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드 니버에서 시작되는 나의 정치신학적 관심과 과제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매일 같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이다. 그가 말하고 있듯이, 개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은 다르다. 집단은 개인이 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타적이지 못하다. 집단은 매우 이기적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도덕적이고 신앙심이 깊다. 그런데, 연일 뉴스를 통해서 들려오는 교회 집단의 소식은 참담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일까? 라인홀드 니버는 그러한 괴리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은 다르다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의 원리를 통해 움직일 수 있지만, 집단은 그 도덕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고 정치적인 이유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아무리 집단(교회)에 양심적인 호소를 해도 집단(교회)은 그 도덕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집단에는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영역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집단들 간의 관계는 항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특별히 우리는 교회를 대할 때 이러한 것을 간과한다. 일례를 들어, 요즘 교회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목회 세습의 경우에서도 보면, 세습을 감행하는 개인 목사나 그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인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습을 감행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집단에 흐르는 정치적인 영역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에서 아무리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그들은 그들의 도덕적 양심에 흔들려 세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라인홀드 니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목회 세습을 끊어내고 방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면 안 되고, 목회 세습에 얽힌 집단의 정치적 영역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가진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니버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이 이성(또는 양심적 호소)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버의 분석과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거기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힘을 소유한 정치적 대항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인간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한, 어떠한 일이 아무리 비도덕적이라도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인의 도덕이 집단의 도덕보다 뛰어날 수는 있지만, 개인의 도덕 자체의 질적인 향상은 그 자체로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과제이다.

 

그리고, 집단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그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자기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로 양성하기 위한 자기들만의 도덕을 주입한다. 이미 주입된 도덕적 페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항세력이 정치적 힘을 가지고 도덕적인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할 때, 이해 또는 가치가 상충되는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자칫 폭력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물론, 니버는 그에 대하여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non-violent coercion)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운동이 사회를 얼마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지난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에서 보여준 촛불혁명은 니버가 제시한 간디 식의 비폭력 강제력의 한 예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운동을 통해서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는 했지만, 과연 세상이 바뀌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의 관심은 니버가 말하고 있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형성하는 데 있어 도덕을 지닌 개인들 간의 연대(solidarity)를 어떻게 이끌어 낼 수 있는가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연대(solidarity)에 자기 자신을 투신(내어줌)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아무튼, 교회는 집단으로서, 단순히 개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윤리의 양심적 호소로만 정의로워질 수 없다. 집단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접근법보다는 정치적 접근법이 훨씬 중요하다. 교회라고 하는 집단은 개인의 도덕과는 상관없이 그 집단 자체의 속성에 따라 집단이기주의적인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달려간다. 그러한 측면에서 교회의 부정의한 정치적 욕망을 막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하나는 정치적 대항세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자체를 집단의 속성을 담지하지 못하도록 해체하는 것이다. 첫째의 방법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고, 둘째의 방법은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제자들, 특히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둘 중에서, 21세기 교회와 사회에 어떠한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연구를 해봐야 할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질 들뢰즈의 철학(리좀, 노마디즘, 멀티플러서티)과 요한 밥티스트 메츠(Dangerous memory)의 신학을 바탕으로 교회의 문제를 정치신학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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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은총을 잃은 목사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재밌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와 그녀의 오라비 레어티즈의 대화 중에 나오는 문장이다. 레어티즈는 프랑스로 떠나기 전 누이 오필리아에게 처녀로서 몸 조심 할 것에 대하여 멋진 교훈을 준다. 오라비의 교훈을 들은 오필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훌륭한 교훈의 골자를 제 마음의 파수꾼 삼을게요. 그러나 오라버님, 은총을 잃은 어떤 목사들처럼 나에게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 보여주고, 자기는 허풍선이 무모한 탕아처럼 환락의 꽃길을 밟으며, 자신의 설교를 저버리진 마세요.” (햄릿, 33, 민음사)

 

뜨끔한 문장이다. 오필리아의 문장에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환락의 꽃길이 대조되고 있다. 은총을 잃은 목사들은 설교단에서 청중에게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길을 걷지 않고 환락의 꽃길을 걷는다는 비판이다.

