낀낀세대가 온다

 

김호기 교수의 '40대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그는 현재의 40대를 '낀낀세대'라 명명한다.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여, 앞과 뒤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1990년대 이 '낀낀세대' X세대 또는 신세대로 불렸다. 그때의 논쟁을 아직도 기억한다. 바로 나 자신이 X세대였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압구정동과 강남역을 누비며, 부여된 신세대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듯이, 1997, 대학 졸업을 앞 둔 시기에 외환위기(IMF)를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X세대, 신세대의 특징으로 "개인주의, 탈권위주의, 감성주의, 소비주의"를 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이다. 그러나 이 개인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시장적 개인주의'로 발전했다고, 김호기 교수는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의 가치 아래, X세대는 자신의 시장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장적 개인주의의 길을 어렵게 걸어왔다.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는 40대의 어려움이 눈에 간다. 낀낀세대이기에 아직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화 세대인 86세대에 눌려 있고, 2030세대에 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이제 두각을 드러내야 할 40대에 처한 X세대 중 지도자급 인사로 발돋움 한 친구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의 분석 중 더 눈이 가는 것은 평균수명의 증가로 사회활동 연령의 연장을 고려할 때, 낀낀세대(40)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현재 40대인 '낀낀세대' '대기만성형 세대'라고 부르고 싶다. 또는 '윤동주세대'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 비해 성장이나 활동이 더디었는데, 그러한 사실로 인해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대기만성형 인간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보면 이 상황이 잘 나와 있다.)

 

김호기 교수는 말한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엄세대와 통한다. 끼어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40, '낀낀세대'에 주어진 사명은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교량적, 포용적,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있다. 이것은 실로 나의 목회현장에서도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낀낀세대라 연령이 높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과거의 경험'과 젊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재의 경험'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낀낀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을 감지하고, 낀낀세대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세대통합을 이루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비록 지금은 다른 세대에 묻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묵묵하게 실력을 기르고 자리를 굳건히 지키다 보면, 시대를 이끄는 주역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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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유의 중요성

 

김승섭은 그의 저서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권력을 통해 어떤 지식이 생산되는지에 대하여 보건지식의 역사를 추적하며, 특별히 여성에 대한 보건지식이 보건역사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30).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Comparative Theology' 수업 시간에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대결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결국 승리한 역사를 거론하며, 그때 생성된 '삼위일체 지식'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생성된 '삼위일체 교리'는 치열한 권력 싸움의 바탕 위에서 아리우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써내려간 페이퍼는 교수님(David S. Pacini)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건지식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식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의 신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학지식도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거(그당시)의 편견(한계)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 스며든 그 시대의 편견과 권력 관계를 파헤쳐 그 지식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금의 시대에 정의롭게 재생산(재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진 신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중요한 과제일 뿐 아니라, 사명이다.

 

과거의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재생산해 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생명)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그것만큼 게으르고 무모하고 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비판적 사유를 하는 작업은 우리가 거기에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된 작업이다.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늘 필요하다. 아니, 지식생산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생산을 해내는 일에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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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전복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그의 저서 <인류세 Defiant Earth>에서 다음과 같은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세계의 구조에 생겨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균열(rupture)에 직면해 우리는 기존의 모든 신념을 의심해야 한다"(p.70).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근대에 형성된 사유들은 홀로세(Holocene)의 안정된 지구 환경 위에서 세워진, 하지만 인류세에 들어선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상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과학을 근거로 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지구의 역사는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로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류의 엄청난 힘 때문이다. 지구의 진화에 인간의 '의지적인 힘'이 개입함으로써 지구의 행로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균열(ruptur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균열로 인해 인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책에서 대결을 벌이는 사상은 에코모더니즘이다. 에코모더니즘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상인데, 그들은 '좋은 인류세'를 주창하며 인간의 능력과 미래를 밝게 전망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러한 낙관주의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구는 더 이상 근대의 인간들이 믿었던 것처럼 인간의 착취 아래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연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p.84). 인류세에 들어선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착취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자연 재해를 동반하며 인간의 의지적 힘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오해하게 한다. 인류세를 잘못 해석하면, 드디어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세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뜻은 오히려 "생태계 교란을 뛰어 넘어 지구 시스템의 균열을 인식하는 질적 도약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다.

 

그는 이제 '생태계'라는 말로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없고, '지구 시스템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적 사고를 통해서만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성장 주도의 기술 산업 시스템의 초기 잘못은 보통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라기보다는 가공할 인간중심주의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p.78).

 

그는 그의 주장에 따라, 신인간중심주의를 주창한다. 신인간중심주의란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갖게 된 것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세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을 말한다. "신인간중심적인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 (p.91).

