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명구령운동과 세화하늘축제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잘 알려져 있으나, 1909년에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백만명구령운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03년 운동은 1907년 운동을 불러왔고, 1907년 운동은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190910, 서울에서 열린 복음주의선교회공의회백만명구령운동1910년 공의회의 전도 운동으로 채택하고 운동을 전개했다.(옥성득,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381)

 

그 당시 한국 개신교 신자는 20만명 정도였는데, 한 사람당 4명씩 전도하면 백만명구령운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된 구령 운동 수단은 기도와 성경과 날연보였다. (옥성득, 382). 여기서 주목하여 볼 것은 날연보이다. 날연보란 전도하기로 결단하고 1년 중 며칠을 전도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하루를 전도에 바치거나, 7일을 바치거나, 또는 30일을 바치는 것이다. 자신이 정한 날만큼 주님께 날연보를 바치면, 그 날 수만큼 바깥에 나가서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백만구령운동에 참여한 교인들이 바친 날연보의 총합계는 ‘100,000’일이 넘었다. (옥성득, 382).

 

백만구령운동이 일어난 1909년과 1910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1910년 한국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수치를 겪었고, 그 이후 삶의 전반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신앙생활을 유지하려 해도,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백만구령운동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전개된 모든 기독교 부흥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사가 옥성득 교수는 백만명구령운동을 이렇게 평가한다. “애국계몽 운동인 백만명구령운동은 단순한 전도 운동이 아니라 교회 설립 운동, 교육 운동, 계몽 운동이 결합한 구국 운동이었다. 비록 의병 전쟁처럼 물리적으로 일제에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미래를 책임질 십자가 군병을 모집하는 운동이었다”(옥성득, 389-390).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차치하고서, 한국 기독교사에서 이어온 부흥운동(부흥회)’은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부터 100년을 넘게 이어온 가장 오래된 전통 중 하나이다. ‘세화하늘축제는 우리 교회만의 외톨이 행사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역사의 맥락 속에 있는 역사적 행사이다. 우리는 그 역사의 맥락 속에서 세화하늘축제를 열면서 지금 우리 시대,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무엇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우리의 민족을 구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부흥운동의 빛이 많이 바랬다. 110년 전, 백만명구령운동 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며칠을 하나님께 날연보하며 헌신했지만, 요즘에 우리는 몇 시간도 시연보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게다가 교회의 부흥운동은 세상의 이벤트에 밀려 매력적이지 못한 종교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세화하늘축제가 열리는 날과 한국의 인기 보이 그룹 ‘BTS(방탄소년단)’의 공연 날짜가 겹친다. 비싼 BTS 공연에는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값없이와서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부흥회는 초라한 집안 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LA에서 하는 BTS 공연이 실제로 우리 교회 행사에 영향을 미친다. 대단한 보이 그룹이다.)

 

백만명구령운동과 관련하여 옥성득 교수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올바른 부흥 운동은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동시에 시대 정신을 이끌 비전을 제시하는 운동이어야 한다”(옥성득, 390). 부흥회에 오지 않고 BTS 공연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힐난의 눈빛을 보낼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이다. 교회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현실과 이성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으며, 시대 정신을 이끌어 갈 어떠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세화하늘축제는 우리 교회만의 집안 이벤트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흥운동은 역사와 연결되어 있고, 역사를 새롭게 하며, 역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화하늘축제에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자(messenger)를 통하여 지금 우리 시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 시대 정신과 비전을 발견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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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철학으로 풀어보는 구원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성경을 말한다. 여기서 본질은 'substance'를 말한다.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본질(substance)'은 하늘에 존재한다. 하늘에 존재하는 본질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우리가 바꿀 수 없다.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본질의 차원에서 구원을 설명하자면,

구원이란 본질이 바뀐 것이다.

구원이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8).