 

무엇보다, ‘은총을 잃은 목사라는 구절이 마음에 꽂힌다. 누구나 목사가 될 수 있지만, ‘은총을 잃지 않은목사로 남아 있는 일은 쉽지 않다. 처음 하나님이 부르신 은총을 간직한 목사는 천국 가는 가파른 가시밭길을 설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이 세상에는 온통 은총을 일은 목사들천지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 그들은 은총을 잃어버렸을까? 무엇보다 은총을 잃어버리는 일만큼 끔찍한 일이 목사에게 어디에 있을까? 목사가 무릇 지켜내야 할 것은 교회 건물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자존심도 아닌, 은총이다. 은총은 잃은 목사는 환락의 꽃길을 걷게 된다. 꽃길을 걸어 좋지만, 결국 그 끝에는 천국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픈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할로윈과 기독교

 

10 31, 시월의 마지막 밤, 학창시절 이 날은 대개 문학의 밤을 했다. (물론 반드시 10 31일은 아니었으나, 그 즈음, 토요일이었다.)

 

10 3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 전야제가 있는 날이다. 이 풍습은 캘트 족이 지키던 할로윈을 통해 발전된 기독교의 축제일이다. '할로윈(Halloween)'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이브'라는 의미이다. (켈트어로 Hallow는 성인(Saints)이고 여기에 'eve' 붙어 'Halloween'이 된 것이다.)

 

할로윈에는 원래부터 귀신 숭배의 개념이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산자와 죽은 자의 교통(communication)을 말하는 신학이 있는데, 그러한 신학과 캘트 족이 지키던 샴하인(samhain)의 개념이 맞아 이것이 기독교화(할로윈)된 것이다.

 

할로윈 문화가 발달된 미국에서는 할로윈 데이에 교회에서 따로 모여 '할렐루야 데이' 'Saint Night' 같은 행사를 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할로윈 파티를 하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할로윈 데이에 따로 모여 교회 행사를 치르는 목적은 세상의 할로윈 파티가에 귀신 분장을 하고 귀신을 숭배하는 요소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원래 할로윈을 기독교의 축제일로 만든 취지를 잘못 알아서 일뿐만 아니라, 더 이상 할로윈에 '영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 문화의 배경을 숙고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이다.

 

할로윈이 미국 사회에서 번성한 이유,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번성하는 이유는 순전히 '시장' 때문이다. 미국에서 할로윈 데이로 인해 발생되는 경제 효과는 10조원에 이른다. 그야말로 대목이다. 할로윈 데이가 번성하면 번성할수록 좋은 것은 시장이지, 귀신이 아니다.

 

현대 교회가 싸워할 대상은 할로윈 데이의 귀신이 아니라, ''이 중심이 되어버린 물신숭배이다. 세상에서 할로윈을 즐기는 것이 '귀신을 숭배하는 행위'라는 입장에서 교회의 행사를 따로 마련하는 교회는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교회의 행사는 불순한 영과의 싸움보다 '(시장자본주의)'과의 싸움을 지향해야 한다.

 

할로윈에 하는 교회의 행사는 세상에서 하는 할로윈 파티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지,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시장과 자본에 뿌리까지 물든 세상, 그리고 은근슬쩍 그 풍경에 자기를 밀어 넣은 교회가 그것에 얼마큼이나 저항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럴바에야, 교회에서 따로 행사를 갖기 보다, 할로윈 축제에 기괴한 분장을 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그 날이 만성절(All Saints Day)의 전야제인만큼, 기독교인은 기독교 역사의 기념할만한 성인(Saints)으로 분장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가 '기독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어떨런지.

 

그러한 시도는 시월의 마지막 밤에 교회 공간에서 하던 문학의 밤을 더 넓은 공간인 '세상'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될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Posted by 장준식

졸혼풍조와 교회

 

'졸혼'이라는 용어는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졸혼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졸혼'이 유행인 듯 하다. 이혼의 상처가 만만치 않기에 차선책으로 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에서 오는 정서적인 불안도 줄일 수 있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오는 여러가지 법적 이익도 계속 누릴 수 있으며, 법이 정해준 테두리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마음 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졸혼의 가장 큰 장점은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 받으려는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유를 극심하게 침해당해온 '개인'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해 주는 유용한 통로도 쓰이고 있는 듯 하다.

 

모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풍조처럼 느껴진다. 이것의 가치평가를 따지는 일은 매우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로 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는 교회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는 공동체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더군다가 '믿음' 또는 '구원'이라는 신앙공동체적 요소 때문에 때로는 개인의 자유가 얼토당토 안 하게 침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 현상에 반발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 '가나안교인' 현상은 교회공동체 생활에 대한 '졸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선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체감하는 현실은 매우 난감하다. 교회공동체를 떠난 '가나안교인'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공동체 내에는 대개 두 부류의 교인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통적인 공동체주의를 지향하는 신앙인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모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며 신앙생활 하고 싶어하는 신앙인 부류이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 보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부류도 저변에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싶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개 공동체를 강조하는 부류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신들이 공동체에 희생하는 만큼 희생을 보이지 않는 부류들에 대한 불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인들도 자신들이 희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선다 싶으면 저항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현대(신앙)인들이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못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더하거나, 목회현장을 떠나야 한다.)

