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에 해당되는 글 427건

  1. 2019.10.24 감사한 뉴스 1
  2. 2019.10.22 한나 아렌트와 교회론
  3. 2019.10.19 실리콘밸리의 철학
  4. 2019.10.18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1
  5. 2019.10.12 공의회, 오리엔트 정교회, 동성애 문제
  6. 2019.09.24 나무를 사랑한다면 1
  7. 2019.09.22 I am OK
  8. 2019.09.22 용서의 근본적 필요성
  9. 2019.09.04 낀낀세대가 온다 1
  10. 2019.09.02 비판적 사유의 중요성
  11. 2019.08.25 사유의 전복
  12. 2019.08.19 에를레프니스
  13. 2019.07.20 우리 곁에 있는 펠라기우적 신앙
  14. 2019.07.18 오직 믿음
  15. 2019.07.18 보충성의 원리

감사한 뉴스

 

미국에서는 원래 이번주부터 합법적 거주를 원하지만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이민자들에 대한 합법적 거주를 거부할 수 있는 행정령을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 주 미국 법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그러한 행정령에 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합법적 거주를 원하는, 그러나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이민자들이 강제로 쫓겨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는 합법적 거주를 원하지만 그들이 합법적으로 거주를 할 경우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위한 논리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세운다. “The Trump administration said expanding the list of services that would disqualify a person would help guarantee that the immigrants granted residency are self-sufficient. 트럼프 행정부는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공공 서비스 목록을 늘리는 것은 거주를 허가 받은 이민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AP News).

 

트럼프 정부의 논리는 완전히 기득권의 논리이다. 그리고 이민자들끼리 서로를 적지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예를 들어, 현재 저소득층에게 부여되고 있는 ‘medi-cal’ 서비스(공공의료서비스)에 대한 지급을 허가 받은 이민자들에게만 제공하면, 그들의 의료서비스가 더 좋아질 거라는 논리이다. 어떻게 보면 솔깃한 제안이지만, 조금 생각해 보면, 법적인 보호 망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 취급하지 않는 악한 생각이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미국만큼 이민자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요즘 미국은 매우 보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 재정의 부담 때문이다. 국가 재정의 부담 중 하나는 불법 이민자에 대한 복지와 합법적 거주를 희망하고,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지만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방식으로 체류하는 사람들이라고 트럼프 정부는 생각한다.

 

이 논리가 기득권자들에게는 먹히는 전략일 수 있다. 그리고 이민자들의 분열을 획책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반과 재정 기반이 약한 이민자들의 미국에서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a민자들에게는 경제적 고통이 늘 따른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그러한 논리와 정책은 기반을 어느 정도 잡은 이민자들과 이제 기반을 잡아가는 저소득층 이민자들 사이에 골이 생기게 하고, 결국 저소득층 이민자들의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아버리는 잔인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국가 재정을 축 내는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더 힘든 거야! 너희들만 없으면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할 텐데! 그러니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복지 혜택의 기회를 줄 수 없어!’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누군가를 희생시켜 내 삶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진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한 풍요로움과 행복은 눈 먼 풍요로움과 행복일 수밖에 없다. 남의 고통에 눈감고, 그들을 딛고 올라선 풍요로움과 행복은 불의 그 자체다.

 

우리는 자신의 것을 좀 더 내려놓고, 더불어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인간의 야만성의 발효는 처음엔 자기 자신을 살리는 좋은 방편 같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 그 야만성은 자기 자신을 향하는 무서운 발톱이 된다. 조금이라도 더 강한 자가 조금이라도 더 약한 자를 밟고 올라서 쟁취한 풍요와 행복은 아무런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 풍요와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며 함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 의미 있는 삶이고, 그것도 어렵다면 그냥 함께 굶어 죽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운 삶이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건 미국 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But the judge says the changes would immediately put migrants who followed the law at risk for economic insecurity, health instability, denial of citizenship, and potential deportation. 하지만 판사는 이러한 변화들은 법을 따른 이민자들을 경제적 불안정, 건강상 불안정, 시민권 거부와 잠재적 국외 추방의 위험에 곧바로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AP News). 트럼프 정부의 잘못된 정책과 인간의 야만성을 잠재운 미국 사법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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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나 아렌트와 교회론

 

플라톤은 정치철학 분야에 있어 기여한 바가 크다. 그의 책 <국가>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거기에 플라톤은 '철인왕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철인(철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 이유는 철인이야 말로 진리의 원형인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한 자이기 때문에, 진리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비판한다. 그가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고 진리의 정치를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의 본질은 정치란 진리 실현의 장이 아니라 인간 복수성(아렌트의 용어다)에 기반을 둔 다양한 의견의 각축장이라고 말한다.