 

근대의 사상은 인간을 주체로 파악할 뿐 아니라,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로 생각하며 주체인 인간은 객체인 자연을 자신의 요구와 의지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세에 들어선 지금 인간은 더 이상 근대적 주체의 자유와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이 더 이상 인간의 자유와 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시대는 끝났다. 인간의 운명은 단순히 인간의 손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 즉 가이아의 힘에도 달려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평화의 시기, 또는 '인간화된 지구'의 시기는 끝났다.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 강해졌다. 이 둘을 합쳐 생각하면 지구상에는 더 강력해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과 지구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 줄다리기에서 인간은 지구를 우리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당기려 애쓰고 있다. 지구는 우리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잡아당기고자 한다"(p.82).

 

인류세라는 균열(rupture)은 기존의 사고 방식으로 존재(생명)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 사고의 전복 없이 인류는 그 균열이 만들어낸 새로운 국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할 것이고, 해결책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신학은 인간의 편에 서야할 것인가, 자연의 편에 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인간과 자연의 중간에 서서 두 거대한 힘이 균형을 이루어 공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신인간중심주의'의 옷을 입고, 소유한 힘을 훨씬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인류세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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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를레프니스

 

독일어 에를레프니스(Erlebnis)’는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을 뜻한다. 이는 우주비행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overview effect’의 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 나가서 지구와 우주를 보고 귀환해서 이전에 가졌던 시점과 같은 시점을 지니며 더 이상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은 그 사건을 경험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인류세(원제: Defiant Earth)>의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책의 서론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지금이 바로 모든 인류에게 에를레프니스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과학자들은 줄기차게 지구 시스템 붕괴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중심적이지 지구환경 중심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는 현재 지구 환경 시스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못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구과학자들이 데이터에 근거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해도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한다. 그는 말한다. “지구 시스템의 위기를 말할 때 가장 흔하면서 분명한 반응은 무감각한 태도다”(인류세, 8).

 

보통 사람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자기 자신(또는 자기 가족) 외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다. 특별히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는 너무도 무감각하다. 그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지구 환경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어도,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비극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인류세, 9).

 

책의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가 반드시 새겨들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왜 지구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시간을 살면서, 그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드는 것일까? 그는 말한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이성의 쇠퇴나 심리적 나약함때문일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좀 길지만,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그대로 가져온다.

 

“…… 세상을 더 문명화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라는 힘들, 이를테면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은 사실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신뢰했던 힘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힘들이 이제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말하자면 계몽주의를 저버림으로써 긴장 상태를 해소하려 한다. 다른 일각에서는 지구에 대한 고뇌가 낭만적 환상이나 미신적 퇴행이라도 된다는 듯,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주장을 인류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태도라며 폄하한다.”(인류세 11).

 

너무나도 놀랍게, 2800년 전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는 당대의 남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앗수르의 위협과 병들어 죽게 된 위기와 시련의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극복한다. 그런데, 그는 앗수르의 위협이 감소되고 병도 치유된 평안의 시기에 안타깝게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딘이 병환의 회복을 축하해 주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정치적) 방문을 받고 바벨론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는다. (이사야 39) 그러나 그는 그가 덥석 잡은 바벨론의 우호의 손길이 나중에 자기 백성과 자기 후손들을 압제하고 약탈하는 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될 거라고 알려주는 것은 이사야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을 메시아처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이 인간을 어떠한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번성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은 인간은 지금 바로 그것이 세계를, 특별히 지구 환경 시스템을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으로 인해 수많은 가난한 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지구 온난화로 삶의 터전이 망가져 가고 있음에도 지구 환경 시스템을 복구 시키기 위한 어떠한 발걸음에도 동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저자가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에겐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다. 그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또 한 번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아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이들과 지구 환경 시스템의 붕괴를 자각하기에 충분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돌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의 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지켜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부르심 대로 우리가 살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이며,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인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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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있는 펠라기우스적 신앙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숙적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반면, 그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강조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주장이 승리했고 우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은 '은총론'이 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서 온 부작용도 존재한다. 교회에서 은총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소홀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론을 강조한 이유는 '자유와 책임'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통해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펠라기우스의 신학에 큰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외에도 도나티우스와도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도나티우스(도나티즘, Donatism)는 부도덕한 사제의 성례집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제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이후에 그 사제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이 받은 세례는 무효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성례전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사상이었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나 '날라리' 신앙인이 아니라, 모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들의 경건이 지나쳐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신앙 경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엘리티시즘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했고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들에게 신앙 생활의 중심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이고, 타락한 존재이고, 오직 구원이 필요한 가련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 싶었던 은총론은 인간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만 보게 만드는 것일까?