 

요즘 목회현장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졸혼'의 저변에 깔린 것과 같은 '별거' '사생활'의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유행 때문이다. 요즘 신앙인들은 교회에 출석하긴 하지만 교회에 소속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사생활의 일부분 일뿐이지 자신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개방하는 것만 수동적으로 교회가 받아들이길 바랄 뿐, 교회(또는 목회자)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래서 요즘은 사생활의 대표적인 공간인 가정집 심방은 극도로 드물고, 대신 전화심방이나 다른 형태의 심방이 선호된다.

 

교회공동체성의 회복은 단순히 공동체를 강조하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을 통해서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시키기 원하는 요즘 신앙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 또는 자유에 대한 구속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라고 말한 스텐리 하우워즈의 말처럼, 공동체를 지향할 수 밖에 없는 교회가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길은 올바른 개념의 확립을 통해서이지, 공동체성에 대한 의지력을 통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회공동체의 운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신앙인들)을 위한 현대적인 교회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그 명암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공동체의 과제일 뿐 아니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자신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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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사순절 맞이하기

 

예전에 애틀란타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책 'Dispatches from the Front'를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책 제목은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큰 반향으로 남아 있다. 'The front'는 전장의 최전선을 말한다. 그 단어를 보면서 나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는 신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던가!

 

신앙의 최전선에서 전쟁같은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의 삶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긴장의 연속이고, 지혜와 인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영적 싸움이 목을 조여온다.

 

나는 늘 내가 최전선에 선 장수로서 잘 싸우고 있는 것인지 자기성찰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낸다. 성찰 중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면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쥐어 박기도 한다. 그러나 잘 싸우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는 사도 바울의 이 충고를 늘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절이 되면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싸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잘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의 자리도 생각하게 된다.

 

매년 다시 돌아오는 식상한 사순절이 아닌, 인생 가운데 단 한 번 뿐인 사순절을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인생에 마흔 네 번째 사순절을 맞는 게 아니라, 처음 맞이하는 사순절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우리에게 '도둑'처럼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 (시편 49:11, 표준새번역)라는 시편의 말씀 앞에서, 숙연히,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절제와 선한 일에 힘 쓰는 사순절을 보내고 싶다. 그러면 어느덧 눈 앞에 부활의 주님이 나를 구원하러 와 계실 거라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설교 준비 노우하우

 

1.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한다. 독서를 하되 신학서적이나 신앙서적만 읽지 말고,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도 병행하여 읽는다.

 

2. 다른 설교자의 설교는 가급적 듣지 않는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많이 들으면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설교를 하지 못하게 되고 그들의 설교를 무의식적으로 베끼게 된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독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게 되는 가장 큰 근본적인 밑거름이다.

 

3.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하여 언론 기사를 주목한다. 특별히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적 사건 사고를 챙겨 본다.

 

4. 교인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의 당면한 문제, 그들의 고민 등을 잘 메모해 둔다.

 

5. 성서 본문을 택할 때, 사회적 문제, 교인들의 문제에 초점을 먼저 맞추지 말고, 되도록이면 성서정과에 맞춰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먼저 맞춘다.

 

6. 성서 본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서, 성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 읽기가 아닌, 평소 성경을 많이 들여다 보아야 한다. 그리고 성서학 분야와 조직신학 분야의 책을 평소에 많이 읽어 두어야 한다.

 

7. 선택한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을 한다. 성서 본문이 원래 말하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인지 최대한 밝혀낸다. (이것을 충분히 하지 않고 설교를 하면 다 사기치는 거다.)

 

8. 성서 본문에 대한 충분한 주석이 이루어졌다면, 그 말씀을 현재 우리의 삶의 자리로 가져 오는 작업을 한다. 이때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평소에 해 놓은 독서이다.

 

9. 성서의 본문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메시지를 공적인 사회 문제에 적용하는 일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사적인 교인들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교인들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좋다. 그 선을 넘으면, 설교가 아니라 잔소리가 된다.

