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실패 - 아담신학

 

아담(잇쉬)은 하와(잇샤)를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을 수 없었을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narrative)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은 것은 하와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 '잇샤', 즉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동일한 사람'이 저지른 죄를 목격하고 들었을 때, 아담의 반응은 어떠해야 했나? 우리가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목격하는 아담(잇쉬)의 반응은 하와(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짓는 모습이다.

 

아담은 이 사태를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담은 하와의 죄를 목격했을 때, 동일하게 죄를 짓는 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대속물로 내어 놓고, '속죄(atonement)'할 수 없었을까?

 

가능성도 있었지만, 에덴동산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보는 아담의 행동은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속죄를 하지 못하고, '잇샤'와 동일하게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일명, '아담신학'은 그렇게 실패한 에덴동산에서의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둘째 아담으로 소개한다( 5). 첫째 아담은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는 속죄에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아, 속죄에 성공한다.

 

요한복음도 '아담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동산(에덴동산의 메타포)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찾아온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다( 19:41, 20:15). 예수님은 동산지기, 즉 아담이라는 것이다.

 

오경의 내러티브의 중심은 레위기 16, '속죄'이다. 오경의 모든 이야기는 '속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속죄에 성공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생명을 얻지만, 속죄에 성공하지 못하면, 즉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놓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말이 속죄가 되는 것일까? 이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영원한 대속물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여,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