 

아렌트가 플라톤의 진리의 정치에 맞서 제시하는 정치 개념은 '의견의 정치'. 아렌트에 의하면 의견이란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과 고유한 처지를 따라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복수성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존재이고 정치란 각 사람의 의견을 모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렌트가 가장 비판하는 내용은 '진리주장의 폭력성'이다. 그녀는 현실 정치에서 진리를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현실 정치에 진리를 적용하면 폭력만이 발생할 뿐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 진리를 완전히 파악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교회를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로 목회자들에게서 그러한 생각이 만연하다. 마침 그러한 성경구절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는 말씀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는 말씀이 대표적이다. 이런 말씀에 근거해 교회는 자기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아렌트는 철인왕이 진리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길들이려고 노력하고, 그러다 보면 거기에 폭력이 나타날 개연성이 높다고 비판한다. 진리의 정치가 작용하면 지도자와 일반 시민들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가 관계가 형성될 뿐 아니라, 수직적 위계질서가 생겨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은 자신을 '진리 실현의 장'이라고 인식한 교회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 높다. 목회자는 스스로를 '철인왕'으로 생각할 여지가 높다.

 

진리의 정치의 이러한 위험성을 안다면, 그리고 인간의 복수성의 중요성을 안다면,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리 실현의 장'으로 두지 말고, '의견 정치의 장'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신을 철인왕(또는 믿음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산파'로 인식하는 게 좋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도와 진리를 발견하게 하고, 각자의 의견의 민주적 교환을 통해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는 게 좋다.

 

그러나 대개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목회자) '의견의 정치'를 꺼려한다. 의견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시끄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끄럽지 않고 질서 있게 조용히 운영되는 것은 교인들의 바람이라기 보다 교회 지도자(목회자)의 바람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침묵이 강요될 때가 많다. 교회를 시끄럽게 하면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려 어려움을 당할 뿐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의견의 정치'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의견의 정치를 실현하려면 덕을 갖춘 시민성을 견지해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의견의 정치가 실현되려면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의 덕'을 갖춘 성숙한 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성숙함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견만 개진하려 든다면, 오히려 '진리의 정치'를 펼치는 것만 못하게 교회 공동체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은 자신의 의견을 민주적으로 개진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를 성숙하게 세워갈 수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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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실리콘밸리의 철학

 

나는 실리콘밸리의 주민이다. 실리콘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를 몰고다니는 지역이다. 최첨단 과학이 발생하고 적용되는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실리콘밸리 지역에 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곳이 뉴욕의 맨하튼처럼 화려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금 발달된 시골일 뿐이다. 게다가 풍경이 삭막하기까지 하다. 민둥산과 개발되지 않은 해변(샌프란시스코만)에 둘려쌓여 있다. 곳곳에 말과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처음 온 사람은 묻는다. '실리콘밸리가 어디에요?'

 

이곳은 전세계의 모든 자본과 인재가 집약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다. 전세계에서 창업하기 가장 좋은 도시로 꼽힌다. 인구 10만명 당 박사학위 소지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자연스럽게 이곳은 교육열이 매우 높다. 경쟁이 극심하다. 한국은 한국인들끼리 경쟁하고 있지만, 이곳의 한국인 2세들은 중국, 인도, 타이완, 베트남 등 아시아와 유럽, 남미의 전세계에서 온 수재들의 2세와 경쟁을 한다. 일례로,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한 한급에는 대략 30명 정도의 학생이 있는데, 다국적 학급일 뿐 아니라, 30명 중에 10명이 ' A'를 받는다. B 하나만 있어도 10등 밖으로 밀려난다.

 

이곳의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경쟁에 치인다.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때 대표 연설한 중국 아이는 자기의 꿈을 당당하게 말하며, 아이비리그에 들어가서 공부한 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아이의 나이는 이제 12살 밖에 안 됐는데, 그런 말을 한다. 우리 아이도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앨런 머스크'라고 말한다. 테슬라 자동차 본사는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은 젊은 인재들이 몰려 있다. 그래서 도시가 활기차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집값이 매우 높고(대략 방 두개 짜리 아파트 렌트비가 3000~4000불 한다), 교통체증이 심하다. 도로에서는 매일 같이 사고가 난다. 트래픽이 심한 시간에는 돌아다닐 엄두가 안 난다.

 