 

10. 설교 준비는 일주일에 걸쳐서 하되, 최종 설교문 작성을 주일에서 너무 멀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주일 설교문 작성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끝내는 것보다는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끝내는 게 더 좋다. 왜냐하면, 최종 정리는 뇌 속에 말씀을 새기는 작업인데, 우리의 뇌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문을 뇌가 기억하고 있어야, 단순히 설교문을 읽는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문에 기초한 자유로운 설교를 할 수 있게 된다. 내 기억에 없는 것은 그만큼 영감과 감동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내 자신이 내 설교에 영감과 감동이 넘쳐야 그것이 그대로 청중에게 전달되는 법이다.

 

11. 주요 요점을 적은 메모 형식의 설교문을 작성해서 설교하면 안 된다. 설교문은 반드시 완성된 문장 형태여야 한다. 자기의 생각, 또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전한 형태의 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자기가 지금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12. 최종 설교문을 작성했다면, 반드시 두 세 번 읽으며, 색깔 있는 팬으로 첨삭을 해야 한다. 그렇게 첨삭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야 현장성을 살릴 수 있다.

 

13. 설교 초보자라면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한 게 낫다. 그래야 말실수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설교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준비한 설교 원고에 충실하되, 때로는 그때그때의 영감에 내맡기는 것도 괜찮다.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말로 때우기식의 설교는 죄이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이 아니라 직무유기다.

 

14. 예배를 마친 후,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여 자기 자신의 설교를 다시 정리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설교문 작성에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 최종 설교문에 표시되어 있는 첨삭 부분을 다시 정리하여 파일에 저장한다.

 

15. 스스로 자신의 설교의 청중이 되어 자신의 설교를 들어본다. 그리고 스스로 피드백을 해 본다. 더 나아가, 배우자에게 피드백을 받아 본다. 배우자의 피드백만큼 좋은 피드백이 없다.

 

16. 설교 준비와 실제 설교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설교 작업은 생산적이어야 한다. 설교를 소비적으로 하면 남는 게 없고 영적 허탈감만 올 뿐이다. 설교 작업을 생산적으로 한다는 것은 설교 작업을 통해서성장해 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압박감에 의해 어떻게 해서든 그 시간을때우면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설교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성서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실력과 영성을 기르는 실전(實戰)이어야 한다.

 

17. 믿음은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예배 때 드려지는 찬양이나 선포되는 설교는 감정을 고양시키는 선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변화는 사건이 발생해야만 일어난다. 어떠한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사람은 이전의 존재와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설교는 사건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게 문제고 과제다. 과연 우리는 설교를 사건이 되게 하는가?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그러한 능력은 우리에게서 오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만 일으키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누구보다 성령께 모든 존재를 맡길 줄 아는 깊은 영성이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사건, 갈등, 그리고 성장

 

나는 군대에서 장군 운전병을 했다 (육군본부 작전처장). 최상위 부대에서 최고 고위급 인사를 모시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중에서 여지껏 잊혀지지 않는, 목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교훈이 있다.

 

모시는 분의 보직 상 장거리 운행이 잦았다. 장거리 운행을 하기 전에 운전병이 꼭 해야 할 일은 정비대에서 차량을 점검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거리 운행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차량 정비를 받지 못한 적이 있다. 게다가 얼마전 차량 정비를 받았던 터라 별 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때가 여름 가까웠던 것 같다. 사건은 그때 터졌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 천안 쯤에서 갑자기 차가 서 버린 것이다.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일이 벌어지자 장군은 나에게 차량 점검 여부부터 물었다. 점검을 못 받았다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수송대에 전화해 빨리 일처리를 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시간이 많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 견인차에 끌려 이동 도중 차 안에서 장군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장군 그 때 나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사건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후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그러니, 앞으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조속히, 그리고 잘 수습하기 위하여 열심을 다하라."

 

인생을 더 살아보니,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목회를 해 보니 그때 장군의 교훈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알겠다. 사건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터진다. 갈등은 우리의 뜻과는 반대로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은 아무리 노력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사건과 갈등이 있어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공간, 또는 어긋난 공간을 매울 수 있는 기회도 온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과 갈등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사건과 갈등을 통해 더 나은 인간관계, 공동체를 만드느냐, 아니면 사건과 갈등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자질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살다보면 원치않는 사건과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사건과 갈등을 습관적으로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건과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무책임하게 회피하거나, 사건과 갈등을 통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매우 큰 문제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생명은 없다.


Posted by 장준식

신앙, 시각과 청각의 미학에서 촉각과 후각의 미학으로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신앙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개신)교회에서 매우 부정한 것으로 작동하고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지, 교회 와서 또는 매체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듣는 행위가 아니다.