 

요즘 교회는 은총론의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만 하는 시절이 되었다. 그렇다고 은총론을 폐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은총론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더 깊으신 하나님의 은총 없이, 우리가 어떻게 모든 죄를 뒤로 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요즘 점점 펠라기우스의 기운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기운을 자칭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서는 펠라기우스의 기운과 더불어 언제나 '영지주의'의 기운이 엿보인다. 지식인들은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보다 지식 수준이 떨어지는 '성직자'의 설교나 성례전 집전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와 논쟁을 벌여 그들의 신학을 물리친 이유는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교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을 불어오기 쉽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즉 영지의 경험은 구원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지식은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보니,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존재(사제)의 설교나 성례전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불신앙의 상태를 불러오는 것이다.

 

우리는 줄곧 하나님의 은총을 탈육신화시키는 우를 범한다. 우리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가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전하는 것을 속마음으로 '무효'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러한 내적이고 은밀한 교만이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끊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의에 의해, 자신은 저들과 다른 존재이고 구원 받은 존재라는 내적이고 은밀한 구원이 선포된다.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교만의 작용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지주의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소위 '자력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은총을 말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이 보기에 지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리끼고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은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모자라지만 은총에 의해 성직을 수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모자람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우습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너무도 명확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자신이 지금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지'에 의해 도취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고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의 신학 사상에 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교회에서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함으로 인해 '은총'이 오용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 안의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선한, 그리고 신비로운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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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

 

라인홀드 니버는 종말에 관한 두 비유에 대하여 말하면서,

최후의 심판 비유가 펠라기우스적이라면

포도원 일꾼의 품삯 비유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평한다.

ㅡ 김재성 <예수의 비유에 나타난 개성화의 동기> 중에서

 

어떤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가 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왠지 별다를 것 같지 않아요!" (김동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인생이란 그렇다. 우는 것과 웃는 것은 구별되는 행동 같지만, 인생이라는 큰 차원에서 보면, 우는 것이나 웃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울어도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나고, 웃어도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함이나 악함은 별반 다르지 않다. 좀 더 도덕적으로 사나, 아니면 좀 더 악하게 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기를 쓰고 다른 이와 같지 아니하려고 선하게 살거나 도덕적으로 살려 들지만, 또는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어떠한 것을 성취하려고 애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신앙의 전통에 서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율법과 대비시키며, 또는 행위와 대비시키며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믿음을 증명하는 신앙생활을 강요, 또는 강조한다. 결국 믿음은 행위로 전락된다.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은 은총론의 표현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쌓는 자기 성취나, 자기 의, 또는 도덕 등은 우리가 불의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부족함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생산해 낸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싸 놓은 똥을 치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실존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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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성의 원리(Subsidiarity)

 

Pius XI's encyclical Quadragesimo Anno: the developing concept of "subsidiarity", which held that social problems should be solved when possible by people organizing themselves at the local level.

 

Subsidiarity(보충성의 원리),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중요한 원리이다.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다.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분야와 그것을 유지한 힘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한 힘, 또는 어떠한 한 원리로 다원주의 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들 때, 그것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망상에 불과하다.

 

에밀 부르너는 'orders of creation'로 국가와 교회와 가정과 노동과 문화를 제시했고, 본 회퍼는 'divine mandates'로 일과 결혼과 정부와 교회를 제시했다.

 

사회의 질서는 이들끼리의 연합에 달려 있고, 그 어느 한 분야가 다른 한 분야에 대하여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 한 분야와 다른 분야가 어떠한 문제를 놓고 충돌할 수도 있다.

 

일례로, 본 회퍼가 나치 정부에 대하여 저돌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가 정부의 견해와 충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치 정부가 우위를 차지하여 질서를 구현하려고 들 때, 또다른 질서의 힘을 가진 교회가 저항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다른 분야보다 사회 질서를 제시하는 데 있어 힘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다른 분야의 활동을 도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활동을 얕보게 되고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보수세력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오류인데, 그들은 여전히 다원주의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가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치와 위상을 '중세시대'로 환원하려고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지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직무유기다. 그것은 권력에의 욕망일 뿐이다.

 

교회는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사회의 한 세력이 아니라, 사회 발전을 면밀히 살펴 그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더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 그리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의 다른 세력과 발을 맞추어 걸으며 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제시하고 그들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보여주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사회적 세력은 사회의 짐이 될 뿐,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그러한 안타까움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변화와 발맞추어 가는 교회, 한 가지의 원리로 질서와 평화를 세워 나갈 수 없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가져야 하는 선교적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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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책에서 한국인은 왜 행복하지 못하는가?’라는 글을 읽었다. 각 민족마다, 각 나라마다 행복의 기준이나 척도가 다르겠지만, 한국인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외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지나친 물질주의적 사고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2010년 한 조사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이다.” 이 질문에 라고 응답한 한국 사람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 그리고 어느 때 가장 행복할 것 같나라는 질문에 복권 당첨되었을 때라는 응답을 내놓은 대학생들이 부지기수이다. , 한국인은 부자=행복이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에 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지난 30년간 행복 연구로 누적된 자료를 보면, 인생의 여러 조건 즉, ,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은 행복의 개인차를 10-15퍼센트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인은 행복의 10퍼센트와 관련된 조건을 얻으려고 인생 90퍼센트의 시간과 에너지를 쓴다.

