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리를 생각하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 안에 있는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요한계시록 1:9).

 

요한이 하고 있는 '형제/자매'라는 자기 규정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환란을 당하면서도 인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누군가와 동일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다. 그 사람이 환란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은 고난 당하지 않으면서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은 공허하다.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동일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며 그들을 동정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신앙일 뿐이다.

 

요한은 밧모 섬에 있다. 그는 유배 중이다. 그곳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요한은 그곳에 기꺼이 머문다. 유배를 유배라 여기지 않는다. 그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유배를 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는 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현재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좋은 자리에 가도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날마다 물어야 한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있는 자리는 벗어나고 싶은 유배지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밧모 섬 같은 은총의 자리인가.

Posted by 장준식

외로움을 극복하는 법

 

그는 "외로움은 주관적 고통"이라며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 사이의 차이가 바로 외로움"이라고 강조했다.

ㅡ 딜립 제스트 박사, UCSD 교수, 국제노인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한 내용 중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차이를 좁혀 나가는 것이 외로움을 덜어내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제스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지혜의 수준과 외로움 사이에 역학관계가 있다고 한다. 지혜가 많은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끼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은 외로움을 더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혜가 외로움을 막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다며,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경의 대표적인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1:7).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그리하라"( 12:7).

 

이것이 종교적인 언어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매우 실존적인 언어이다. 제스트 박사가 신기해하고 있듯이, 지혜는 외로움을 덜어내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강제성을 띠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자기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실존적인 언어를 종교적인 언어로 바꾸는 이유는 종교의 힘을 빌어 실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절실함이 스며든 지혜이다.

 

인간은 외롭다.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 언제나 괴리와 부조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자아 사이의 일치를 꾀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이다. 그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창조주를 기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지혜란 끊임없이 우리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하는 일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기억할 때, 우리의 존재는 조만간 세상에서 없어진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인간은 헛된 꿈을 꾸지 않으며, 이데아의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하려 드는 무모한 삶을 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인생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내가 원하는 사회적 관계와 내가 누리고 있는 사회적 관계는 얼마나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 나는 혹시 헛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나는 혹시 잘못된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결국, 원하는 것이 없으면 외롭지 않다.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가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상태이다.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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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한국의 선교적 위치

 

이사야 19장은 한국 교회의 선교적 비전을 보여주는 신비한 말씀이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폈던 것처럼, 요즘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난도 외교를 펴고 있다. 현재 한국은 중국보다는 미국과 더 가까운 동맹을 맺고 있지만, 앞으로의 국제 정세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아 그 어느때보다 민족적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사야 19장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앗수르 세력에 맞서 살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 대신에 애굽의 힘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굽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이 오판하지 않고 나라를 지켜 나가게 하기 위함 하나님의 지혜다. 특별히 이사야 19장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이 구절이다.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은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16).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만군의 왕이시다. 그 분은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 ‘흔들다(테누파)’는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는 요제와 같은 뜻이다. 레위기의 제사법 중 요제라는 제사법이 있는데, 이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흔들어서 드리는제사를 말한다. 제사장이 제물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흔드는 이유는 그 제물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애굽 위에 손을 흔드신다는 것은 애굽도 하나님의 것이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이다. , 애굽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힘이 세지 않다.

 

개인이든 국가든 살아가며 주변의 힘 센존재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국제정세 가운데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주변의 힘센 나라에 의존하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특별히 한국은 5천년 역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중국에 많이 의존하였다. 한국이 미국에 의존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벌이고 있는 무역 전쟁은 세상을 편가르기 하는 것 같다. 이사야 시대에 앗수르 세력과 반앗수르 세력(애굽과 구스 등)이 맞선 것과 같은 격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의 이동통신 기업 화웨이의 CFO 멍완저우를 체포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화웨이가 대이란제재(sanction)를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내면적인 이유는 IT 업계에서의 중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있다. 미국의 우방은 미국과 행보를 같이하여 국내 통신기술 시장에서 중국의 화웨이를 퇴출시키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한국의 LG 그룹은 미국의 우방들의 행보와는 달리 5G 통신망에 화웨이 제품을 쓰겠다고 공표하여 뭇매를 맞고 있다.

 

큰 나라들의 전쟁이 노골화되면 작은 나라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아야 한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한국이 딱 그렇다. 이런 상황에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사야 19장은 그에 대한 지혜를 주고 있다.

 

나라가 어렵고, 시대가 어렵고, 국제정세가 어려울수록 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지혜를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이사야 19장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더 힘 센 나라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힘 센 나라들을 그 발 아래 두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 땅의 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을 의지해야 한다. 한국은 실제적으로 미국도 중국도 너무 믿지 말아야 한다. 이 땅의 힘을 의지하다가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이미 한국은 그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가 판을 칠 때, 제국을 표방한 나라들은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조선은 그 당시 일본의 표적이었는데, 각 제국들은 자신들의 표적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간에 협약을 맺는다. 그 당시 고종 황제는 러시아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물리치고,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간섭을 물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 밀약을 맺은 이후, 미국은 한국에서 영사관을 물렸고, 일본은 조선통감부를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최고 우방이지만, 역사를 볼 때, 자신의 이익과 관련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최근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미 사드 배치문제로 한국 기업(롯데)에 대한 제재를 시행한 이력이 있다. 이렇듯 땅의 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

 

이사야 19장은 앗수르와 애굽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앗수르와 애굽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나라가 되고, 그들은 서로 왕래하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거라고 한다. 이사야는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24)는 말씀을 선포한다.