이러한 실리콘밸리에는 어떠한 철학이 있을까? 바로 ''이다. 돈이 곧 철학이다. 실리콘밸리는 자본주의의 핵심지역이다. 이 지역만 따로 떼서 보면, 세계 경제 11위이다. 이 작은 지역만으로도 세계 경제의 11위에 오른다니, 이곳에 얼마나 많은 돈(자본)이 몰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요즘 실리콘밸리의 뜨거운 이슈는 'AI 인공지능'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좀 더 들여다 보면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이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모든 법과 규제는 시장의 무한한 확장을 보장하는 법과 규제이다. 옛날에는 무역장벽이 있어 시장 확대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무역장벽이 모두 허물어져서 기업들은 자신들의 시장을 개척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AI의 개발은 시장의 영역을 공간을 넘어 인간의 정신 영역으로 확장한다. 일례로, 누군가 어떤 특정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구글이나 아마존에서 검색을 했다면, 그 이후 며칠 동안 그 물건에 대한 구매가 이루어질 때까지 인터넷 공간에 그 물건에 대한 구매 정보가 뜬다. AI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소비자의 소비패턴(이것은 인간의 정신영역이다)을 분석하여 소비자의 소비를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해서, AI를 이용한 기업들은 소비자의 정신 영역까지 탈탈 털어, 그의 호주머니를 쪽쪽 빨아 먹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주민으로서 이러한 현상을 보면, 무서운 마음도 든다. 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사회 기업들의 의지가 무섭고, 그 영역을 인간의 정신영역에까지 뻗치고 있다는 게 무섭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주머니를 '합법적으로' 털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어떠한 철학을 견지하며 실리콘밸리의 철학(맘몬철학)에 맞서 생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지켜내야 할지 고민이다. 기술발전 뒤에 감춰져 있는 맘몬신을 폭로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덧 두 주인(하나님과 맘몬) 중 하나님을 버리고 맘몬을 숭배하는 배교자로 전락할 지 모른다. 내가 이미 맘몬 숭배자가 아닌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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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전체주의나 독재국가는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로만 사회가 유지되도록 획책한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아렌트는 사회를 존재케 하는 객관적 관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유대관계인 주관적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객관적 관계란 상인과 구매자, 교수와 학생, 부모와 자녀 같은 관계를 말한다. 주관적 관계는 이러한 객관적 관계 사이에 있는 유대관계를 말한다. 객관적 관계는 맺어졌으나, 그들 사이에 유대관계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관적관계, 즉 유대관계는 소멸될 수 있으나, 객관적 관계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그들의 관계가 객관적 관계인 부모 자식 관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형교회의 위험성을 본다. 대형교회는 그 규모와 구조로 인해 교인들 간의 유대관계, 즉 주관적 관계가 소멸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대형교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나 독재국가 형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삭막한 조직이 되고 만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려고 대형교회에서는 소그룹 모임 같은 것을 활성화시키지만 역부족인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지도자들, 특별히 담임목사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대다수의 교인들은 담임목사와 어떠한 유대관계도 가질 수 없다.

 

주관적 관계가 소멸되고 객관적 관계만 존재하는 조직이 왜 문제일까? 그것은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잘 드러나 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 프로그램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스라엘의 전범 추적자들에게 발각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뒤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에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참관했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구상한다.

 

우리는 흔히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악마의 모습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관찰한 전범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악이란 악한 사람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발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그러한 상황을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입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검토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했는데, 아이히만이 바로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객관적 관계만이 존재하는 전체주의 조직 내에서 반성적 사유(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능력)’를 하지 못하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조직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복종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자그마치 600만명이라는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것이다.

 

마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 Ich und Du>에서 인간의 관계가 나와 그것(I-it)’의 관계에서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진행되어야 함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아렌트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관계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관계에서는 어떠한 생명력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하버마스가 그의 책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관계 사이에 소통적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고 전략적 행위만 이루어진다면 한 조직의 구성원은 그 조직의 이익에 희생당할 위험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구조를 지닌 집단에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이게 바로 대형교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두 대형교회인 명성교회와 사랑의 교회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의아해한다. 그렇게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이고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왜 그 교회의 교인들은 그 교회의 지도자를 추종할까? 그 이유는 그 집단 내에서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보다는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가 지배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주관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객관적 관계 속에서 반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고 객관적 관계에서 오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구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회는 객관적 관계에서 주관적 관계로 그 관계가 발전해 나가야 하며,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소통적 행위 위에 의도한 목적을 이루려는전략적 행위, 즉 선교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적 공동체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 구조상 주관적 관계와 소통적 행위가 적극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형교회의 운명이 달렸다. 그러나 대형교회의 습성상 이 한계를 극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조적 악에 희생당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지혜가 더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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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오리엔트 정교회, 동성애 문제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라는 기독교 교파가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파이다. 이들은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 서아시아,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토착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종파이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기독론'이었는데, 기독론 논쟁의 핵심은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속에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의 기독론이 전개된다.

 

첫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이다. 이들은 예수의 신성와 인성을 편지지와 봉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인성인 봉투가 신성인 편지지를 끌어 안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의 인성 안에 예수의 신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예수를 완벽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형태의 가현설로서 예수의 죽음으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구원할 수는 있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이 생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된다.

 

둘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이다. 우리에게는 '경교'라고 알려진 종파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 분리 구별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연합(union)' '결합(conjunction)'용어가 사용되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되었다고 본다. 두 본성의 실체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실체 안에 두 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상대 진영에 서 있었던 악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에게 공격을 당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이곳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회의를 주관했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다. 네스토리우스의 생각은 신학적 단점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대결 때문에 단죄된 부분이 많다.

 

셋째는 키릴리우스 파였던 유티케스주의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과 포도주의 비유를 드는데,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혼합되어 새로운 것이 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섞여 그리스도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게 함께 있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단성론이라고 한다.