 

더 큰 문제는 에 대한 욕심은 자기 충만감이라는 우쭐한 기분을 들게 하여,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신뢰도 수준을 낮춘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나 혼자 살 수 있어!”라는 마음을 준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자기 충만감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넣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의존도를 낮추어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이게 왜 문제냐면, 인간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은 타인에 대한 애정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 다른 말로 해서 안정된 가정생활마음 편히 속마음을 애기하는 가까운 친구가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 대한 욕심에 사로 잡혀 있고, 돈이 있다는 자기 충만감은 그러한 애정의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한국인, 그리고 부자가 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인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 같다.

 

행복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을 때 온다. UCLA의 알렌 파르두치 교수의 범위 빈도 이론(range-frequency theory)에 의하면,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천만불(100억상당) 짜리 복권에 당첨된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은 그 이후 어지간한 일에는 별 감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인생이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하려면,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일과를 마치고 나만의 시간에 TV 시청하는 것, 럭셔리한 쇼핑센터가 아닌 TJ Maxx같은 곳에서 쇼핑하는 것, 바쁜 와중에서도 틈을 내서 친구들과 식사시간을 갖는 것, 주말에 동료들과 어울려 운동을 즐기는 것 등, 어떻게 보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 같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 소소한 일상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배 시간에 많은 이들이 못 나와도 마음에 불평이 없다. 개척의 극단적인 경험때문이다. 오래 전(2006710), 조지아에 교회를 개척할 때 교회의 창립일을 710일로 정한 이유는 그 날이 컬럼버스 조지아에서 첫 예배를 드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첫 예배라는 게 정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집사람하고 나하고 단 둘이서이곳이 예배 처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어느 교회의 주차장에서 (그 교회의 예배당이 아니다. 주차장 한 구석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예배를 드린 날이었다.

 

100명 나오는 교회, 또는 1000명 나오는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면, 예배 시간에 많은 이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불평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사람과 단 둘이서 주차장 구석에서 개척을 시작한 극단적인 경험덕분에, 예배에 우리 가족 외에 단 한 사람만이 함께 있어도 행복과 감사가 넘친다.

 

행복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아주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동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또는 존재의 겸손함을 지니는 것! 우리는 우리가 숨 쉬고 사는 것 자체 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의 겸손을 지닌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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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길로 다니게 된다는 것의 현대적 의미

(이사야 35)

 

성경은 그 시대의 문제(problems)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약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약자의 생명을 구하고 보호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가령 이사야서를 보면, 이사야 시대의 문제는 지정학적 국제정치였다. 앗시리아와 바벨론, 그리고 애굽 사이에 낀 약소국 이스라엘이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한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관점에서만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애굽에 붙었다 앗시리아(앗수르)에 붙었다 하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었다.

 

물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했고, 그 재물은 당연히 국민들로부터 걷은 세금(?)으로 충당했다. 결국, 국제정치의 문제 속에서 피부로 와 닿게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국민들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관리들의 탐욕과 무능을 책망했으며,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주문했다.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사야 35장을 근거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면,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 왕권이 드러난 새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러한 시대를 맹인이 눈을 뜨고,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을 통해서, 저는 자가 뛰고, 말 못하는 자가 유창하게 노래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 묘사한다.

 

다른 말로 정리하자면, 여호와의 왕권이 도래하는 시대는 사람들의 감각적 기능과 행동적 기능이 회복이 되어, 어려운 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깨닫게 될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행동할 줄 아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탐욕에 눌려 생명을 멸망시킨다. 탐욕에 눌려 있는 자는 영혼이 황폐되어 있는 것이고, 영혼의 황폐는 바깥으로 드러나 약자와 자연을 착취하며 거기에 폭력을 저질러 이웃과 자연을 황폐하게 만든다.

 

반대로, 황폐한 사람의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이웃과 자연의 황폐함도 풍요로워진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일,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고 그 나라가 임하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과 이웃, 그리고 모든 생명이 깃들어 사는 자연을 살리는 거룩한 일이다.

 

이사야는 그렇게 될때, 우리가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된다고 선포한다.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되는 것의 현대적 의미는 결국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우리의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지자의 경고대로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이웃과 자연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무뢰한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여호와께로 돌아온다면, 성령께서는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 기능과 행동 기능을 회복시키셔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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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없는 종교성

 

바울과 바나바의 루스드라 전도 이야기(14)를 보면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치유한다. 이런 기적을 목격하자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

 

루스드라의 주민들이 바울 일행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여 제사를 드리고자 한 이유는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신화 때문이었다.