 

매체를 통해 듣는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 있다. 원래 매체를 거치면 매체 건너편에 있는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현대인들의 의식은 그렇게 인식하도록 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TV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존재를 유명인(celebrity)으로 인식하며 그들의 존재를 부러워한다.

 

롤랑 바르트는 미학을 논하며 미학의 요소를 시각과 청각으로 제한한다. 미학에는 촉각이나 후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는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우리는 그들을 오직 시각과 청각으로만 접한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없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시각과 청각으로 접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아름답게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각과 후각으로 하는 것이다. 남녀가 처음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서다. 그러나 그들의 인격적인 관계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점점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 있는 관계는 애잔할지는 몰라도 현실성이 없다. 타자의 존재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넘어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갈 때 온전히 파악된다. 그래서 시각과 청각의 범주를 벗어나 촉각과 후각의 범주로 들어간 연인의 사이에는 언제나 불협화음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의 실체를 맞닥뜨리며 그 존재를 감당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서만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에게서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힘들다. 시각과 청각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인은 길가요, 돌밭이요, 가시덤불에 불과하다. 귀만 커져 마음이 완고할 뿐 아니라, 박해와 핍박을 한 시도 못 견디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에 취약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미학의 개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가톨릭의 예배는 시각과 청각의 범주에 머물렀다. 사람들은 미사(Mass)에 참석해 사제가 들어올리는 빵과 포도주를 보며, 사제가 읊조리는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사제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 행위를 더 많이 보고자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느라 분주했다.

 

루터는 중세의 그러한 미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미사가 아닌, 촉각적이고 후각적인성도의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루터는 미사(특별히 성만찬; 개신교에서는 미사를 예배라 한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가 내어 주신 몸을 끌어 안아 그 안에서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 강조했다. 성도의 교제는 멀리서 바라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촉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피냄새와 땀 냄새를 맡는 것이다.

 

현대(개신)교회의 신앙인들은 매체를 통해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보고 듣는일을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성도의 교제를 가로 막을 뿐만 아니라, 신앙을설교 듣는 일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되는 설교 동영상은 본교회의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부득이한 이유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해 강단에서 선포된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의 영적 조화를 돕기 위한 봉사의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들의 설교는 달콤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듣는 행위는 청각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작용이다. 신명기 6장의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4-5). 이 말씀에서 보듯이, ‘듣는 행위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지, 귀만 쫑긋 세우는 행위가 아니다.

 

사실 설교는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은 약간의 풀이가 필요하겠으나, 성경 자체가선포되고 기록된하나님의 말씀이니 그것을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말씀을 잘못 해석하느니 그냥 읽는 게 훨씬 낫다고까지 말한다.

 

신앙은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이제, ‘보고 듣는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신앙생활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 안고, 사느라 거칠어진 성도의 손을 마주 잡고 그들의 피냄새와 땀냄새를 맡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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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우리가 인식 기관(특별히 눈)으로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들은 대개 '악마성'을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 포장된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경험하고 나면 절대로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난 후에 악마성을 경험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주목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악마성'을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내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을 빼앗기지 않도록 구원의 빛을 던져준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구원을 가져다 준다. 생명을 망치는 악마성을 품고 있는 거짓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Posted by 장준식

내가 사는 지역은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지역이라 곤충들 천국이다. 개미, 거미, 터마이트, (호넷, 범블비), 실버피쉬, 바퀴벌레 등 수 없이 많은 곤충들이 각자 좋아하는 처소에서 왕성한 번식력을 뽑내며 산다.

 

그 중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감을 주는 것은 단연 바퀴벌레다. 평소에 나를 별로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 집사람도 내가 바퀴벌레를 잡아줄 때는 멋있단다. 어느 아티클에서 보았는데, 바퀴벌레는 컨트롤만 할 수 있을 뿐 완전 박멸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 중 하나인 바퀴벌레의 위엄이 담긴 보고다.

 

많이 무덥고 약간 습한 환경에서는 곤충 뿐만 아니라 그들의 포식자인 도마뱀도 기승을 부린다. 그런데 도마뱀은 곤충들과는 달리 눈에 잘 띄지 않을 뿐더러 인간 생활에 특별한 위해를 가하지도 않는다.

 

우리 교회는 바퀴벌레가 득실될 수 있는 환경을 지녔다. 건물도 오래됐고, 주변엔 숲이고, 예비시간이나 모임이 없는 동안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손길이 많이 타지 않는 환경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바퀴벌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도마뱀 때문이다. 교회를 처소 삼아 살고 있는 도마뱀은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움찔할 정도로 꽤나 크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둘이 나누는 겸연적은 인사이다. 도마뱀도 나를 신경 안 쓰고, 나도 도마뱀을 신경 안 쓴다.