 

이들의 생각은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단죄된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케스주의 모두를 단죄한다.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론이 정착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실제로 연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리가 정착된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기독론을 표현하는 방식은 동방교회의 전통인 부정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독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하면 거기에는 반론이 제기되기 쉽기 때문에, 부정신학의 형식으로 '무엇이 아니다'의 방식을 통해서 옳지 못한 생각들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식으로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다. 다음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신학의 방식으로 서술한 기독론이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 분의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한 키릴리우스파(유티케스주의자들/단성론자들)는 칼케돈 공의회(451) 이후에 독자적으로 기독교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이다.

 

교회의 공적인 회의(공의회)는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교회 공의회는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기능도 있지만,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을 생산해 내는 역기능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교회사에서 겪었던 이러한 문제를 반복해서 겪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 문제이고, 대표적인 교단이 미연합감리교회이다.

 

미엽합감리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합의된 신학적인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하기 위해서 무단히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곧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이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이 반드시 생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마음이다. 우리에게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해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오리엔트 정교회가 낯설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 없듯이,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 취급하는 것은 편협한 마음일 뿐이다.

 

교회사가 최종원은 공의회를 통한 교리의 발전사를 서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발전은 성서 텍스트뿐 아니라, 언어/문화/사상 등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정통과 이단을 몇 가지 기준으로 간편하게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한 것인가 알 수 있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305).

 

모든 사람이 한 배에 타고 갈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배로 갈아타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다. 바다는 넓고 아직 목적지에 우리는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탄 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 돕는 것이다. 내가 탄 배만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다른 배들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침몰하고 만다면, 나의 구원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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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나무를 사랑한다면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이 불타고 있다. 지구의 허파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발화의 원인이 자연에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다니, 속상한 마음이 더하다. 고대인들에 비해 상상력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숲에서 불타고 있는 나무들은 그저 나무겠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나무에 대하여 어떠한 상상력을 가졌을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쿠피도(큐피드, 에로스)에게는 여러 종류의 화살이 있다. 쿠피도의 화살은 사랑에 목마르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만들기도 한다. 쿠피도의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 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쿠피도의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 화살에 맞은 다프네를 사랑하게 된다. 서로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쿠피도의 화살을 맞은 아폴로와 다프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아폴로는 다프네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그녀를 좇지만 다프네는 아폴로의 사랑을 멀리하며 도망친다.

다프네를 향한 아폴로의 사랑은 뜨겁다. 다프네를 바라보는 아폴로의 시선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아폴로의 가슴은, 타작 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 혹은 밤길 가던 나그네가 새벽이 되자 내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올랐다."


둘은 사랑의 경주를 시작한다. ‘사랑을 목마르게 하는화살에 맞은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겠다는 욕심에 가득 찼고,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만드는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잡히면 끝장이라는 공포에 전심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둘의 어긋난 사랑은 아폴로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큐피도의 날개가 함께 했던 아폴로의 추격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결국, 아폴로는 다프네를 따라잡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바로 그때, 다프네는 자신의 아버지 페네이오스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를 도우소서. 강물에 정말 신력이 있으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신의 은혜를 내리소서.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 주소서."


이 기도를 마치자 마자, 다프네의 몸은 나무로 변하기 시작한다. 다프네가 나무로 변신했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폴로는 다프네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는 나무로 변한 다프네에게 키스했다. 아폴로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라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 다프네였다. 나무에는 다프네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아름다움은 아폴로로 하여금 나무에게 키스하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는 함부로 나무에 불을 지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나무를 괴롭히는가. 나무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싶은 것일까. 나무의 아름다움인가? 그렇다면 나무는 도대체 무엇으로 변신해야 그를 괴롭히는 아름다움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나무가 다시 다프네로 변신한다면 그때서야 불지르는 일을 멈출 것인가.


나무를 사랑한다면, 나무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나무 안에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다프네의 숨결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나무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아버지, 우리를 도우소서. 숲속에 정말 신력이 있다면 기적을 베푸시어 전심(轉心, 마음을 바꾸는 것)의 은혜를 내리소서. 우리를 괴롭히는 이 추악함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 마음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추악함을 걷어내고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순결함을 주소서."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숲의 나무들을 태우고 있는 불이 하루 빨리 소멸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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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I am OK.

 

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한국에서의 일정을 잘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태풍 링링이 소멸된 상태라 감사하게도 궂은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쉬이 비 오는 날씨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간간히 비가 오는 중에 추석 명절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추석 명절 동안 인천에 사시는 큰어머니를 찾아 뵈었습니다. 못 찾아 뵌 지 오래 되었는데, 벌써 연세가 90이 되셨고, 치매가 걸려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저를 형의 아들로 생각하시더군요.

 

명절 때 집안 어르신들을 몇 분 찾아 뵌 것 외에는 별다른 약속 없이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중에 하루 특별히 시간을 내어 모 방송사의 OOO PD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덕분에 요즘 서울에서 한창 인기 있는 광화문 근처의 서촌과 북촌 구경도 하고, 통인시장도 다녀오고, 광화문 먹거리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습니다. OOO PD가 다음날 병원 검진이 있어 늦지 않은 시간에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저녁 때쯤 OOO PD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오늘 병원 OK?”