 

옛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루스드라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천 개의 집을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오직 늙고 가난한 필레몬과 바키우스만이 신들을 맞아 대접했다. 신들이 사람들에게 벌을 내릴 때, 모든 집은 수장되고 말았지만 필레몬과 바키우스의 오두막은 살아남았고, 이후 신전으로 쓰였다.

 

요즘의 과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신화적 세계관에 살았던 바울 당시의 루스드라의 주민들은 다시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방문한다면, 이전에는 소홀히 했으나 이번에는 영예롭게 대접하리라는 결기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결기에 의해 바울 일행을 자신들의 고장에 다시 찾아온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생각하여 제사 드리려고 했다는 행위 자체가 꽤나 거룩하게 여겨진다. ‘오랫동안 기다리던메시아가 임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로마제국과 협력한 유대인들에 비하면 말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제사 드리려는 무리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옷을 찢었다. 옷을 찢는 행위는 극도의 불쾌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 방식은 매우 독특한데, 바울 일행은 그들에게 예수 믿으시오!’라는 복음의 선포 없이, 그저 옷을 찢으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서 계시 없는 종교성의 위험성을 알리고, 루스드라 주민들의 행동 양식과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이끌었다.

 

기독교는 계시(revelation)의 종교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우리 편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며, 진리로 나아간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어둠과 무지에 휩싸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라고 믿는 종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빛과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과 무지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학문, 과학, 종교)은 자칫 잘못하면 계시 없는 종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떠한 것이 종교성을 갖게 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빛과 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죄 가운데 빠뜨려 죽게 만드는 악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 없는 종교성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당한 행동 가운데 하나이다. 불쾌감은 폭력이 아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드러내 주는 의로운 행동이다. 불쾌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불의한 일과 신성모독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끔 공간을 열어준다.

 

우리는 그저 자기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 뿐, 계시 없는 종교성에 대하여 불쾌감을 드러내며 살지 못한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불쾌감을 표현하지 못한다. 물론, 무엇이, 어떠한 일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것인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로 불쾌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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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인류는 세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전쟁, 기근, 죽음이 그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요, 기근과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분투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이 세 가지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처럼, 굶어 죽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나.

 

성경조차도 전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야기도 전쟁을 빼놓고는 이야기 진행이 안 될 정도다. 출애굽 이야기도 전쟁 이야기이고, 구약 이야기의 백미는 가나안 정복 전쟁 이야기다. 구약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divine warrior)로 묘사하고 있고,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구약성경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독교이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믿음을 지는 게 당연해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왜 이렇게 호전적일까?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나라-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기독교인들은 왜 평화를 사랑하지 못하고 전쟁을 일삼을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전쟁은 대개 종교전쟁이었다.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은 초기 때부터 있어왔던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매우 마이너리티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때부터 기독교는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기독교의 역사는 (종교) 전쟁의 역사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전쟁은 대략 세 개다. 첫째는 중세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이다. 이때 기독교 국가들은 이슬람 국가들과 예루살렘을 놓아두고 극심한 전쟁을 벌였다. 둘째는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30년 전쟁(1618 - 1648)이다. 이 전쟁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간에 발생한 전쟁있었다. 셋째,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독일의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 학살도 일종의 종교 전쟁이다. 유대인 또는 유대교에 대한 탄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은 대개 패권 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종교 전쟁의 원인도 별단 다르지 않다. 한 종교의 대 사회적 패권 또는 기득권 싸움이 종교 전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그리고 패권 또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한 사회에서 패권을 자치하고 있던 권력 또는 종교가 힘을 잃어버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병철이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밝히고 있듯이, “물리적 폭력의 사용은 권력의 적용이 아니라, 권력이 파산했다는 표현이다”(29). 권력이란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이 그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인데, 권력이 파산하면 타자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가 되지 않기 때문에, 타자에게 폭력을 써서라고 타자를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권력이 파산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한병철은 권력을 의미와 관련해서 설명하는데, 그는 말하기를 권력은 의미 있음의 빛 속에서 등장할 때에야 비로소 안정성을 얻는다고 한다.(52).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기독교가 그 사회에서 의미를 상실했을 때 전쟁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발생한 불상훼손사건(20161월 경북 김천 개운사)’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한 기독교인의 일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종교라면 굳이 그러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상을 훼손해서라도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 기독교()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의미 없는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지, 민낯을 보여준 부끄러운 일이다.