 

사실, 덫을 놓아 도마뱀을 잡을 수도 있으나, 나는 몇 년 전부터 도마뱀을 그냥 살려두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도마뱀 덕분에 교회에 바퀴벌레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마뱀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존재를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쓸모가 있으면 살아남는 법인 것 같다. 만약 도마뱀이 바퀴벌레를 잡는 데 쓸모가 없었다면 이미 도마뱀은 제거당했을 것이다. 도마뱀은 사람들에게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도마뱀은 나의 신실한 동역자이다. 만약 도마뱀이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면, 나는 바퀴벌레를 잡느라 노동력을 써야했을 것이고, 교회의 예산을 거기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뱀 덕분에 나는 나의 사역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몇 년 동안 자기의 일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있는 도마뱀에게 올 연말 '집사 직분'을 내릴까 한다. 그는 그냥 도마뱀이 아니라, 도마뱀 집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Posted by 장준식

곡성(谷城)의 곡소리(哭聲)

ㅡ 영화 곡성을 보고

* 주의: 핵심 내용이 스포일러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본 뒤 읽어보세요.

 

영화 제목은 곡성(哭聲)이지만, 촬영지는 곡성(谷城)이다. 곡성의 곡소리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이다. 원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는 곡성이 아니라 함성(야호~)’이 들려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곡성에서 곡소리가 난다

 

영화는 성경 말씀을 띄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누가복음 2438-39). 실제 영화에서는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의 구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37절부터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 누가복음 37절의 말씀은 없다. 빠진 그 부분은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이다.

 

곡성은 종교영화는 아니지만, 누가복음의 말씀이 모티브를 이룬다. 영화가 모티브로 사용하는 말씀은 예수가 부활한 뒤 열 한 제자(원래는 열 두 제자이지만 가룟 유다는 자살해 죽은 상태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평안을 빌며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산 자의 모습으로 자신들 앞에 나타났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들이 여전히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세 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당하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때마다 제자들은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 무지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도 이어진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 눈 앞에 나타난 예수가 인 줄로 알았다.

 

사실 누가복음에서 콕 짚어서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고 명시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그 당시 예수의 부활을 놓고 논쟁을 벌이던 이단사설에 대한 반박 때문이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제자들이 본 것은 육체를 가진 예수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환영)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지주의라는 이름으로 초대 기독교 사이에 널리 퍼진 이단사설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의심믿음의 적으로 생각한다. 바로 그 의심이 영화의 핵심 모티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의심과 배신의 역사라 불러도 될 정도로 의심과 배신에 의해서 생명을 망치고 그르쳐 왔다. 영화는 바로 그 의심과 배신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과 행복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여준다. 누가복음에 있는 다른 말씀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10:23).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복된 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산 좋고 물 좋은곡성(谷城)에서 곡소리가 난다. 평온하던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살인 사건 중에 가장 끔찍하고 가슴 아픈 존속살인사건이 줄을 잇는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과 점차 얽혀 드는 한 경찰(곽도원 분)의 의심과 의심이 드는 일본인(준 쿠리무라 분)을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은 밝혀진다. 그 사이에 전혀 의심이 안 가는 미친사람, 무명(천우희 분)이 있다.

 

절박한 상황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의심 없이따라간다. 종구(경찰관, 곽도원 분)는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리자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사람들의 의심을 물리치는 그 무당의 이름은 일광’(황정민 분). 사람들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을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마을에 감도는 액운을 떼어내고자 종구는 일광의 말 대로 큰 굿 판을 벌인다. 일광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엄청 기가 센 귀신이 붙었다.

 

영화를 보면 그 귀신이 바로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광이 바로 그 일본사람 귀신을 내쫓기 위해 굿판을 벌이는 중이라고 의심 없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감독은 편집의 기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신명 나게 굿판을 벌이는 일광과 교차되는 장면은 자신의 은신처에서 자기의 방식대로 굿판을 벌이는 일본사람 귀신의 모습이다. 일광의 굿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맞춰 일본사람 귀신은 일광의 굿판에 일격을 당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감독의 명백한 트릭이다. 편집이 가능한 영화(영상)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사실, 일광과 일본사람 귀신은 한통속이다. 감독은 일광의 환복(換服) 장면을 통해 그 복선을 깐다. 일본사람 귀신이 입고 있는 팬티와 일광이 입고 있는 팬티는 같다. 그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굿판을 벌인 것은 그들이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무명(미친사람, 천우희 분)이다.