 

구원은 본질이 바뀌는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만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 고유의 능력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꾸려고 '무슨 짓'을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본질은 하늘에 속해 있고, 그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이 땅에서 공로를 많이 쌓아도 우리의 힘으로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하늘의 속한 본질은 하늘에서 하나님만이 바꾸실 수 있는 배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말한다.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꿀 수 있는 길은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있다고 말이다. 가능한 일이다. 예수는 이 땅을 살다간인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능히 하늘에 속한 본질을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전한 사도 바울의 복음이 플라톤 철학 바탕 위에 세워진 헬라문화권 사람들에게 잘 먹혔을 것이다. 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이제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본질이 바뀌어 본질상 축복의 자녀가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Posted by 장준식

청년인가, 노년인가

ㅡ 교육의 중요성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ㅡ 안창호 (시국대강연)

 

안창호는 독립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이상의 실현을 위한 실제적인 수단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교육은 인격의 발전을 이루고, 행위를 변화를 가져오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은 그냥 앉아서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고, 한 개인의 깊은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의 갈망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 아니 하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아니하오. 국가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시간 있는 대로 힘써 공부하시오”(안창호, 시국대강연)

 

국가가 망해 실의에 빠져 있는 한국 민족 구성원들에게 교육을 외치는 일이, 누군가에는 팔자 좋은 일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팔자 좋은 사람이 하는 사치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유를 꿈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이다.

 

교육은 매우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안창호는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 기간에 우리는 교육을 힘씀이 마땅할까요? 나는 단언하오. 독립운동 기간일수로 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죽고 살고 노예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지력과 금력이오.”(시국대강연)

 

교육은 철학적인 면만 아니라 실용적인 면에서도 인간이 힘써야 할 당면한 기본 과제이다. 안창호는 교육이 지력과 금력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실용적으로 말해, 지력과 금력은 한 개체(인간이든 국가이든)의 독립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안창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별히 청년들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오. 본국에는 아직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지마는, 기회 있는 대로 공부 해야 되고 시켜야 되오.”(시국대강연)

 

안창호는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민족이 교육에 매진할 것을 토로했다. 그것만이 나라를 빼앗긴 수치와 슬픔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고도 실용적이고도 지속적인 독립의 방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강연을 들었던 이 중, 남강 이승훈은 실제로 실행에 옮겨, 사업으로 모은 자신의 재산을 투자해 오산학교를 세운다.

 

교육은 아이들이나 청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내가 아직 청년인가 노인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교육에 대한 열정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느냐, 아니면, 공부하기를 멈추었느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아무리 젊었어도 배움을 멈추면 노년인 것이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으면 청년인 것이다.

 

안창호의 말처럼, 국가에 누 끼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기독교적으로 말해, 하나님 나라에 누 끼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자.)


Posted by 장준식

니버의 죄론

 

니버는 기독교적 인간관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신의 형상(Image of God), 2) 인간의 피조물성, 곧 그의 약함, 의존성 및 유한성, 3) , 곧 인간이 그의 의존성, 유한성 및 불안정성을 거부하는 데에서 생기는 죄 (니버, <인간의 본성과 운명> 1, pp. 137-138).

 

니버의 인간론은 죄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니버에게 ''는 인간의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 아니다. 니버에게 죄는 인간의 바깥에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데,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적이고 안전한 삶을 만들어 가려고 할 때 발생한다.

 

또한 니버에게 죄는 인간이 가진 자유에서 비롯되는 필연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유를 지녔기에 죄를 짓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니버에 의해서 거부된다. 니버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할 때 옳은 생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된 본성을 치료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죄에 굴복시키지 않고 인간성을 끝까지 보존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구원의 길'을 제시한 사건이 된다.

 

예수는 자기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다. 인간의 생명을 생명되게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없기 때문이다.

 

니버는 말한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그 자신, 그의 나라, 그의 문화, 그의 문명을 신성하다고 스스로 상상하는 허영과 오만,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내기 위해서 수도 없이 자기초월을 시도한다. 성경 속의 이스라엘 역사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낸다.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반란, 왕을 달라는 요구, 이방신에 대한 우상숭배 등,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명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자기 초월을 시도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니버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 즉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하게 인식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기대어 사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성취는 자기 초월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나, 그 자기 초월적 성취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자기 구원을 이루고 다른 생명을 차별하는 죄가 될 뿐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여 가며, 생명의 기운을 써 가며 성취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주여,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을 이루고 차별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기쁨 자유, 평화, 사랑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놀이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3.1절 아침에

 