 

며칠 동안 메시지에 응답이 없던 OOO PD는 제가 비행기 타고 귀국하는 날 통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간 벌어진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니던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데, 유방암이 의심된다며 급하게 큰 병원에 갔었답니다. 그런데, 큰 병원에서 다행히도 작은 병원에서 오진을 한 것 같다며, 몇 개의 혹이 있지만 괜찮다고 했답니다. 며칠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며, 저의 메시지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서 답을 못했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I am OK.” 그리고 전한 OOO PD의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I am OK.’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 인줄 몰랐어요.”

 

그렇죠. 우리가 모두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인생이 하루 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Are you OK? 잘 지내세요?”라고 물어올 때, “I am OK. 네, 잘 지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올해는 한국에 갈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잘 지내고 계시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수술 소식을 듣고 서둘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의 수술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어머니의 수상한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카톡 전화를 하신 어머니께서 뜬금없이, “잘 지내니? 너희들만 건강하면 됐다.”하시며 전화를 끊으셔서, 수상쩍어 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간을 3분의 1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와서 계획에 없던 한국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I am OK.” 이 세 마디 말을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이 세 마디의 말을 누군가에게 할 수 있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참 감사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Are you OK?” 미소와 함께 이런 대답을 듣고 싶네요. “I am OK.”

Posted by 장준식

용서의 근본적인 필요성

 

요즘 저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능력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에 걸쳐 값을 치러야 하는 과거의 행위를 구제한다. 예수의 표현은 훨씬 급진적이다. 복음서는 신이 인간을 용서하기 때문에 신과 같이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신도 그와 같이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위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

 

한국에 방문해서 보니, 한국의 추석 문화가 많이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옛날에는 추석 때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성묘를 갔었습니다.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바리바리싸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혀 계신 곳에 가서 음식을 풀어놓고 먹으며 가족애 가운데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묘의 풍경이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 일단 요즘은 대부분 화장(cremation)을 하기 때문에 묘가 없습니다. , 가족이 모두 모일만한 장소가 없는 것이죠. 또한 뉴스를 보니 추석명절을 맞아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인구를 5천만으로 봤을 때, 산술적으로 1천만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지요.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만큼 사회의 공동체성과 가족애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절 때가 되면 공항이 붐빕니다. 성묘 가는 것보다 여행을 택하는 가정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절의 풍경과 용서가 무슨 상관관계에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용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살아도 밥 먹고 사는 데 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문서(성경 포함)에 용서가 최고의 가치로 서술되고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과학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때에 농사짓는 일은 인간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미워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죠. 그래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협력하기 위하여, ‘용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삶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상대방이 없어도 생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을 용서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용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다 보니, 용서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란 구시대 유물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현대인들을 외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용서의 부재입니다. 상대방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사회구조와 생각 자체가 용서의 필요성을 없애고, 실제 삶에서 용서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삶은 더 외로워져만 갑니다. 물론 상대방이 없어도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와 똑 같은 인간의 따스한 말과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터치가 없으면, 인간의 내면은 메말라 갑니다. 용서의 부재는 그 터치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인은 잘 먹고 잘 산면서도 그렇게 외로워합니다.

 

성묘를 같이 가야 하는데,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풀지 않고 성묘를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성묘를 준비하며, 또는 성묘 가서 조상님들 앞에서 밥상을 차려 놓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이루고 서로의 삶을 터치해 주었습니다. 그 프로세스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용서의 자리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성묘를 번거롭게 여길 뿐 아니라, 성묘할 수 있는 장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행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행위가 더 필요한 것이고, 용서의 가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소중한 인간의 조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살아가는 데 상대방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기독교적인 용어로,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상대방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용서의 가치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모두 모르고 하는 것이지요. 모르고 한 일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용서해주는 것 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그렇게 용서한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게 구원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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낀낀세대가 온다

 

김호기 교수의 '40대를 생각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그는 현재의 40대를 '낀낀세대'라 명명한다. 86세대와 2030세대 사이에 놓여, 앞과 뒤가 다 막혀 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1990년대 이 '낀낀세대' X세대 또는 신세대로 불렸다. 그때의 논쟁을 아직도 기억한다. 바로 나 자신이 X세대였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신세대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압구정동과 강남역을 누비며, 부여된 신세대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듯이, 1997, 대학 졸업을 앞 둔 시기에 외환위기(IMF)를 겪으면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사회학자들은 X세대, 신세대의 특징으로 "개인주의, 탈권위주의, 감성주의, 소비주의"를 꼽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이다. 그러나 이 개인주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시장적 개인주의'로 발전했다고, 김호기 교수는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의 가치 아래, X세대는 자신의 시장적 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장적 개인주의의 길을 어렵게 걸어왔다.