 

지금은 모든 불결한 것을 분리시켜 가두어 놓는 시대(미셸 푸코)이기에 정신병원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미친사람이 영화에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끌어다 쓴 영화의 흐름 안에서 그 미친사람은 거라사 광인을 생각나게 한다.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광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8:28).

 

무명(천우희 분)은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인물이다. 사건 현장에 나타나 돌을 던지며 주목을 끌어보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녀가 사건 전담 경찰인 종구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말해주지만 결국 그 말을 믿은 종구조차도 동료 경찰과 마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 받는다. 사람들 모두가 외면하고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무명은 그저 미친사람이 아니라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복된 사람이다.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의 적()의심 많은마을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꿰뚫고 있는 무명이었다. 일본사람 귀신은 자신을 섬기고 있는 일광을 불러들여 무명을 향해 협공을 날리지만 결국 의심 많은 종구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 때문에 분노를 품은 일본사람 귀신과 일광은 종구의 가족에게 비극을 안겨주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것을 막을 수 있은 존재는 오직 무명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두 장면이 오버랩 된다. 하나는 가족을 필사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종구와 무명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사람 귀신을 물리치고자 그의 은신처를 한 방 중에 홀로 찾아간 가톨릭 부제(신부가 되기 전 단계에 있는 성직자)와 귀신의 만남이다. 이 두 장면에서 의심의 모티브는 극적으로 작용한다.

 

종구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다 어느 골목에서 무명을 만난다. 무명은 종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가족을 구하려면 이웃집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절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종구는 의심과 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명을 대면한 탓에 기겁을 해서 도망치던 일광은 종구의 갈등을 깨는 역할을 한다. 무명은 종구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무명은 종구에게 의심을 품지 말고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을 주문한다.

 

부제는 귀신에게 속은 것에 분해 귀신을 물리치고자 용감하게도 귀신의 은신처를 찾아 간다. 부제는 은신처에서 좌정하고 있는 일본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가 귀신이라는 것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꾸짖는다. 그런 부제에게 귀신은 메시지를 전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 말에 부제는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가 귀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확신에 의심을 갖는다.

 

종구는 무명을 의심하지 말았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을 의심했어야 한다. 종구는 무명의 말을 믿었어야 하고, 부제는 귀신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다. 종구는 결국 의심하지 말아야 할 무명을 의심해서 그녀를 등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의심은 결국 그의 가족을 파멸로 몰고 간다. 부제는 결국 의심해야 할 일본사람을 의심하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의 확신을 의심한 탓에 귀신을 물리치지 못하고 귀신의 또다른 희생자가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곡성(谷城)에서 나는 곡소리(哭聲)는 연약한 인간이 자처한 곡소리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인간은 믿어야 할 것에 의심을 두고 의심을 가져야 할 것에 믿음을 두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일까? 산 좋고 물 좋은 곡성에서 곡소리가 아니라 함성소리(야호~)가 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종구는 의심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부제는 믿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의심은 이토록 생사를 가르고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살인마(귀신)’와 같은 것이다. 예수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0:27). 우리는 어떠한가. 종구와 부제처럼,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파멸과 구원을 오락가락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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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초월적 질서에서의 해방

 

"초월적 질서에서의 해방, 즉 종교적 기초 위에 세워진 모든 전제에서의 해방이 근대 정치의 본질적 특징을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자본이 새로운 초월성으로, 새로운 주인으로 등극하는 순간 버려진다. 정치는 이로써 다시 노예 상태에 빠지고 만다. 정치는 자본의 하수인이 된다"(심리정치, 18).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종교의 본질은 '해방'인데, 역사를 보면 종교가 '억압'으로 작용해 왔다. 그래서 근대의 혁명은 억압적인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꿈꿨고 이루어냈다. 그런데 역사는 '자유'로 귀착하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억압'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이다.

 

신화적 세계관 속에서 종교가 초월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했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는 '자본이 초월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절대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종교조차도 자본의 초월적인 질서안으로 재편된 것 같다. 다시 말해, 종교는 자본과 싸움이 안 된다.