지난 주일, 우리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다. 겉으로 만세 삼창은 안 했지만, 안으로는 만세 삼만창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찬양예배라 예배의 분위기는 힘차고 흥겨웠고, 무엇보다 일본인이 지은 복음성가와 남궁억 선생님이 지은 찬송가를 함께 부르면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설교시간에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중심으로 '먼저 보냄을 받은 자'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먼저 보냄을 받았던 자' 안창호의 삶을 병행해서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즉 이 세상에 '먼저 보냄을 받은 자'로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이 아름답게 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주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드렸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북미회담이 성과 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속상할까? 한숨만 짓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미국 뉴스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하여 듣기 위해 NPR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NPR 뉴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뉴스업체이다. 아무리 진보 뉴스 업체여도 이 방송은 미국 방송이다. 뉴스의 관점이 북한 외무성에서 내놓은 보도 자료나 남한 측의 관점과 달랐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들은 트럼트 행정부가 내놓은 협상 결렬의 이유를 부각시켜 보도를 했다. 마치, 북한 쪽에서 협상을 받아 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보도를 접하면서,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본다. 한 나라에는 정부가 있지만, 국제 무대에는 정부가 없다. 무정부 상태이다. 니버는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문제는 더욱더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차 대전 후에 세워진 국제연맹이나 2차 대전 후의 국제연합(UN) 같은 연합 기구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말한다.

 

안창호는 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기 전,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중일전쟁이 한국의 영토에서 발생하는 일을 두고, '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고, 독립운동이 전개되면서, 그는 계속하여 '힘을 키워야 한다'며 국민들을 조직하여 힘을 키울 방안을 줄기차게 마련하고 실천한다.

 

2차대전을 치르면서 세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이 얼마나 위험한지 학습했다. 그래서 그 이후 세상은 그러한 이념들을 넘어서 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명목 아래 민족들 간에, 국가들 간에 교류를 활발하게 해왔다.

 

그러나, 그 세계화라는 것이 결국 경제를 통한 또 하나의 제국주의적 구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세계화를 통해 불평등과 국제분쟁은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게 요즘 세계의 현실이다.

 

세계화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사랑'의 철학을 바탕으로 인류애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되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세계화는 결국 경제강국(대국)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들에게 시장 개방을 강요하여 시장의 확장을 통해 자신들의 부를 늘려 가는 교묘한 착취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났다.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국제 무대에서 힘이 약한 나라가 힘이 강한 나라를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국은 계속하여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북한을 압박할 것이고, 북한과 남한은 생존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게 될 것이다.

 

무정부 상태인 국제 무대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안창호가 주장했듯이, '힘을 기르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힘이 도덕을 상실한,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힘이면 안 될 것이다. 안창호도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덕과 사랑을 상실한 힘은 그저 야만일 뿐이다.

 

NPR 뉴스를 들으니, 미국은 절대로 한국의 편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도 자꾸 미국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자적인 생존을 위해서 북한의 핵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고국, 대한민국이 '힘 센 나라'가 되면 좋겠다. 하지만, 그 힘이 '덕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힘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세상을 야만에 빠지게 만드는 파렴치한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좋은 나라, 군자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나라가 되기를, 3.1절 아침, 타향살이 중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한다.

Posted by 장준식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 그리고 (목회) 세습 문제

 

경제적 힘이 소수의 손에 있고 그들이 정치적 힘을 그들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한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

ㅡ 라인홀드 니버

 

경제적 불평등이 얼마나 큰 불의를 생산해 내는지 안다면, 요즘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큰 문제가 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종교가 무슨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경제적 힘이 곧 정치적 힘이 된 요즘, 경제적 불평등을 생산해 내는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려 할 것이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주의>에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경제적 불평등은 '세습 자본주의'에서 온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분배되어 개인의 자유가 증대된다고 하는 자본주의 논리가 '세습 자본주의'에 의해서 허물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에서도 한창 논쟁을 벌이는 '목회 세습'의 문제를 경제적 불평등의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목회 세습은 단순히 '목회직'의 세습이 아니라, 자본의 세습이다. 피케티가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의 세습은 개인의 자유를 자본을 소유한 소수에게만 집중시킬 뿐, 대다수 사람들의 자유는 자본에 의해 구속당하고 만다.

 

목회 세습을 통하여 자본의 세습을 이룬 이들은 경제적 힘에서 비롯된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뜻에 맞게 목회 현장을 조작하고 교회 생태계를 혼란시킨다. 세습한 이들이 세습 자본으로 교회의 생태계를 주무르는 한 정의는 묘연해 진다.

