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근본적인 필요성

 

요즘 저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는 능력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모든 새로운 세대에 걸쳐 값을 치러야 하는 과거의 행위를 구제한다. 예수의 표현은 훨씬 급진적이다. 복음서는 신이 인간을 용서하기 때문에 신과 같이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신도 그와 같이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위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

 

한국에 방문해서 보니, 한국의 추석 문화가 많이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옛날에는 추석 때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 성묘를 갔었습니다. 각자 집에서 음식을 해서 바리바리싸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혀 계신 곳에 가서 음식을 풀어놓고 먹으며 가족애 가운데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묘의 풍경이 많이 사라진 듯합니다. 일단 요즘은 대부분 화장(cremation)을 하기 때문에 묘가 없습니다. , 가족이 모두 모일만한 장소가 없는 것이죠. 또한 뉴스를 보니 추석명절을 맞아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인구를 5천만으로 봤을 때, 산술적으로 1천만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혼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지요. 대단한 숫자입니다. 그만큼 사회의 공동체성과 가족애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절 때가 되면 공항이 붐빕니다. 성묘 가는 것보다 여행을 택하는 가정이 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절의 풍경과 용서가 무슨 상관관계에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용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살아도 밥 먹고 사는 데 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 문서(성경 포함)에 용서가 최고의 가치로 서술되고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과학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때에 농사짓는 일은 인간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미워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죠. 그래서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협력하기 위하여, ‘용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삶의 기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상대방이 없어도 생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을 용서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용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구조가 되다 보니, 용서의 가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란 구시대 유물이 되어 가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조건을 망가뜨리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현대인들을 외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용서의 부재입니다. 상대방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사회구조와 생각 자체가 용서의 필요성을 없애고, 실제 삶에서 용서의 가치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들의 삶은 더 외로워져만 갑니다. 물론 상대방이 없어도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나와 똑 같은 인간의 따스한 말과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터치가 없으면, 인간의 내면은 메말라 갑니다. 용서의 부재는 그 터치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현대인은 잘 먹고 잘 산면서도 그렇게 외로워합니다.

 

성묘를 같이 가야 하는데,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풀지 않고 성묘를 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가족끼리 서운한 것이 있더라도 성묘를 준비하며, 또는 성묘 가서 조상님들 앞에서 밥상을 차려 놓고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이루고 서로의 삶을 터치해 주었습니다. 그 프로세스가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용서의 자리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성묘를 번거롭게 여길 뿐 아니라, 성묘할 수 있는 장소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행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는 행위가 더 필요한 것이고, 용서의 가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소중한 인간의 조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살아가는 데 상대방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기독교적인 용어로,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상대방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용서의 가치가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행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모두 모르고 하는 것이지요. 모르고 한 일 때문에 상처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용서해주는 것 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그렇게 용서한다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게 구원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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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