 

한국(교회)이 거대한 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나라들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협력하도록 기도하며 선교의 고삐를 놓치 않는 것이다. 특별히 중국은 아직도 신앙의 불모지와 다를 바 없다. 기독교는 중국 영토 내에서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중국인들을 향한 복음 전도의 길은 매우 위험하고 험난하다.

 

중국 선교의 한 방법은 미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중국교회가 많이 존재 한다. 그들의 신앙은 한국의 7,80년대 신앙처럼 뜨겁다. GTU에서 공부하는 한 중국 친구는 중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오듯 왔다고 고백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선배 격인 한국(이민)교회는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나라가 되도록 중국(이민)교회와의 협력을 통해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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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요한계시록 개론서, <십자가와 보좌 사이>를 읽고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요한이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밝힘으로써 요한계시록을 보다 접근하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것”(116)이다. 책은 요한계시록을 문학으로 읽을 것을 요청한다. “만약 우리가 요한이 사용한 방법들(문학적 장치들)을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읽기를 꺼려하는 책이거나 현대의 예측 차트가 아닌 본래 목적의 그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언으로 보일 수 있다”(18).

 

저자는 저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문학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해 나간다. 책은 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첫 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는 방식이 아닌 5개의 소주제(구속의 드라마 /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서술 /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서술 / 어린양의 전쟁 /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와 대조하면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는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와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과 불신자들의 행동은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분리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신실하고 정결하지만,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의 기만에 속아 넘어간 불신자들은 추하고 악한 일들을 통해서 사탄에게 신실하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요한은 발생반복(recapitulation/재현)’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구약성경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뚝 덜어진 문서가 아니고,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문서라는 뜻이다. 구약과의 연장선 상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고, 하나님이 아실 일에 대한 소망의 기록이다.

 

개론서라는 지면의 제약상 저자는 모든 문학적 비유를 세세히 풀어내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을 본래의 기록 목적에 합당하게 해석하도록 돕기에 충분하게 풀어낸다. 특별히 요한이 왜 7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는지(7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보편을 나타낸다), 또한 왜 6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짐승의 숫자를 만들어 내는지(6은 인간의 숫자이고, 7이 아닌 불완전한 숫자이다)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저자는 하나님의 대적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왜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맞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조롱하는지를 비교적 자세히 밝힌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주로 참고한 학자는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G. k. 비엘(G. K. Beale)이다. 두 학자의 책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것은 이 책의 개론적 설명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보컴과 비엘은 요한계시록 연구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은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적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에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탄압방탕이 개인들의 행동 속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된 것을 환기시키면서, 주류 문화와, 정치권력에 맞설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미국이 잘못한 옛일(Jim Crow )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갈 뿐, 현재 미국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지면의 제약상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신기하고 안심되는 점, 그리고 책에 대한 신뢰를 할 만한 또다른 점은 저자가 삼위일체 사역 뿐 아니라 전례(Liturgy/예전), 그리고 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이례적이다. (물론 미국의 학풍은 한국의 학풍과는 달리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가 그러한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적으로 배우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형성되기때문이다(109).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나 쾌락, 거짓 예언과 마주할 때, 여전히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믿는 이들을 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만찬의 중요성과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말씀 선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특별히 저자가 말하는 성만찬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다”(112). 저자는 말한다. “기억과 소망, 이 두가지 모두는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113). 세례도 말씀 선포도 모두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한 전례들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소망한다. 그래서 책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십자가와 보좌) 사이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믿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일에 대한 감춰진 코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소망의 복음이다.


Posted by 장준식

시간과 교회력

 

수많은 위인들이 시간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 그만큼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간에 대한 명언 중, 나의 가슴에 가장 남는 명언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남긴 이것이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같은 개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광고계의 전설 데이비드 오글비(David Ogilvy)의 일화도 유명하다. 뉴욕 거리에서 한 맹인이 이런 문구를 들고 구걸하고 있었다. “저는 맹인입니다. 도와주세요! I am blind. Please help!” 오글비는 그 문구를 이렇게 바꾸어 주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네요. 하지만 전 볼 수가 없네요. It’s beautiful day, but I can’t see it.” 그 이후, 뉴욕의 맹인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명언은 대개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야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성경은 시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까? 대표적인 예로 에베소서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시간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5:16). 언뜻 보면, 이 말도 다른 여느 시간에 대한 명언처럼 시간을 아끼는 것에 대한 말 같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번역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시간을 아끼라라는 말에서 아끼다의 헬라어는 엑사고라조이다. 이는 구해내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시간을 구해내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멋진 말이다. 시간을 구해내다. 시간을 해방하다. 시간을 자유케 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단순히 아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력은 교회의 행사력이 아니라 구원의 시간이다. 그리스도인의 몸인 교회가 교회력을 쓰는 이유는 교회는 구원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공동체는 세상의 시간을 살지 않고 구원의 시간을 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상 사람은 달력으로 11일에 새로운 해를 시작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대림절(Advent)에 새로운 해를 시작한다. 대림절은 희망의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은 대림절에 구원자(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린다. 대림절에 그리스도인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고백된 그리스도가 이미 왔다는 것을 고백함과 동시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뒤,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 그리스도가 이제 곧 다시 오길 것을 고백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다림의 종교다. 그 기다림은 헛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시간과 같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된 시간 안에서 산다. 시간을 아끼는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구원된 시간 안에 사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셔서(성육신 하셔서) 시간을 구원하신, 시간 너머에 계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물 뿐이다. 구원된 시간 안에 머무는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준다. 아낌 없이 내어준다.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사람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를 위하여 시간을 아끼는 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머물지만,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시간을 내어주는 자는 이미 구원 안에 머문다