 

김호기 교수가 지적하는 40대의 어려움이 눈에 간다. 낀낀세대이기에 아직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화 세대인 86세대에 눌려 있고, 2030세대에 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이제 두각을 드러내야 할 40대에 처한 X세대 중 지도자급 인사로 발돋움 한 친구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의 분석 중 더 눈이 가는 것은 평균수명의 증가로 사회활동 연령의 연장을 고려할 때, 낀낀세대(40)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시기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현재 40대인 '낀낀세대' '대기만성형 세대'라고 부르고 싶다. 또는 '윤동주세대'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 비해 성장이나 활동이 더디었는데, 그러한 사실로 인해 윤동주는 사촌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는 대기만성형 인간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송우혜가 쓴 <윤동주 평전>에 보면 이 상황이 잘 나와 있다.)

 

김호기 교수는 말한다. "낀낀세대는 민주화의 가치를 공감한다는 점에서 86세대와, 개인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밀레니엄세대와 통한다. 끼어 있다는 것은, 발상을 달리하면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두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그리하여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40, '낀낀세대'에 주어진 사명은 "점증하는 세대갈등에서 교량적, 포용적,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있다. 이것은 실로 나의 목회현장에서도 경험하는 바이다. 나는 낀낀세대라 연령이 높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과거의 경험'과 젊은 층이 가지고 있는 가치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재의 경험'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낀낀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을 감지하고, 낀낀세대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세대통합을 이루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비록 지금은 다른 세대에 묻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묵묵하게 실력을 기르고 자리를 굳건히 지키다 보면, 시대를 이끄는 주역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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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유의 중요성

 

김승섭은 그의 저서 <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권력을 통해 어떤 지식이 생산되는지에 대하여 보건지식의 역사를 추적하며, 특별히 여성에 대한 보건지식이 보건역사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30).

 

에모리에서 공부할 때, 'Comparative Theology' 수업 시간에 마지막 페이퍼를 쓰면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대결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결국 승리한 역사를 거론하며, 그때 생성된 '삼위일체 지식'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생성된 '삼위일체 교리'는 치열한 권력 싸움의 바탕 위에서 아리우스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써내려간 페이퍼는 교수님(David S. Pacini)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보건지식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식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의 신학지식도 마찬가지다. 신학지식도 생산되는 과정에서 과거(그당시)의 편견(한계)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학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 스며든 그 시대의 편견과 권력 관계를 파헤쳐 그 지식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지금의 시대에 정의롭게 재생산(재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진 신학자들이 해야 할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중요한 과제일 뿐 아니라, 사명이다.

 

과거의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재생산해 내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생명)에게 고통을 가한다면, 그것만큼 게으르고 무모하고 악한 일이 없는 것이다.

 

생성된 지식에 대하여 비판적 사유를 하는 작업은 우리가 거기에 무고한 희생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고된 작업이다.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늘 필요하다. 아니, 지식생산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생산을 해내는 일에 비판적 사유와 해석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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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전복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그의 저서 <인류세 Defiant Earth>에서 다음과 같은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세계의 구조에 생겨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균열(rupture)에 직면해 우리는 기존의 모든 신념을 의심해야 한다"(p.70).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근대에 형성된 사유들은 홀로세(Holocene)의 안정된 지구 환경 위에서 세워진, 하지만 인류세에 들어선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상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과학을 근거로 한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1945년을 기점으로 지구의 역사는 홀로세를 넘어 인류세로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의 발달로 인한 인류의 엄청난 힘 때문이다. 지구의 진화에 인간의 '의지적인 힘'이 개입함으로써 지구의 행로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균열(ruptur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균열로 인해 인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가 책에서 대결을 벌이는 사상은 에코모더니즘이다. 에코모더니즘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는 사상인데, 그들은 '좋은 인류세'를 주창하며 인간의 능력과 미래를 밝게 전망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러한 낙관주의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지구는 더 이상 근대의 인간들이 믿었던 것처럼 인간의 착취 아래서 조용히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연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p.84). 인류세에 들어선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착취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며,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자연 재해를 동반하며 인간의 의지적 힘에 대항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새로운 시대의 진입을 오해하게 한다. 인류세를 잘못 해석하면, 드디어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제압하고 제어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세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뜻은 오히려 "생태계 교란을 뛰어 넘어 지구 시스템의 균열을 인식하는 질적 도약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이다.

 

그는 이제 '생태계'라는 말로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없고, '지구 시스템 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적 사고를 통해서만 지구의 환경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다. "성장 주도의 기술 산업 시스템의 초기 잘못은 보통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라기보다는 가공할 인간중심주의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p.78).

 

그는 그의 주장에 따라, 신인간중심주의를 주창한다. 신인간중심주의란 "인간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을 갖게 된 것을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세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을 말한다. "신인간중심적인 자아는 근대의 주체처럼 자유로이 부유하지 못하며 항상 자연에 엮인 채 자연의 구조 안에서 매듭을 이룬다." (p.91).

 

근대의 사상은 인간을 주체로 파악할 뿐 아니라, 자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자연을 객체로 생각하며 주체인 인간은 객체인 자연을 자신의 요구와 의지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세에 들어선 지금 인간은 더 이상 근대적 주체의 자유와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연이 더 이상 인간의 자유와 힘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시대는 끝났다. 인간의 운명은 단순히 인간의 손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 즉 가이아의 힘에도 달려 있는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간의 측면에서 평화의 시기, 또는 '인간화된 지구'의 시기는 끝났다. "인간은 더 강해졌다. 자연도 더 강해졌다. 이 둘을 합쳐 생각하면 지구상에는 더 강력해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과 지구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 중인 것이다. 이 줄다리기에서 인간은 지구를 우리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당기려 애쓰고 있다. 지구는 우리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잡아당기고자 한다"(p.82).