 

이것 뿐 아니라, 젊은이들이 보수화되는 현상은 이미 고착된 세습 자본을 놓치지 않으려는 투쟁에서 비롯된다. 피케티가 제시하고 있는 누진세 제도와 국제적 부유세의 도입을 하려면 할수록 정부는 다른 층보다도 젊은 층에 의해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자본이 세습되고, 권력이 세습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 나라의 말기적 현상이다. 고려 말기, 권문세가는 자본과 권력을 세습하여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 갔지만, 그것이 곧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세워지는 기폭제가 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든 '세습'은 고인물이고 곧 썩은 물이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물고기가 살 수 없다.

 

세습의 물꼬를 트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인간은 악하고, 악한 인간이 만들어 가는 사회는 더 악한데, 어떻게 해야 이 악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종교(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통해서 이 악한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수많은 민중을 구원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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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교회 유토피아주의의 위험성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하려 든다. 그들은 '자유' '자본'이 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유일한 기능적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급진주의자들, 곧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들은 자신들이 제창하는 새로운 사회가 사회의 모든 악을 치유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이든 급진주의자들이든 모두 자신들의 관점에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들이 제시하는 사회적 토대가 유토피아를 가져올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주의자들도 이들과 다를 바 없다. 교회 유토피아주의자들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의 방주'이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유토피아에 입성하는 일이고, 교회는 새로운 사회이므로 세상의 모든 악을 치유하고 물리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은 선취이지 성취가 아니다. 선취와 성취를 헷갈리면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맞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신 그리스도의 몸이지,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종말론적 선취라고 말하는 이유는 십자가 사건,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불의가 판을 치고 생명은 여전히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아직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되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너무도 확실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유토피아로 착각하면 안 된다. 여전히 교회는 부족하고, 싸워야 할 악이 존재하고, 채워야 할 고난이 남아 있다. 이것을 안다면, 교회는 스스로의 만족과 스스로의 안위 속에서 평안을 누릴 것이 아니라, 전투를 아직 끝내지 못한 군사로서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말고,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마음을 열고 미래를 준비하는 겸손한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교회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사회의 적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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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와 기독교인들의 오해

 

"신은 죽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선언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우리(인간)가 신을 죽였다"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엄청 불편해 한다. 그리고 니체를 오해한다. 니체는 무신론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부정한 불신자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니체의 ''자도 모르는 무식과 '근대성'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이해의 무지에서 오는 불행이다.

 

'근대(modern)' 또는 '근대성(modernity)'란 무엇인가? 근대의 핵심 키워드는 '인간' '이성'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고 지배함으로, 근대의 세계에서는 이성적이지 못한 것, 즉 이성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발붙이기가 어렵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세계에서 신(God)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아니,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아포리즘을 통해서 이러한 근대의 비극을 꼬집는다. 다시 말해, 니체는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무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근대성을 규정하고 꼬집기 위해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근대는 낭만주의를 꽃 피운다. 근대의 낭만주의는 마치 재산을 챙켜 먼 나라로 떠난, 탕자와 같다. 자신을 구속하던(실제로는 구속한 것이 아니라 돌봐준 것이지만)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의 분깃을 챙겨 떠난 탕자의 삶은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에게는 '자유'가 주어진 듯 싶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낭만적으로, 화려하게, 자유롭게,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 행복이 가득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은 자유와 낭만이 넘쳐난다. '신이 더 이상 자신들을 구속하지 않으니', 근대, 즉 낭만주의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인간중심적인, 이성중심적인 세상에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우리는 다시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은 AD 80년 경에 쓰여진 문서이지만, 탕자의 비유만 보자면, 마치 낭만주의 시대에 쓰여진 문서같다. 거기에는 인간중심, 이성중심의 삶에 대한 경고가 날카롭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탕자가 아버지를 죽은 것처럼 여기고(고대 유대 사회에서 자식들이 분깃을 나누는 일은 아버지가 죽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자유'를 만끽한 것은, 근대에 인간이 이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과 닮아 있다.