시간을 아끼지 말고 시간을 내어주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가 또다른 어떠한 구원이 필요하길래 시간을 아끼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은 자는 다른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아낌없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 아낌 없이 내어주는 시간이 또다른 구원을 낳을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파괴와 평화

 

2차 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43, 미국에서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는 뉴 멕시코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New Mexico), 프로젝트 책임자는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였다. 이들이 만든 것은 원자 폭탄이었고,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폭파 시험을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용어가 인류 최초의 대량 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쓰인 것은 비극일까 희망일까. 1945716일 새벽, 원자 폭탄 폭파 시험에 성공한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제 우리 모두는 미친 사람이 된 거야!”

 

어떤 신학자는 그들이 대량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트리니티의 용어를 가져다 쓴 이유를 자신의 흔적을 감추어 죄의식과 양심을 숨기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원자 폭탄 실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대량살상 무기 개발에 기여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했는데,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개발은 언젠가 전쟁이 아니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희망하였다. 어떻게 파괴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가?

 

오펜하이머의 희망은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된 망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사야서 17장에는 다메섹(아람)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져서 양 떼가 지나가다가 몸을 뉘어도 아무도 그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17:2, 우리말성경).

 

여기서 아로엘은 아람의 통치가 미치는 최남단의 도시 이름이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진다는 말은 아람의 모든 영토가 철저하게 파괴된다는 뜻이다. 그곳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고, 양들이 살게 되는데, 양들이 그곳에서 몸을 뉘어도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엔 마하리드, ‘평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2절 전체를 다시 해석해 보면, 철저하게 파괴된 다메섹에 평화가 온다는 뜻이다.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파괴가 되었는데, 어떻게 평화가 오는가? 파괴가 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가?

 

우리는 이 구절을 신앙의 역설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읽어야 한다. 물론 실제 삶에서도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목격할 수 있다.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곧바로 원자 폭탄 생산에 들어가, 한 달 여 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터뜨린다. 그 대량 살상 무기를 통해 일본의 두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는 너무도 비참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파괴와 평화는 메타포로 읽는 게 좋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활동한 영국 국교회의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거룩한 시편(Holy Sonnets) 열 네번째 시를 보면, 파괴를 통한 평화, 파괴를 통한 구원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렇다.

 

삼위 하나님이여 / 내 마음을 부수소서!

당신을 위하여 / 내 마음을 두드리소서.

주님의 숨으로 나를 들이 마시고, 내게 빛을 비추어

고쳐주소서.

내가 일어서도록 나를 꺾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새롭게 하소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한다.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이것은 참 역설적인 표현이다. 나 자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때, 나는 새로워진다. 파괴가 평화를 불러온다. 사실, 인간의 존재가 그 누구에게도 위협(놀라게 하는 것, frighten)이 되지 않는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내가 파괴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화를 가져온다.

 

다석 류영모는 이 역설을 깨닫고 몸소 실천했던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다석(多夕)은 저녁(, 죽음)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처럼, 밤이 되면 널판자를 깔고 거기에 누워 죽음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죽음의 실존을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없는 듯 있는 사람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한 끼만 다른 생명을 취해 먹고, 나머지 두 끼는 자기 살을 먹었던 것이다.

 

이사야서 17장은 파괴와 평화의 역설을 말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날에 사람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눈을 맞출 것이다.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제단은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 상이나 태양 기둥은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17:7-8).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신뢰의 태도를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신뢰한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나 이룬 것은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손을 신뢰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뿐이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이것을 깨닫고, 오직 자기를 지으신 이만 신뢰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평화의 상태이고, 이 평화는 파괴를 통해서 온다. 파괴와 평화의 역설이 심장을 찌른다.  


Posted by 장준식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의 한국인의 역사적 맥락

 

193269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안창호)23세 때 경성에서 지금 부인과 혼인해서 유학의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간 후 얼마 안 되어 개발회사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늘었으나 민족적 통제기관이 없었음으로 건너오는 동포들이 타락의 구렁으로 빠지기가 쉬웠다. 이에 도산은 학업을 중지하고 다 쳐서 50여명밖에 되지 않는 동포들을 모아 친목회의 산하에 규합해서 생활 향상에 노력했고개발회사를 통해 도미하는 동포의 지도와 직업 소개에 몰두한 결과 미국인의 조선인에 대한 신용이 두터워졌다.”