 

인류세라는 균열(rupture)은 기존의 사고 방식으로 존재(생명)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한다. 사고의 전복 없이 인류는 그 균열이 만들어낸 새로운 국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할 것이고, 해결책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 신학은 인간의 편에 서야할 것인가, 자연의 편에 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인간과 자연의 중간에 서서 두 거대한 힘이 균형을 이루어 공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이 시대에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신인간중심주의'의 옷을 입고, 소유한 힘을 훨씬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인류세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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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를레프니스

 

독일어 에를레프니스(Erlebnis)’는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을 뜻한다. 이는 우주비행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overview effect’의 말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 나가서 지구와 우주를 보고 귀환해서 이전에 가졌던 시점과 같은 시점을 지니며 더 이상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듯이,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은 그 사건을 경험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인류세(원제: Defiant Earth)>의 저자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책의 서론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지금이 바로 모든 인류에게 에를레프니스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과학자들은 줄기차게 지구 시스템 붕괴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인간중심적이지 지구환경 중심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사고는 현재 지구 환경 시스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못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지구과학자들이 데이터에 근거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해도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한다. 그는 말한다. “지구 시스템의 위기를 말할 때 가장 흔하면서 분명한 반응은 무감각한 태도다”(인류세, 8).

 

보통 사람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자기 자신(또는 자기 가족) 외에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다. 특별히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지구 환경의 변화에는 너무도 무감각하다. 그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지구 환경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어도, 그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비극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인류세, 9).

 

책의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가 반드시 새겨들어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왜 지구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 시간을 살면서, 그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드는 것일까? 그는 말한다. 사람들의 무관심은 이성의 쇠퇴나 심리적 나약함때문일지 모른다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좀 길지만,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그대로 가져온다.

 

“…… 세상을 더 문명화된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라는 힘들, 이를테면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은 사실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신뢰했던 힘들이 우리를 배신했다. 우리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힘들이 이제 우리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증거를 거부함으로써, 말하자면 계몽주의를 저버림으로써 긴장 상태를 해소하려 한다. 다른 일각에서는 지구에 대한 고뇌가 낭만적 환상이나 미신적 퇴행이라도 된다는 듯,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자는 주장을 인류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태도라며 폄하한다.”(인류세 11).

 

너무나도 놀랍게, 2800년 전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는 당대의 남유다 왕이었던 히스기야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앗수르의 위협과 병들어 죽게 된 위기와 시련의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극복한다. 그런데, 그는 앗수르의 위협이 감소되고 병도 치유된 평안의 시기에 안타깝게도 몰락의 길을 걷는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딘이 병환의 회복을 축하해 주기 위해 보낸 사절단의 (정치적) 방문을 받고 바벨론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는다. (이사야 39) 그러나 그는 그가 덥석 잡은 바벨론의 우호의 손길이 나중에 자기 백성과 자기 후손들을 압제하고 약탈하는 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될 거라고 알려주는 것은 이사야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물질적 진보, 기술력을 메시아처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이 인간을 어떠한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번성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민 우호의 손길을 덥석 잡은 인간은 지금 바로 그것이 세계를, 특별히 지구 환경 시스템을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으로 인해 수많은 가난한 자들이 고통 당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고, 지구 온난화로 삶의 터전이 망가져 가고 있음에도 지구 환경 시스템을 복구 시키기 위한 어떠한 발걸음에도 동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것인가. 저자가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에겐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코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바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삶의 행로에서 우연히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삶을 돌이켜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다. 그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또 한 번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 필요하다. 아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이들과 지구 환경 시스템의 붕괴를 자각하기에 충분한 에를레프니스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먹고사니즘귀차니즘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고통 당하는 이들을 돌보고 하나님이 주신 이 창조의 세계를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지켜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부르심 대로 우리가 살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이며,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인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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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있는 펠라기우스적 신앙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숙적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 반면, 그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총을 강조했다.

 

교회의 역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주장이 승리했고 우위를 차지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의 중심은 '은총론'이 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서 온 부작용도 존재한다. 교회에서 은총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소홀해졌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론을 강조한 이유는 '자유와 책임'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의 자유의지를 통해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펠라기우스의 신학에 큰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외에도 도나티우스와도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도나티우스(도나티즘, Donatism)는 부도덕한 사제의 성례집전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제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이후에 그 사제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이 받은 세례는 무효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성례전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사상이었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나 '날라리' 신앙인이 아니라, 모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그들의 경건이 지나쳐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의 신앙 경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엘리티시즘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했고 도덕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들에게 신앙 생활의 중심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이고, 타락한 존재이고, 오직 구원이 필요한 가련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 싶었던 은총론은 인간을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만 보게 만드는 것일까?