 

이성 중심의 근대가 탄생시킨 과학기술 문명을 사는 우리의 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학기술 문명을 더 발달시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신"을 되살려 놓은 일이다. 이것은 이성 중심의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이 괄시해 왔던 '//'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종교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과학기술 문명의 세계, 이성이 끝까지 간 세상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인간의 지속적 존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삶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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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인 온누리교회가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이재만 씨를 불러 교사교육을 시키는 행사를 두고 논란이 심한 모양이다.

 

마르크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비판은 종교의 비판에서 시작된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종교가 항상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를 만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종교를 등에 업은 과학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창조과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과학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은 '성서적', 즉 종교적이고, 현재 과학계에서 말하고 있는 주장을 넘어서는 절대성과 궁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확신에 있다.

 

이것만큼 큰 교만도 없다. 건전한 과학계에서는 자신의 발견을 확신하거나 맹신하지 않는다. 그것을 종교적 이상으로 끌어 올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인양 말하지 않는다. 과학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이다. 그래서 과학은 모든 것을 '가설'로 상정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 열린 결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창조과학은 '과학'을 표방하면서 과학계가 지니고 있는 '겸손'의 덕목을 지니지 못하는 것인가.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말처럼, 종교를 등에 업은 창조과학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온누리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창조과학을 종교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오면 안 된다. 그리고, 창조과학을 소개했다면, 그와는 다른 시각을 지닌 현 주류 과학계의 입장에서 창조에 대한 해석도 동일하게 소개해야 할 것이다.

 

건전성과 열린 결론을 견지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혹한 비판에 직면할 뿐이다. 종교는 그 존재가 신과 동일하지 않으며 신의 육화도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진리를 향해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지, 진리를 담지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 그러한 겸손이 없는 종교는 폭력일 뿐이고, 인간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악마의 도구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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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적 비극과 디오니소스적 비극

 

비극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비극'을 생각하면 '슬픈 일'을 떠올린다. 가령 누군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쓸쓸한 최후를 맞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비극은 가련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일'이나 '가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의 작품 속에는 '비극'에 대한 정의가 매우 잘 드러나 있다.

 

가령,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보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눈을 피해 불을 인간에게 전해준 일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평생 간을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다. 이것은 비극이다. 그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행한 일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신에게 반항하거나 보다 높은 의무로 생각되는 것 때문에 역사적 도덕성의 어떤 법에 위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고통 받는다. 그는 그의 강함, 바로 그 때문에 패망한다."(니버, 기독교와 비극)

 

비극이 발생시키는 요인은 인간의 상상력과 정신력이다. 인간에게 지워진 운명을 넘어서는 상상력,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력이 인간에게 비극을 가져온다. 아니, 그것 때문에 오는 어려움을 '비극'이라고 부른다.

 

비극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 비극이다.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것을 상상할 때 발생하고, 디오니소스적 비극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 아래 있는 무의식의 세상을 상상할 때 발생한다. 이 두 비극의 공통점은 그 상상력이 기존의 도덕적 체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한다. 그리스 비극은 비극의 발생까지만 이야기를 하고 그친다. 사람들은 그 비극을 바라보며, 그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인지(그 주인공은 영웅이라 불린다), 아니면, 그냥 기존의 도덕적 체계에 순응할 것인지를 결정할 뿐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 비극을 넘어선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비극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버는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비극적이 아니고 비극의 해결이다"(기독교와 비극).

 

왜 십자가는 비극의 해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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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담이 첫째 아담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다

 

인간은 첫째 아담이다. 우리는 모두 첫째 아담의 후예이다. 첫째 아담의 후예는 카인의 후예라고도 불린다.

 

첫째 아담의 실존은 ''로 규정된다. 죄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죄는 인간의 본질에 섞여 있는 타락으로 보지는 않는다. 인간은 선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함에는 어떠한 죄성이 섞여 있을 수 없다.