 

안창호가 미국에 유학 온 때는 1902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이다. 안창호가 미국으로 유학을 나와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이미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가고 있었던 50여명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삶을 돌본 지역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이다.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 현재 한국인은 1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 한인들이 이곳에서 굶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한인들이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잘 가꾸어 갈 수 있는 초석을 놓은 사람이 안창호이다.

 

1930년대에 안창호의 제자 중 한 명이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으로 유학은 나왔다. 그가 다닌 학교는 버클리 소재 GTU(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 소속 학교 중 하나인 PSR(태평양신학교)이다. 그는 PSR에서 학업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가 목회자가 되었고,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그가 쓴 소설은 <화수분>인데, 그는 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김동리, 주요한과 함께 한민족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했고, 1935년에는 기독교 잡지 <새사람>을 창간하기도 했으며,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내 진정 사모하는>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소설가이자 목회자,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서 살면서 한국인의 계몽을 위해서 힘썼는데, 그가 바로 전영택이다.

 

안창호는 교민 사회를 돌보며 교민들에게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하고, 좋은 교회를 찾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는 교민들을 돌보며 교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썼는데, 이러한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미국의 과수원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의 이러한 노력은 농장의 수입을 올렸고 한인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높여 주었다. 그리고 한인 교회는 안창호의 그러한 노력을 높이 치하했다.

 

안창호와 전영택은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안창호는 장로교 교인이었고, 전영택은 감리교 목사였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삶의 실천으로 옮기며 살았다. 특별히 안창호는 교육자로서 기독교 신앙의 바탕 위에서 사랑의 절대 가치를 실천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실과 정직이 몸에 밴 사람으로 개조하려고 노력했으며, 대한독립의 소망에 가치를 두고 이웃 사랑과 나라 사랑에 온 삶을 바쳤다.

 

안창호는 당시 한국 교회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선교사들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일제의 지배를 기정사실의 민족 현실로 받아들일 것에 대하여 신앙 지도를 했으며, 한인 기독교인들이 사회적/민족적 죄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고 개인적인 죄에만 집중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때,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죄를 자복한다 하여 울부짖고 땅에 구르는 것을 보고 안창호는 이렇게 한탄했다.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2007, 한국에서는 Again 1907년을 외치며, 평양대부흥운동 때처럼 회개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회개운동은 무엇을 위한 회개 운동이었나. 회개한 한국 기독교가 왜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안창호가 작금의 한국 기독교를 본다면, 똑같이 한탄할 것이다.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서 교민들의 생활 향상에 힘써 교민들이 이곳에 잘 정착하기 시작한 역사가 벌써 10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는 지금 100년이 넘은 한인 이민 역사의 한 자락을 채우고 있다. 우리는 개신교인이고 한국인으로서 모두 안창호의 후예들이다. 안창호의 후예로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지키며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돌보아 주며 생활 향상에 힘쓰고 있는가.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하여 사랑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고, 삶의 자리에서 성실과 정직으로 무장하여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사는가.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 할 것을 권고하며 좋은 교회(우리 세화교회?)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에서 한인으로서 사는 우리의 역사적 맥락은 안창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안창호처럼, 전영택처럼 기독교 정신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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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외롭게 두지 않기

 

최근 ‘노인의학 저널: 심리과학(Journal of Gerontology: Psychological Sciences)’에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의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게재되었다(조선일보 기사). 그 연구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일수록 치매를 앓을 확률이 높다. 외로움은 치매 확률을 40% 증가시킨다. 이 연구가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큰 표본을 장기간 추적했다는 데 있다(12030명을 10년간 추적). 표본에는 성별, 인종, 종교, 교육 수준, 친구 및 가족과의 사회적 접촉 등의 요소가 고려되었다. 외로움이 치매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외로우면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여기서 관계는 세 가지의 관계를 말한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타인과의 관계이고, 셋째는 절대 존재(하나님)와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관계가 단절되면, 인간은 외로움을 느낀다.

 

대개 사람들은 외롭지 않기 위하여 두 번째의 관계, 즉 타인과의 관계를 잘 맺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현대인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려고 타인을 모방한다. 같은 패션, 같은 말투, 같은 생각 등,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타인과의 연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부단히 증명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첫 번째 관계,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외로움을 불러온다. 타인과의 연대를 부지런히 증명하다 보니,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상실한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혼자 있는 시간에 인터넷이라도 해야 한다. 스마트폰을 손에 붙들고 있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에 압도당해 불안해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절대 존재(하나님)과의 관계로 잘 못 맺는다. 생각이 온통 밖으로 향해 있고,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로 영혼의 중심을 채우고 있으니, 절대 존재와 직면할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 보니 현대인들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해져 가기만 한다.