 

평화는 어떻게 오는가? 종교 간 평화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가톨릭 신부 출신의 학자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간에 적극적인 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각자의 종교가 각자 지니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내어 보일 때, 평화는 선물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의미를 잃으면 체제나 삶은 초조해진다. 불안해진다. 그 초조와 불안은 평화를 깨며, 폭력을 통해서라도 의미를 다시 찾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의미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의미와 기독교인 됨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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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영성(spirituality)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spirit)’을 생각할 때 귀신을 떠올린다. 그래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들으면 귀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여,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알아보고, 무엇인가를 귀신처럼 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귀신처럼 무엇인가를 해내며 자기의 삶과 이웃의 삶을 생명이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영성을 그렇게 이해해도 나쁠 건 없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이 손에 잘 잡히는 말은 아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영성이라는 것을 말할 때 그 영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가 많다. 영성에 대해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만큼 손에 잡히게 설명하고 있는 학자도 드물다. 다음은 미셸 푸코가 그의 책 <주체의 해석학>에서 영성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문장이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인식이 아니라 주체, 심지어는 주체의 존재가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구성하는 정화, 자기수련, 포기, 시선의 변환, 생활의 변화 등과 같은 탐구, 그리고 실천, 경험 전반을 영성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미셀 푸코, <주체의 해석학>, 58-59).

 

영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규정에 따르면, 영성이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또는 예배를 잘 드리거나, 성경을 100번 통독하거나, 등의 물리적 훈련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물리적 훈련이 영성을 위한 실천의 범주에는 포함되겠이나, 영성이란 주체(자기 자신)가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주체에 가해지는 전반적인 생명의 힘을 아우르는 말이다.

 

주체가 변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현재의 주체로서는 진리(truth/진실)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주체는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주체가 선한 존재가 되려면 진리와 맞닿아야만 한다. 주체가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주체는 진리와 맞닿은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정화가 필요하고, 자기수련이 필요하고, 포기가 필요하고, 시선과 생활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영성은 진리에 다가서기 위한 주체의 거듭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마주하기 위한 주체의 변화 또는 변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성은 다른 말로 진리를 향한 순례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례는 한 걸음에 마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한 방향으로 순종할 때 마칠 수 있는 거룩한 발걸음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순례의 여정이 부족한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편안함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는 정주의 영성이 부족하다.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악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보니, 현대 기독교인들이 영성의 정의를 마음 깊이 새기는 것도 힘들 뿐더러, 영성의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어느덧 영성이라는 용어는 중세의 구시대적 유물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과 안전을 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원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성취하는 방식이 매우 세속적이다. , 평안과 안전, 그리고 자유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삶의 태도 자체가 이미 현대인들의 영성이 얼마나 비천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평안과 안전은 세상에서 기득권을 쟁취하고 물질적 풍요를 많이 일군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아니다.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자유를 선물해줄 거라는 것도 현대 문명 사회의 거짓 약속이다. 평안과 안전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이루며 사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이사야 32).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지, 기득권과 물질적 풍요가 우리에게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요한복음 832).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 우리에겐 영성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를 갈망하는가? 우리는 영원한 안식(평안과 안전)을 갈망하는가?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취하며 사는가? 우리는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서 우리의 부족한 주체를 변화/변형시키기 위해서 거룩한 순례를 떠날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정화, 자기 수련, 포기, 시선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기꺼이 감당할 믿음을 지니고 있는가? 주체의 거듭남을 위해 자기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는 순종을 지니고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구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으로부터 '휴거'되듯이 쏙 빠져나와 어디 평안이 넘치는 곳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불의와 고통이 넘치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맞서게 된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마음 먹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과 맞서 그것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불의와 악을 몰아내고 승리할 것을 믿고 죽기까지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 나라'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그가 고난 받고 십자가 위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서다. 반대가 아니다. 예수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를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쏙 빼내어 우리를 평안이 넘치는 어떤 곳(천국)으로 옮겨 가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두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 이 지구, 이 우주가 아무리 불의하고 악이 넘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자기를 버려 피조물을 구원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이 불의하고 악이 판치는 세상에 오게 하신다.

 

구원 받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 불의한 세상, 악이 판 치는 세상으로부터 상관 없는 듯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부활을 믿으며 죽기까지 이 세상의 불의와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 위에 임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지금도 이 땅 위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 앞으로 나아간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외치며 나아간다. 구원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하다 낙담하지 않는다. 악을 선으로 이긴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최후 승리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동물 농장>과 한국교회
    소설을 통해 본 오늘날 교회 현실…'배반의 복음' 벗어나려면

    <동물 농장>은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풍자 우화 소설이다. <이솝우화>처럼 동물을 의인화해서 썼기 때문에 우화 소설이고, 당시 스탈린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풍자 소설이다. 민음사판 <동물 농장> 번역자 도정일은 작품 해설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회주의를 위해 소비에트의 신화를 깨는 일은 필요하다. 이것은 강력한 역설적 진술이다. 이 진술로 보면 오엘은 소비에트라는 형태의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를 온 동네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일종의 희화로 규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이 잘못된 사회주의를 애써 은폐하기보다는 비판하는 것이 진실의 편에 서려는 작가로서의 자기 임무라 여기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점에서 오웰이 구현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양심이다." [<동물 농장>(민음사), 154쪽]