 

요즘 교회는 은총론의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만 하는 시절이 되었다. 그렇다고 은총론을 폐기할 수는 없다. 여전히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은총론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더 깊으신 하나님의 은총 없이, 우리가 어떻게 모든 죄를 뒤로 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요즘 점점 펠라기우스의 기운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기운을 자칭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서는 펠라기우스의 기운과 더불어 언제나 '영지주의'의 기운이 엿보인다. 지식인들은 교회 출석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보다 지식 수준이 떨어지는 '성직자'의 설교나 성례전 집전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와 논쟁을 벌여 그들의 신학을 물리친 이유는 펠라기우스와 도나티우스의 사상에서 엿보이는 '교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을 불어오기 쉽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즉 영지의 경험은 구원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지식은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보니,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존재(사제)의 설교나 성례전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불신앙의 상태를 불러오는 것이다.

 

우리는 줄곧 하나님의 은총을 탈육신화시키는 우를 범한다. 우리는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를 견디지 못한다.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가 설교하고 성례전을 집전하는 것을 속마음으로 '무효'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러한 내적이고 은밀한 교만이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끊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의에 의해, 자신은 저들과 다른 존재이고 구원 받은 존재라는 내적이고 은밀한 구원이 선포된다.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교만의 작용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지주의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소위 '자력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은총을 말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이 보기에 지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거리끼고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은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모자라지만 은총에 의해 성직을 수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모자람을 개선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우습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너무도 명확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자신이 지금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지'에 의해 도취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고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펠라기우스나 도나티우스의 신학 사상에 맞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교회에서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함으로 인해 '은총'이 오용되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 안의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선한, 그리고 신비로운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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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

 

라인홀드 니버는 종말에 관한 두 비유에 대하여 말하면서,

최후의 심판 비유가 펠라기우스적이라면

포도원 일꾼의 품삯 비유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이라고 평한다.

ㅡ 김재성 <예수의 비유에 나타난 개성화의 동기> 중에서

 

어떤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가 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왠지 별다를 것 같지 않아요!" (김동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인생이란 그렇다. 우는 것과 웃는 것은 구별되는 행동 같지만, 인생이라는 큰 차원에서 보면, 우는 것이나 웃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울어도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나고, 웃어도 인생은 그냥 그렇게 끝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함이나 악함은 별반 다르지 않다. 좀 더 도덕적으로 사나, 아니면 좀 더 악하게 사나, 하나님 앞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기를 쓰고 다른 이와 같지 아니하려고 선하게 살거나 도덕적으로 살려 들지만, 또는 다른 이들과 차별되는 어떠한 것을 성취하려고 애쓰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신앙의 전통에 서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율법과 대비시키며, 또는 행위와 대비시키며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믿음을 증명하는 신앙생활을 강요, 또는 강조한다. 결국 믿음은 행위로 전락된다.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은 은총론의 표현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쌓는 자기 성취나, 자기 의, 또는 도덕 등은 우리가 불의라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의 부족함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을 생산해 낸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싸 놓은 똥을 치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실존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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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성의 원리(Subsidiarity)

 

Pius XI's encyclical Quadragesimo Anno: the developing concept of "subsidiarity", which held that social problems should be solved when possible by people organizing themselves at the local level.

 

Subsidiarity(보충성의 원리),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중요한 원리이다. 현대 사회는 다원주의 사회다.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분야와 그것을 유지한 힘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한 힘, 또는 어떠한 한 원리로 다원주의 사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들 때, 그것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망상에 불과하다.

 

에밀 부르너는 'orders of creation'로 국가와 교회와 가정과 노동과 문화를 제시했고, 본 회퍼는 'divine mandates'로 일과 결혼과 정부와 교회를 제시했다.

 

사회의 질서는 이들끼리의 연합에 달려 있고, 그 어느 한 분야가 다른 한 분야에 대하여 우위를 가지지 않는다. 한 분야와 다른 분야가 어떠한 문제를 놓고 충돌할 수도 있다.

 

일례로, 본 회퍼가 나치 정부에 대하여 저돌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가 정부의 견해와 충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치 정부가 우위를 차지하여 질서를 구현하려고 들 때, 또다른 질서의 힘을 가진 교회가 저항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다른 분야보다 사회 질서를 제시하는 데 있어 힘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다른 분야의 활동을 도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활동을 얕보게 되고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보수세력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오류인데, 그들은 여전히 다원주의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가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위치와 위상을 '중세시대'로 환원하려고 한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무지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고 직무유기다. 그것은 권력에의 욕망일 뿐이다.

 

교회는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사회의 한 세력이 아니라, 사회 발전을 면밀히 살펴 그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더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 그리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의 다른 세력과 발을 맞추어 걸으며 그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제시하고 그들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을 보여주는 희망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쳐지는 사회적 세력은 사회의 짐이 될 뿐,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 그러한 안타까움이 발견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의 변화와 발맞추어 가는 교회, 한 가지의 원리로 질서와 평화를 세워 나갈 수 없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가져야 하는 선교적 위치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