 

현대인들 중에서 치매 환자가 증가하는 이유는 오래 살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관계의 빈곤함, 즉 외로움 때문에 그런 것이 크다. 치매는 노인에게만 오는 질병이 아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에게도 치매가 온다. 그만큼 요즘 시대는 노인이나 젊은이나 가릴 것 없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김상중은 그의 책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악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말한다(85). 그는 에리히 프롬의 생각을 빌어, 인간 존재에는 죽음을 추구하는 요인인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와 삶을 추구하는 요인인 바이오필리아(biophilia)’, 두 개의 인자가 있다고 말한다(116). 여기서 전자는 악을 말하고, 후자는 선을 가리킨다. 전자는 죽음, 파괴, 폭력을 향한 인자이고, 후자는 생을 향한 생산적이며 생명력 있는 인자이다.

 

인간이 악을 생산해 내는 이유는 공허한 악의 요인(네크로필리아)으로 자기의 존재를 채우기 때문인데, 그 공허는 바로 관계의 단절에서 온다(121). 악은 자기 자신과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 절대 존재와의 단절에서 생기는 자기혐오의 파괴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악을 생산해 내는 사악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인간은 부단히 자기를 자기 자신과 세상과 절대 존재와 관계 맺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단절의 경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길은 자기 자신을 세상의 일부로 인정하는 데 있다. 김상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159).

 

자기 자신을 외롭게 두지 않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계(타인)를 사랑하고, 절대 존재(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다. 이 사랑은 책임(responsibility, response+ability)을 불러온다(159). 책임이란 나 자신, 타자, 그리고 절대 존재에게 응답(response)할 수 있는 능력(ability)이다. 외로운 사람은 응답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은 늘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다. 그러나 외롭지 않은 사람, 즉 자기 자신과 세상과 절대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세계(타인), 절대 존재에 응답한다. 응답해야 하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웅크리고 있을 수 없고, 응답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누군가와 연합하지 않을 수 없다.

 

외로움에서 만들어지는 공허, 그 공허에서 생성되는 악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김상중이 제시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간에 대해서 말한다(163). 세간을 다른 말로 바꾸면, ‘소소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며 소소한 일상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책임질 줄 아는 소소한 마음이 악을 극복하는 방법이라는 말은 대단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소한 일상(세간)’을 공허하게 느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공허가 우리를 외롭게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짜증, 배우자의 잔소리, 일터에서의 스트레스, 이 모든 소소한 일상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고 응답해야 할 소중한 것들이다. 그 누구도 외로워서는 안 된다. 나 자신도,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지금 내 앞을 지나고 있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저 사람도. 치매에 걸려 자기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공허에 사로잡혀 악을 생산해 내지 않기 위해서.


Posted by 장준식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아

(종교개혁 501주년)

 

기념은 그 때로 가보는 것이지 그곳에 머무는것이 아니다. 기념은 그 때로 돌아가 그 때에 그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정황을 잘 살펴서 지혜를 얻어, ‘현재로 돌아와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지혜로운 대처를 하기 위한 시간 여행이다.

 

우리는 수많은 기념일을 지키면서 살지만, 정작 기념일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일에는 서툴다. 개인에게는 생일이라는 기념일이 있지만, 생일을 기념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성찰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매년 생일을 맞으면서도 그 모양 그 꼴로살아간다. 부부에게는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이 있지만, 결혼기념일을 보내면서 둘 사이에 애틋하고 감미로웠던 첫사랑의 기억, 또는 둘을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뜻은 묵상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렇다 보니, 결혼생활이 늘 권태롭게만 다가온다.

 

기독교인으로서 (특별히 개신교인으로서) 우리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500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는 역사의 사건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다. 그 사건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아무런 교훈도 아무런 지혜도 주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신앙이 더 진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념하는가.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은 참 많다. 그 중에서 소중한 유산 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옥성득 교수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밝힌 종교개혁 유산의 중). 첫째는 루터가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1520)라는 글에서 주장한 소위 만인사제론이다. 루터는 더 나아가 <교회의 바벨론 유수>(1520)에서 가톨릭 교회가 가르쳐온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을 거부하며, 제도권을 통해 받은 사제의 안수가 성령을 통해 받은 평신도의 안수를 무시한다고 지적한다. 안수의 독점권은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몰락시키고 교회 내의 계급을 형성했다. 루터는 그러한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둘째는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필립 스페너(Philip Spener) <경건한 요청>(1675)에서 재발견한 만인제사장설에서 비롯된 경건한 모임이다. 말씀과 기도는 목회자(사제)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루터가 이끌었던 교회의 민주화는 단순히 신분(직분)의 평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핵심을 함께 공유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앙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것은 목회자만이 행해야 할 영성훈련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구성원, 즉 이제 모두 제사장(사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스페너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실행하기 위한 경건한 모임을 만든다. 이것은 나중에 경건주의로부터 배워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발전시킨 속회(class meeting)’와 같은 것이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선은 자신의 적정심리학을 펼치며 이런 주장을 한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치유가 가장 중요하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고 전문가에게 의존하여 치유하러 다니면 일상 생활의 영유가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 정서적인 피폐와 심리 불안정이 우리의 삶을 짓누른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은 왜 성장하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져 갈까? 우리는 왜 신앙 안에서 담대한 마음을 갖지 못하고 심리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살까? 우리는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소중한 유산을 아직도 물려 받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를 전문가(목회자/사제)’에게만 맡기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건강해지려면 스스로 운동을 해야 한다. 옛날 양반들처럼 땀 빼는 일을 종에게 시키면,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지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의 문제를, 구원의 문제를 너무 전문가(목회자/사제)에게만 맡겨 놓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겨우 예배 드리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만다. 바쁘다는 핑계로, 종교개혁 전통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인 경건한 모임을 물려받지 못한 신앙인처럼 산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남의 손에 섣부르게 맡기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세심하게 돌보기 위해 교회 공동체를 민주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아직도 종교개혁 이전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신 테크놀로지가 반영된 기기(device)를 사는 데는 그렇게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생활에 반영하며 살면서, 우리는 신앙의 선조가 물려준 신앙의 중요한 핵심 기술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고 반영하는 데 왜 그렇게도 서투르고 게으른가. 민주적 교회 공동체에 적극 참여하여 서로가 서로의 신앙을 세워주는 것이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참된 방법이다. 기념은 실천이지 회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전통에 서 있는 우리는 조금 더 똑똑하고 부지런 해져야 한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나는 동일한 제사장이다라는 자기인식이, 신앙의 핵심을 실천하고자 경건한 모임에 참여하는 주인의식이 반석에서 물이 나듯 터져 나오길 소망해 본다.



