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회, 오리엔트 정교회, 동성애 문제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라는 기독교 교파가 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파이다. 이들은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 서아시아,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토착적으로 발전한 기독교 종파이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기독론'이었는데, 기독론 논쟁의 핵심은 '신성과 인성이 한 실체 속에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의 기독론이 전개된다.

 

첫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이다. 이들은 예수의 신성와 인성을 편지지와 봉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인성인 봉투가 신성인 편지지를 끌어 안고 있다는 것이다. , 예수의 인성 안에 예수의 신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예수를 완벽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형태의 가현설로서 예수의 죽음으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구원할 수는 있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래서 이 생각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된다.

 

둘째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이다. 우리에게는 '경교'라고 알려진 종파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 분리 구별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연합(union)' '결합(conjunction)'용어가 사용되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되었다고 본다. 두 본성의 실체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실체 안에 두 본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상대 진영에 서 있었던 악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에게 공격을 당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31년 에베소 공의회가 열리는데, 네스토리우스는 이곳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 회의를 주관했던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한다. 네스토리우스의 생각은 신학적 단점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대결 때문에 단죄된 부분이 많다.

 

셋째는 키릴리우스 파였던 유티케스주의이다. 이들은 기독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물과 포도주의 비유를 드는데, 물과 포도주가 섞여서 혼합되어 새로운 것이 되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섞여 그리스도가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예수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게 함께 있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단성론이라고 한다.

 

이들의 생각은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단죄된다.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케스주의 모두를 단죄한다.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론이 정착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실제로 연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교리가 정착된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기독론을 표현하는 방식은 동방교회의 전통인 부정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독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하면 거기에는 반론이 제기되기 쉽기 때문에, 부정신학의 형식으로 '무엇이 아니다'의 방식을 통해서 옳지 못한 생각들에 대하여 저항하는 방식으로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다. 다음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부정신학의 방식으로 서술한 기독론이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 분의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칼케돈 공의회의 결의를 거부한 키릴리우스파(유티케스주의자들/단성론자들)는 칼케돈 공의회(451) 이후에 독자적으로 기독교를 발전시킨다. 그것이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이다.

 

교회의 공적인 회의(공의회)는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모임이다. 교회 공의회는 그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기능도 있지만, 합의된 교리를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을 생산해 내는 역기능도 있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교회사에서 겪었던 이러한 문제를 반복해서 겪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 문제이고, 대표적인 교단이 미연합감리교회이다.

 

미엽합감리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합의된 신학적인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하기 위해서 무단히 애를 쓰고 있다. 그리고 곧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이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을 도출해 내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집단들이 반드시 생기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열린 마음이다. 우리에게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해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오리엔트 정교회가 낯설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정죄할 수 없듯이,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합의된 교리와 교회법에 반기를 든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이단 취급하는 것은 편협한 마음일 뿐이다.

 

교회사가 최종원은 공의회를 통한 교리의 발전사를 서술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발전은 성서 텍스트뿐 아니라, 언어/문화/사상 등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정통과 이단을 몇 가지 기준으로 간편하게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하고 위험한 것인가 알 수 있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305).

 

모든 사람이 한 배에 타고 갈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배로 갈아타야 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더라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다. 바다는 넓고 아직 목적지에 우리는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탄 배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서로 이해하고 돕는 것이다. 내가 탄 배만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고, 다른 배들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침몰하고 만다면, 나의 구원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리콘밸리의 철학  (0) 2019.10.19
대형교회는 왜 위험한가  (1) 2019.10.18
나무를 사랑한다면  (1) 2019.09.24
I am OK  (0) 2019.09.22
용서의 근본적 필요성  (0) 2019.09.22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