    무엇을 풍자하고자 이 소설을 썼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면 <동물 농장> 독해는 어렵지 않다. 등장 동물 중, 메이저는 마르크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돼지들은 볼셰비키를, 복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풍자는 (중략) 약자의 서사이다. 이 약자는 권력보다는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기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약자이다. 약자의 이야기이므로 풍자가 두들기는 대상은 권력을 쥔 부당한 강자, 지배 세력과 이데올로기, 지배적 제도와 관행이다."(147쪽) 오웰이 수많은 문학 형식 중 풍자를 빌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으로 다가온다.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약자들을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똑똑한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메이저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동물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상 체계를 바탕으로 동물 농장의 개혁을 추진해 나간다. 동물주의의 가장 기본 되는 원칙은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이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문제다!"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본가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적 표지로 '손'을 지목한다. "인간의 특징적인 표지는 그의 손이오. 손은 그가 온갖 못된 짓을 하는 도구입니다."(34쪽) 손은 자본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으나, 손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처럼 <동물 농장>에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이런 문장도 있다. "유일하게 좋은 인간은 죽은 인간이오."(42쪽) 이러한 것을 볼 때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단순히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야기 흐름을 보면, 결국 그들이 피를 흘려 쟁취한 '동물 농장'이 이전에 존스 씨가 경영하던 메이너 농장(동물 농장의 원래 이름)과 다를 바 없고, 더 나아가 그때보다 못한 상태가 된 것은 의인화한 동물의 탐욕과 권력욕 때문이다.


    소설에는 좌절된 꿈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한탄이 나온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 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 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 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78쪽)


    <동물 농장>은 우화로 표현된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은 이상 사회를 꿈꾸며 새로운 제도와 법을 만들지만,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한다. '동물 농장'도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투쟁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폴레옹의 권력욕과 권력형 돼지들의 조력, 권력을 뒷받침하는 개들(비밀경찰)의 충성 아래 이전 농장(사회)보다 더 불의해질 뿐이다. 타락한 동물 농장과 그 타락의 정점에 선 나폴레옹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에 대한 공식 호칭은 '우리의 지도자 나폴레옹 동무'로 바뀌었고 이 밖에도 돼지들은 '모든 동물의 아버지', '인간들의 두려운 존재', '어린 오리들의 친구' 등의 칭호를 그에게 갖다 붙였다. 스퀼러는 연설할 때마다 나폴레옹의 지혜, 그의 선량한 가슴, 만방의 동물들에 대한 그의 깊은 사랑, 특히 아직도 무지와 노예 상태 속에 살고 있는 다른 농장의 불행한 동물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무슨 일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거나 운수 좋게 잘 풀리면 그 공로는 어김없이 나폴레옹의 것으로 돌려졌다." (83쪽)


    충직한 일꾼,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복서가 죽자,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연설을 통해 동물들을 이렇게 선동한다. "'내가 더 열심히 한다'와 '나폴레옹 동무는 언제나 옳다' 이 두 가지 신조는 이제부터 모든 동물들이 각자 자신의 신조로 택하는 게 좋겠소."(109쪽) 이쯤 되면 동물 농장은 사회적 체계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으로 바뀐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이용해 사회적 체계를 세우고, 그 위에서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지배적 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동물 농장> / 조지 오웰 지음 / 도정일 옮김 / 민음사 펴냄 / 160쪽 / 7000원


    조지 오웰이 <동물 농장>을 통해 사회주의 양심을 드러냈듯이, 깨어 있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양심'을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온 동네 우스갯감으로 전락한 한국교회가 다시 도약할 수 있다고 믿는다. <동물 농장>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 오버랩된다. 그들도 모두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성경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덧 사람과 자본이 모이고 권력을 갖게 되면서, 종교적 신념을 이용해 교회의 체계를 세우고, 그 위에서 자연스럽게 권력자로 군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법 세습도 발생하고, 횡령도 발생하고, 무자격으로 목사 행세하는 사람들도 발생했을 것이다.


    오웰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배반당한 혁명', 또는 '배반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직접 겪은 '사회주의혁명의 배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의 또 다른 책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나는 현재 한국교회 상황을 '배반당한 복음', 또는 '배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배반의 복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오웰은 자기 소설에 대한 평가와 의의를 이렇게 내린다. "권력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혁명은 주인만 바꾸는 것으로 끝날 뿐 본질적 사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 대중이 살아 깨어 있으면서 지도자들을 감시 비판하고 질타할 수 있을 때에만 혁명은 성공한다는 것이 <동물 농장>에 싣고자 한 메시지이다."(153쪽)


    '대중이 살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에 눈이 간다. <동물 농장>에서는 돼지들과 개들이 권력자로 등장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권력자들은 대중을 '개', '돼지' 취급하기 일쑤다. 현실 사회에서는 오히려 동물 농장의 돼지들과 개들처럼 '똑똑한' 개, 돼지가 되는 게 중요하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넓게, 한국 사회의 희망은 지도자들보다는 대중들에게 있고, 좁게, 한국교회의 희망은 목회자들보다는 일반 신도들에게 있다."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은 일반 신도들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세우는 최선의 일이라 생각한다. '권력보다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고 싶다.