Posted by 장준식

거룩성과 영적 크론병

 

Holiness, 즉 거룩성이라는 말은 온전한 전체를 말한다. 거룩하다는 것은 어떠한 행동이나 모양이 아니라, 존재의 완전성을 말한다. 가량 점잖게 앉아 있다든지,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다든지 하는 행동이나 모양(동작)은 거룩을 담아내는 게 아니다. 물론 주일에 교회(또는 어떠한 성스러운 장소) 가는 행위도 거룩을 담아내는 게 아니다. 성스럽다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존재의 완전성을 이루고 견지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은 성스러움에서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인간성을 말도 못하게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스러움을 찾고,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이 원래 지닌 인간성을 완전하게 회복할 때이다. 또는 인간성 회복을 향해 불굴의 의지를 보일 때이다.

 

우리는 얼마나 인간성이 모자란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세상은 인간성을 갉아먹으며, 그 패인 인간성을 보충하는 방법으로 거짓된 것을 인간의 품에 안겨준다.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 그것만 손에 쥐면 자신의 인간성이 회복되어 성스러운 인간, 거룩한 인간으로 구원받을 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거룩은 구원의 징표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온전한 전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완전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전체이다. 그리스도를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 성령을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그리스도를 통해 신적인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인간에게 열렸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온전함(인간성 자체)을 헤치는 현대사회의 어두운 일들에 맞서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이다. 그 싸움을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름 받았으며, 그 싸움을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교회는 영적 무장을 한다. 인간성을 헤치는 모든 것은 존재의 적(enemy)이다


그런데, 불행한 일 중 하나는 무엇이 인간성(존재)을 헤치는 적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꼭 면역체계가 고장나서 엉뚱한 세포를 공격하여 몸을 상하게 하는 크론병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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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개별화 원리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개별화의 원리 (principle of individuation>를 바탕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겠다.

 

실체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물이다. 그러나 질료와 형상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질료와 형상을 실체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실체로부터 질료와 형상을 분리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상에 의해 개념적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념은 본성상 보편적이기 때문에 개념 안에 개별자의 개별성(thisness)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질료와 형상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이성은 개념화되지 않은 실체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어떠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보편적인 개념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은 개념이지 개별성이 아니다. 실제로 물은 100도에서 끓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개념화된 형태로 물이 어느 정도 온도에 도달하면 끓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간의 학문이란 질료와 형상의 개별성을 파악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 이성이 어떠한 실체를 인식할 수 있도록 실체를 개념화시키는 작업이다. 우리가 신(God)에 대해서 학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파악하는 신(God)은 개념화된 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통해서 개념화된 신을 인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 개별성(thisness), 즉 신 자체의 본질(nature)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고적부터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은 늘 헛수고로 돌아갔으며, 결국 신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은 이성의 길이 아니라 신비의 길, 즉 신(God)이 자기 자신을 계시(revelation)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신 이해는 개념적이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인간이 된 신(incarnation)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God)이 한 실체로, 질료와 형상의 개별성을 모두 드러낸 형태로 우리의 감각이 경험할 수 있게 세상에 왔다는 것 자체가 헬라철학의 범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또는 기괴한, 미련한 생각인 것이다.

 

* 질료(matter) – 가능태(dynamis)

* 형상(form) – 현실태(energeia)

* 질료는 형상이 될 수 있는 가능태이며, 형상은 질료의 현실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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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소풍


장자크 루소의 소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얼마 전에 풀키에 씨에게 이끌려 평소와는 달리 내 아내를 동반하고 그와 그의 친구 브누아와 같이 바카생 부인데 식당으로 각자 자기 식대를 부담해서(‘피크닉형태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갔었다. 바카생 부인과 그녀의 두 딸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했었다.”