 

죄는 인간의 선함을 자꾸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이다. 문제는 인간이 선함을 무너뜨리는 외부의 힘에 자꾸 끌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죄성'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나름대로 죄성에 저항한다.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이것을 ''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선함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의 의로운 활동(행동/의지)에는 인간 스스로 감지할 수 없는 불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아담 예수는 위와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첫째 아담들에게 수난을 당했다. 예수를 핍박하고 그를 십자가에 매단 첫째 아담들은 소위 말해 '악당들'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다. 그들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존경을 받던 계층이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로 무너져 가던 유대인들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었던 대제사장, 서기관 등의 그룹 또한 자기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유대 민족의 생존을 지켜나가던 '선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관원들도 불한당들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해 '로마의 평화'를 지켜내려던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모두 같은 마음으로 두번째 아담인 에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까? 이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것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해석은 이렇다. "모든 인간적인 의가 의롭지 않은 것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의로운 자들의 죄로 인해서 (예수는) 수난을 당한다"(수난의 종과 인자).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선함을 지켜내려 하고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선함을 무너뜨리는 죄를 견제하기 위하여 어떠한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행위들 자체 속에 불의가 가득하다는 것을 첫째 아담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선하다고 말하고, 그 선함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선을 세우기 보다 오히려 선을 무너뜨리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께 다가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그를 꾸짖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0:17,18).

 

첫째 아담인 인간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선함을 지켜나가고 드러내려고 하면할수록 그곳에서 '불의'가 발생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기독교는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로 불리는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향 전환'을 일컬어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며, 그것은 두번째 아담이자 인자, 즉 이전의 타락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는 메시아를 '믿을 때' 가능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선함도 결국 전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메시아의 의로움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만이 모든 불의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아담인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당당하게 둘째 아담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가. 마치 나는 선함을 지켜내는 무슨 투사라도 된 듯이 말이다. 나의 선함이, 선하고자 하는 그 의로운 행동이 얼마나 많은 불의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메시아/인자) 앞에 나아와 납작 엎드려야 할 것이다.

 

"주님, 나는 선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선하십니다. 나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 교만한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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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

 

인간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를 받고, '너와 같지 아니함'에 절망한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서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어떻게서든 나를 상대방과 같은 사람으로 끌어올리려 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질투이고 자기 과장이다. 인간의 행복은 이것의 성취인양, 세상은 속이고 또 속인다.

 

진리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보편성만 강조하고, 진리의 개별성을 간과하면, 진리의 보편성은 사람들의 손에서 폭력이 되고 만다.

 

기독교(종교)는 수없이 이같은 잘못을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표지중 하나가 교회의 보편성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한다. 이때의 보편적인 교회는 '교회가 진리다'는 보편성을 말한다.

 

보편적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은 구원이 확보된다. 그래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명제도 성립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생산해 내었는가.

 

인류의 사상적 싸움은 '진리의 보편성'을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진리의 개별성'을 진리의 보편성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진리의 보편성에서 오는 폭력이 너무 과도하기 때문에 진리의 개별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함이 인간의 사상사에는 배어 있다.

 

진리의 보편성의 폭력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던 시대는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시대이다. 그때 기독교는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는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았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고통 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교회의 자비에 매달렸다.

 

그 병폐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화형에 처해졌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오캄이 있다. 그는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진리의 보편에 맞서 진리의 개별성을 주장한 전통에 서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서 발견되는 정말 신기한 일은, 개별성은 보편성으로 환원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세워진 개신교가 진리의 보편성 아래 저지르는 수많은 폭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매우 고무적인 사람이다. 그는 진리의 보편성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의 개별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실존은 보편성과 전체성 때문에 무시당하고 고통당하기 십상이다. 그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고 있듯이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실존을 성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한다. 존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존재가 존재가 되는 길은 하나님처럼 '나는 나다'의 정체성을 견지할 때만 가능하다.

 

나는 나다. 그러니, 상대방이 나와 같지 아니함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가 그로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나는 나다. 그러니, 나를 상대방처럼 만들기 위해서 나 자신을 달달 볶지 말아야 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기를 포기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라인홀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를 세 종류로 나눈다. 1) 기독교 정통주의, 2) 자유주의적 기독교, 3) 예언자적 기독교

 

이 중에서 니버는 '예언자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킨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 정통주의는 예수를 역사와 분리시키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상적 인간으로 보며 이 세상에서의 낭만주의적 이성의 부활을 꿈꾼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 정통주의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것 같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합리적 이성주의 영향 아래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기독교 정통주의는 기독교 우파이고,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기독교 좌파처럼 보인다. 니버는 이 두 개의 기독교 전통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잘 분석하고 있다.

