '인신제사'를 조장하는 양, 그래서 할로윈을 지키면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 양, 할로윈을 지키지 않는 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야 하는 양 떠든다.

 

나는 실로 궁금하다. 그렇게 조악한 논리로 할로윈을 통해 자신들의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유령'같은 무리들이 누구인지를!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지키면 안 되는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예수님이 언제 부활하셨는지, 알려진 바 없다. 성경은 그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를 '신앙고백적'으로 전할 뿐이다.

 

성탄절과 부활절은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신학화 작업을 통해, 그리고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있는 곳(로마/유럽)의 문화를 통해 제정되었을 뿐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성육신의 복음이지, 탈육신의 복음이 아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 시대와 그 지역의 문화에 성육신 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떠도는 유령이 되지 않게 하려면, 기독교의 메시지는 부단히 그 시대와 그 지역의 '일상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일상의 언어가 바로 문화이다.

 

할로윈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Saint Evening이라는 뜻을 이미 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켈트족에게 전파되었을 때, 농사의 풍성한 결실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그들의 전통에 복음의 메시지가 담겼다. 그래서 농사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유령들(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받아들였다.

 

만성절(All Saints Day)은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를 통해 탄생했다. 켈트족의 할로윈 문화가 없었다면 물론 다른 문화를 통해서 만성절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만성절은 켈트족의 문화를 통해 탄생되었다.

 

신화의 세계 속에 살았던 고대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고 그 풍성한 수확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아이를 임신한 뒤 순산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담긴 풍습이 할로윈이다.

 

21세기에 할로윈이 귀신을 물리치는 주술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할로윈은 그저 자본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할로윈 때 팔려나가는 할로윈 물품은 1조원이 넘는다. 실로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온갖 탐욕에 물들어 맘몬의 유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작금의 기독교가 할로윈을 '귀신의 축제'라며 거부하는 것은 실로 코미디 같은 현상이다. 할로윈의 이교도 풍습에 자신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지 않겠다는 것일 뿐, 탐욕에 물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탐욕을 얼마나 채우려 기도하는가.

 

보수 개신교인들은 할로윈을 더욱더 폄하하기 바쁘다. 시장의 자유를 그토록 수호하기 위하여 사회의 보수세력과 야합을 일삼는 보수 개신교 세력이 할로윈을 거부하는 것은 정신분열적 행동일 뿐이다.

 

10 31일은 개신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다. 만성절 전야제이기도 하지만, 종교개혁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까지 했다.

 

할로윈은 기독교인들이 지키면 큰 일 나는 마귀의 행사가 아니라, 기독교의 메시지를 '일상의 언어(문화)'로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기회를 놓치고, 할로윈 문화를 배척만 한다면, 할로윈 문화를 즐기는 일반 대중은 자신들의 일상의 언어로 복음을 들을 기회를 또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할로윈이 기독교 전통에서 기독교의 성인(Saint)을 기리는 날인 것을 안다면, 할로윈에 세상 사람들은 귀신 분장을 하여 '하하호호'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성인들) 복장을 하여 그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삼는 게 더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할로윈(만성절) 11 1일인 이유는 히브리서 11 1~40절에 근거해서 만성절을 제정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기에는 '믿음으로 살다간' 기독교의 수많은 '성인들'이 등장한다.

 

할로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서구 문명의 영향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은 할로윈의 파도를 피할 수 없다. 파도는 피해서 피해지는 게 아니라 타고 넘어야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기독교인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은어를 사용하는가. 할로윈이 복음을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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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