    장준식 / 미국 북가주 세화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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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나는 교회오빠다. 나를 교회오빠로 키운 건 팔할이 문학의 밤이다. 학생부 시절(1980년대), 문학의 밤은 여름성경학교와 더불어 교회의 양대 문화행사였다. 대중문화가 발전되기 전, 세계화가 진행되기 전, 교회에서 열리는 문학의 밤은 마을 단위 최고의 문화행사였다. 문학의 밤은 대개 깊어 가는 가을, 시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곤 했다.

     

    여름 행사가 끝난 뒤, 교회는 문학의 밤 모드로 돌아섰다. 시낭송, 독창, 중창, 합창, 콩트,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이 문학의 밤을 장식했다. 문학의 밤 사회는 주로 학생부 회장과 부회장이 보았으며,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주는 DJ가 필요했고, 핀 조명을 쏘아주는 조명팀이 있었으며, 막을 걷고 치는 막돌이들이 있었다.

     

    노래는 주로 그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을 골라서 했지만, 콩트와 연극은 창작극이 많았다. 친구들과 공동으로 창작하기도 했고, 혼자서 창작하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 모두는 아마추어 가수였고 배우였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공연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도 않았다. 누구 하나 뒤에서 관망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좋은 코너, 좋은 배역을 맡아 무대에 서기를 갈망했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쁨이고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교회오빠로 등극하게 된 것은 문학의 밤 무대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뒤였다. 또한 기타 치며 찬양 인도를 했고, 마이크를 잡고 문학의 밤 사회를 보게 되면서 나는 전형적인 교회오빠가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는 교회오빠가 되는 길을 정석으로 밟았다. 문학의 밤은 모두의 축제인 동시에 각자의 기억 속에 독특한 추억을 남긴 매직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혹은 좁혀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문학의 밤을 통해 정서적인 교감을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간직했다.

     

    그 매직의 위력은 88올림픽 후,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대중문화가 발달되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급지고 매력진 대중문화의 보급은 문학의 밤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경쟁사회로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을 낭만에서 생존으로 내몰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자유가 없어졌다.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학원을 다녀야만 했으며, 친구들과 정서적 교감할 시간이 없이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만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에너지가 많이 드는문학의 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21세기의 사회를 분석한 철학자 한병철은 지금 시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투명사회, 42). 여기서 탈서사화되었다말은,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주는가?

     

    한병철은 이렇게 말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같은 책, 42).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를 상실한 벌거벗은 생명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의미는 건강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육신의 노예가 되어 육적이지 않은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육적인 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활동적인 삶, 노동의 삶을 만들어 낸다.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어, 결국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노동의 삶을 넘어 사색적인 삶을 살 때 인간은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명의 철학자만 이야기하는 주장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때부터 이어온 철학자들의 한결 같은 주장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사색적인 삶을 위해서 배워야 할 세 가지를 말한다.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에 대해 한병철은 이렇게 해석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책, 47). ,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 있는 사색의 능력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다. 잠깐의 고독도 참아내지 못한다. 21세기에 문학의 밤을 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의 밤은 활동이라기 보다 사색이다. 오랫동안 머무르며 응시하는 능력이 없으면 문학의 밤은 열릴 수 없다. 시를 창작하는 일, 시를 음미하는 일, 시를 낭독하는 일은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연습하는 일도, 콩트나 연극의 대본을 만드는 일, 그것을 연습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무대에 올리는 일,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즐기는 일도 모두 사색의 영역이다.

     

    사색의 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응시하고,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낸다. 삶이 서사화 될 때, 즉 삶이 이야기로 넘칠 때, 삶은 우울할 겨를 없이 기쁘고 즐겁다. 반대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우울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가?

     

    교회오빠의 방점은 고독에 있지, 활동에 있지 않다. 그 옛날 교회오빠는 몸짱이어서 인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독해 보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색하는 것 같았기에,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면 삶에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이 시대에, 우리는 이야기를 되찾아와야 한다. 이야기를 잃어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나 다름없다. 짐승에겐 이야기가 없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삶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다. 문학의 밤은 우리들에게 풍성한 이야기를 안겨 주는 이야기 보따리와 같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우리는 21세기에 고한다. 21세기는 문학의 밤을 허()하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