 

니버가 취하고 있는 예언자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세상을 분석하는 시각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폴 틸리히가 독일에서 망명하여 유니온 신학교로 온 이후로, 니버의 사상은 틸리히의 영향 아래 더 깊어지는 것을 본다. 그 궤적을 따라 가며 니버의 사상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다.

 

특별히 니버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데, 그는 공산주의의 악마적 요소들을 잘 분석한다. 특별히 그들이 인간의 본성적 죄를 얼마나 쉽게 간과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물론 니버는 마르크스주의가 보여주는 좋은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니버는 세상 속에 있는 '악마적 신비'를 끊임없이 지적한다. 이것은 이성의 제한성과 인간 마음의 부정직, 즉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성'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이것을 간과하면 인간은 결국 불행해질 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적 삶에서는 무한의 옷자락에 닿는 것 같은 인간이 여전히 유한성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인간이 그 유한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할 때 그의 삶에서 악을 증대시키지 않는 지점이 역사와 사회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접하는 도덕적 명령 속에 있는 가능한 것을 아는 것만큼 불가능한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An Interpretation of Christian Ethics, 82-83).

 

니버는 참 열정적이고, 건전하고, 경건하고, 좋은 학자이다. 니버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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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의 중요성

 

무소유. 불교 승려 법정이 주장해서 유명해진 개념이지만,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도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6:31, 32). 또한 예수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했다. 하나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단순히 재물의 부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 집중, 또는 자기 초월이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과장하고 확대해서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 기독교는 이것을 ''라고 칭한다.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자기'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가능한 일을 하려다 절망에 빠진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렀다.

 

인간이 '자기 확대'를 위해 자연적(naturally)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소유'를 늘리는 일이다. 인간은 소유를 통해서 자기 확대를 시도한다. 가진 게 많으면 '자기'를 벗어나 '위대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기 집중과 상대방에 대한 착취나 배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 자기 확대를 시도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자기의 생명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까지도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무소유를 검소한 삶이라든지 욕심을 초월한 삶 정도로 도덕화시키면 안 된다. 무소유는 인간 존재,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투쟁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기' 안에서 만족하며 살줄 아는 겸손이 필요하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유' 때문에 '자기 확대'가 일어났다고 생각이 들면, 살고자 하는 자는 그 '소유'를 아낌없이 내다버려야 한다. 생명이 소유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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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결핍이다

 

죄는 결핍이다. 결핍된 존재는 자기 상승을 꿈꾼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죄를 일컬어 '자기 집중'이라 불렀다.

 

결핍된 존재는 자기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기 집중은 주변의 다른 것들을 모두 상대화시키고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상승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죄는 필연적으로 배제와 폭력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다.

 

죄의 권세에 눌린 자들은 인정투쟁에 끊임없이 휘말릴 수 밖에 없다. 죄를 짓게 하는 권세를 지닌 사탄(마귀)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닌 세상 나라의 가치를 제시하며 그것을 통해서 존재의 결핍을 메울 수 있다고 부추긴다. 속임수에 능한 사탄과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죄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온통 결핍을 메우기 위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거룩이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결핍된 존재는 결코 거룩할 수 없다.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결핍에서 벗어나 거룩(완전한 전체)에 이를 수 있을까?

 

인간이 절망하는 이유는 사탄이 제시하는 것을 쫒아가다 그것으로 존재의 결핍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절망에서 돌아서지 못한다. 너무 멀리 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가련하다.

 

존재의 투쟁은 결핍을 메우기 위한 투쟁이다. 존재는 결핍을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결핍을 메워보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는 하루가 멀다하고 방황한다.

 

존재의 결핍을 극복한 상태가 부활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핍된 존재가 그토록 염원하던 결핍의 극복의 길을 그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핍된 존재가 부활의 신비를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활은 깊숙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을 경험한 증인들(사도들/제자들)이 조바심을 내며 열심히 그 비밀을 알리고 다녔으나,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그 비밀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역부족인 듯 싶다.

 

그래서, 교회가 할 일이 아직 산더미다. 그런데, 증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산더미 같은 일을 잊은 채, 잠 자고 있던지, 놀고 있던지, 아니면 나쁜 짓 하느라 산더미 같은 일을 처리하고 있지 못하는 듯 싶다.

 

세상은 어둡고, 할일은 많다. 나의 동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동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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