 

서양에서 소풍(피크닉)은 몇몇 사람이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와 함께 식사하는 것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크닉(picnic)의 어원은 불어인데, 불어의 ‘pique-nique’에서 왔다. ‘조금씩 먹다피케(piquer)’가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의 니크(nique)’가 합해서 생긴 말이다. 서양의 소풍에는 소박한의미가 담겨 있다. 소풍은 몇몇이 각자 음식을 조금씩 가져와 나누어 먹으며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의 소풍은 한자어이다. 거닐 와 바람 이 합해서 생긴 말이다. 소풍은 바람을 쐬며 거닐다라는 뜻이다. 동양의 소풍은 목가적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어렸을 적 소풍은 모두 걸어서 갔다. 물론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그랬기도 하지만, 소풍은 기본적으로 바람을 쐬며 걸어서 가야 그 의미가 살아난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소풍의 설렘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기술의 발달로 인해 교통 수단이 발전하면서부터 인 것 같다.

 

소풍하면 떠오르는 두 문학작품이 있다. 하나는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이고, 다른 하나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다. 황순원 소설 <소나기>에서 소년과 소녀는 소풍(바람을 쐬며 거닐다)을 갔다 소나기 때문에 불어난 개울물을 건너는데 애를 먹는다. 병약한 소녀가 불어난 개울물을 건널 수 없자, 소년은 소녀를 업고 개울물을 걷는다. 그때 소년의 옷에 소녀의 손에 들린 보라색 꽃 물이 든다.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탓에 감기가 들어 병색이 깊어져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소녀는 유언으로 보라색이 물든 옷을 입혀 묻어 달라고 한다. 그렇게 소녀는 소년과의 아름다운 소풍을 가슴에 간직한 채 땅에 묻힌다.

 

천상병 시인은 시 <귀천>에서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한다. 하늘로 돌아가게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었다고, 아름다운 소풍이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천상병 시인의 삶이 그렇게 소풍 같은 삶은 아니었다. 그는 동백림(동베를린)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천상병은 평생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살다 결국 1993년 그가 말하던 소풍 같던 삶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소풍은 유토피아같은 시간적 공간이다. 어떠한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데, 그 아름다움 중에 하나가 소풍일 것이다. 우리는 소풍 때 갔던 장소를 기억하기 보다 소풍이라는 사건, 즉 그 시간을 기억한다. 그 소풍의 시간은 언제나 우리 마음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어, 힘들고 어려울 때, 또는 세월에 떠밀려 낯선 시간 속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등불과도 같다.

 

소풍 모티브는 복음서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병이어 사건이 그것이다. 한 소년이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간 날은 그 소년에게 소풍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소년은 자기의 도시락을 자기 혼자 먹지 않고 나누어 먹기 위하여 엄마가 싸 주신 도시락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는다. 아마도, 그 날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또는 나눔에 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은 소년은 차마 자기 혼자 도시락을 먹을 수 없었다. 주변에 도시락을 싸오지 않아 배고픈 사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들은 말씀대로 자기의 것을 나누었을 때, 그곳에는 배고픈 사람이 사라졌고, 소년의 삶은 풍성해졌다. 그의 소풍은 말할 수 없는 은혜로 가득 찼다.

 

바람을 쐬며 거니는 시간, 또는 소박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시간, 소풍은 우리의 영혼을 풍성하게 해주는 선물과도 같다. 우리의 삶이 그러한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우리의 예배가 그런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우리의 교제가 그런 소풍과 같은 시간이었으면, 그러면, 우리도 보라색으로 번진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살다가, 소풍이 끝나는 날, 저 하늘로 미소 지으며 올라갈 수 있을 텐데……


Posted by 장준식

유로지비

 

살인마는 사람을 죽이면 죄책감을 갖는 게 아니라 우월감을 갖는다. 자신이 굉장히 잘난 사람이고, 상대방의 삶과 죽음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잉여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과 정남규를 심문한 프로파일러의 통찰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한 '살인'이 아닐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시기하며 질투한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그 미움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시하고 멸시한다. 인간은 그 마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비난, 비협조, 무관심, 왕따, 외면, 혐오, 폭력. ,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우월감을 갖든지, 열등감을 갖든지 표현하는 방식은 대개 비슷하다.

 

러시아어에 유로지비(yurodstvo)’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러시아 정교회(러시아 기독교)가 발전시킨 영성의 개념인데, 성경의 케노시스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케노시스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뜻하는데, 이는 빌립보서의 말씀에서 비롯된 말이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케노시스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갖는 영성과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영성을 말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러시아 정교회는 유로지비의 영성, 성스런 바보의 영성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러시아의 유로지비 영성을 본받아 살아간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러시아의 대 문호 중 한 명인 도스토예프스키와 대 작곡가 중 한 명인 쇼스타코비치가 있다. 이들은 유로지비의 마음으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을 섬겼고, 글을 쓰고 작곡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은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유로지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성스런 바보처럼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양보하고, 용서하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희생정신이 생기는 것이다. 못나고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은 케노시스의 마음으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은 하늘 나라의 약속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상대방을 향한 우월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우월감을 마음에 갖지 않기 때문에 유로지비의 삶을 사는 자는 부지불식 간에 상대방에 대한 살인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순간에서도 생명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부지불식간에도 생명을 살리는 자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리스도처럼 케노시스의 영성’, 즉 유로지비(성스런 바보)의 삶을 살게 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게 살다 간 바울 사도의 간증은 이렇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하나, 여러분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을 누리고 있으나, 우리는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10-13, 표준새번역).

 

우리도 성스런 바보처럼 살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행복하고 아름다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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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

 

의자의 용도는 무엇일까? 의자는 원래 을 위한 기구였다. 의자는 생활하다 힘들면잠시 앉아 쉴 수 있도록 고안된 물건이다. 그런데, 어느새 의자는 쉼을 위한 기구보다는 일을 위한 기구로 탈바꿈 한 듯하다. 어느 시인은 그의 시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에서 그러한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곧추 세운 등뼈 아래로

엉덩이를 엉거주춤 유지해야 하는

이 포즈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각자의 배후를 전적으로 위탁하는 포즈를

우리는 언제부터 배워야 했습니까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디부터 구부려야 했습니까

어디를 숙여야 했습니까

……

 

사로잡힌 척 의자에 앉아 우리는 손만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왜 멈출 수 없습니까

……

 

뒷모습이 구겨져 있습니다

캄캄한 곳에 우리는 너무 오래 접혀 있었습니다

(이원의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 중에서)

 

우리는 의자에 갇힌 인간 같다(새장에 갇힌 새처럼). 우리는 왜 하루 종일, 그토록, 지루하게, 또는 집요하게,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몸의 가장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사로 잡힌 척쉴 새 없이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이 시는, 현대 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한 이탈리아의 예술가, 브루노 무나리가 1944년 발표한 포토에세이 [불편한 안락의자에서 편한 자세 찾기]라는 작품을 생각나게 한다. 안락의자인데, 불편하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주인공은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모두 엉거주춤, 안락해 보이지 않고, 불편해 보인다. 그렇다면, 편한 자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안락의자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앉아보아도 불편한 안락의자는 나에게 쓸모 없다. 그러므로, 안락의자에 앉아 편안함을 느끼려면 나에게 맞는 안락의자를 다시 만들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안락의자라고 제작해 준 그 의자에 편안하게앉아보려고 나의 몸을 이리 구겨보고 저리 구겨보곤 한다. 나의 몸에 맞지 않는 의자에 사로잡힌 척앉아 그 의자가 나의 몸에 맞는 의자라고 정신수양하며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게 어울리는 의자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쓰며 사는가. 세상에 나와 있는 각종 자기계발서는 자기를 계발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이 이미 만들어 준 안락의자에 나 자신을 꾸겨 맞춰보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진리를 안다는 것은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의자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준 안락의자에 맞춰 앉아보려고 몸의 중요한 마디를 구부리고 숙이며산다.

 

우리는 그렇게 너무 오래 접혀 있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면, 우리는 이제 사로잡힌 척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끼를 위한 너덜너덜한 손의 동작을 멈추고, 한 끼를 위해서가 아닌, 생명을 위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의자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구겨져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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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인은 키스하는 순간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김기택, <갈라진다 갈라진다> 시집 중, '키스'에서)

우리는 엄마 자궁을 통해 이 세상에 오기는 했으나, 아직 다 태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신의 배려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한꺼번에 모두 태어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은 우리에게 생명의 신비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엄마 자궁을 통해 나올 때 모든 것이 태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한 진정한 자궁은 엄마의 자궁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은 신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태어남의 자궁'이다. 이 세상에서, 매일, 무엇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엄마의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아기는 엄마와의 눈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나고, 엄마와의 입맞춤을 통해서 조금 더 태어난다.

 

한꺼번에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생명들(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생명, 다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아주 조금씩 태어나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가장 모자란 눈, 한 참 더 태어나야 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을 고정된 생명으로 바라보고, 그 모자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인생은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을 찾는 놀이와 같다. 그 놀이에 열중하지 않으면 인생은 재미없다. 그 놀이를 하는 중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려 하는 욕심이다. 그러한 순간은 없다. 신은 그러한 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순간에 모두 태어나는 일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 더 태어나야 한다. 오늘 하루의 일(놀이)은 우리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람이 가장 허무를 느끼는 순간은 어느 일을 통해 조금 더 태어나지 못했다고 느낄 때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해 보자. 지금 내가 하는 이 일(놀이)은 무엇을 위한 일인가?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지도 못할 무의미한 일인가, 아니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의미 있는 일인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지만,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하는 일은 어쩌면 따로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하찮게 여긴 바로 그 일, 그냥 지나쳐 버린 바로 그 일이 어쩌면 나를 조금 더 태어나게 해줄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아직 다 태어나지 않았다. 시인이 키스를조금 더 태어난 순간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늘 조금 더 태어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는 것으로 그동안 멈추어 있었던태어남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까? 키스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그것이 배우자이든, 자녀이든, 연인이든, 애완견이든, 신의 손등이든)가 있다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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