 

지금 시대는 한 편의 <메트릭스>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자본이라는 메트릭스에 종속된 모든 인류와 모든 사회 시스템, 그 안에서 세상은 꿈꾸듯돌아간다. <메트릭스> 영화에서 보듯, 개인(인류)은 자신이 착취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착취 당한다. 자본이 절대권력인 세상에서 개인(인류)는 자기 자신이 착취 당하는 것조차 모르며 꿈을 꾸듯하다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

 

종교는 이제 오랜 세월 동안 초월적인 질서를 아래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인류와 역사에 말할 수 없는 해악을 끼쳐왔던 것을 반성하며 그것에 대한 죄값으로 자본에 억눌림 당하고 있는 인류와 역사의 해방을 위한 전사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이 묘연해 보인다. 자본에 잠식된 종교가 이미 그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갈팡질팡 마음만 바쁘다.


Posted by 장준식

할 수 있을 수 없음

 

시인이 따로 없다. 철학자는 곧 시인이다. 시인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끔, 보이는 세계 뒤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폭로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기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만난 한병철은 철학자이라기 보다 시인이다. 그는 철학의 언어로 정확하게 시인의 임무를 해내고 있다. 놀랍다.

 

그가 폭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해야 한다의 타자 착취 사회가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한다의 자기 착취 사회이다. 에고는 타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강요를 당하면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일차적으로 에고는 거기에 대해 저항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신자유주의체제 내에서는 해야 한다의 형태로 타자에 의한 강요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다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의한 강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일에 대한 동기가 타자에 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생기기 때문에, 에고는 이것을 타자에 의한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동기에 의한 자발적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의 내적 동기에 사로잡힌 에고는 주어진 일에 대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 착취가 일어나고 결국 자기탈진(소진)을 필연적으로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하여 만약 에고가 할 수 없다고 곧바로 대항하면 이는 타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 낙오의 의미가 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자기 모멸감이 발생하여 결국 에고는 우울증이나 신경증환자로 전락하여 종국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한병철은 할 수 있어야 한다에 대한 저항은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할 수 있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데, 그것에 대한 부정은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할 수 있을 수 없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타자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의한 착취는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해야 한다는 구호를 감추고, ‘할 수 있다는 구호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고 자발성을 이끌어 내며 자기 주도 프로젝트를 조성하여 스스로 자발적인 착취가 일어나도록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착취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자기를 착취하느라 자기를 소진하고 있다. 성과가 없으면 다른 이를 탓하지 못하고 부족한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된다. ‘할 수 있다의 구호 아래 자기 착취를 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내의 사람들은 자기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무능력한 낙오자가 될까 봐 밤낮으로 자기를 달달 볶아 댄다. 탓하거나 저항할 상대(타자)가 없기에, 그는 그저 자기 자신만 탓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참으로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눈에 보이는 적이 없기 때문에 저항할 수도 없고, 공공의 적을 향해 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우울하고 외롭다. 더 끔찍한 현실은 자신이 지금 그러한 사회 체제 내에서 스스로 붕괴되고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 아래 내일을 향해 희망을 품고 열심히달려가지만, 결국 인생의 끝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런 비극적인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소멸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어느 순간 끝장나버리는허무한 삶에서 탈출하여 인생을 의미 있게 마루리지을 수 있을까? 우선, 우리가 어떠한 체제 내에서 살고 있는지를 충분히 숙지하는 일부터 필요한 것 같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니오(Neo)’가 결국 매트릭스에서 깨어나오듯이, 그러한 깨어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신실한 동지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나는 그 길을 간다.


Posted by 장준식

신자유주의적 주체와 교회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 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고립에 의한 우울증과 자기 착취에 의한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교회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안정제역할을 하는 데서만 머문다면 마르크스가 했던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종교는 아편이다.”

 

해방과 자유는 기독교의 존재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 당하고 있는 억압과 죽음의 상태에서의 완전한 해방과 자유이지 현재의 불의한 체제를 견뎌내게 하는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은 사회 전복 사건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안정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개인의 그 어떠한 고립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십자가는 자기 해방이지 자기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착취가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누리는 참된 자아의 실현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 있는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경험하는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위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유를 돌려주도록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해체시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한다. 자칫 하면 복음이 신자유주의 체제가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할 수 있다를 더 강화시키는 데 오용될 수 있다. 교회는 이러한 위험성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복음이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해방시키는 데 올바로 사용되도록 선지자적 목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역사는 소통이다

- 걸그룹 AOA '안중근 사건'을 보고

 

역사는 해석이다. 해석은 소통의 핵심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해석된다. 안중근은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 운동의 핵심 인물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이겠으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은 영웅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에서 보듯이, 영웅은 한 집단을 규합하는 윤리의 차원으로 승화된다. 그 집단에서 영웅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규범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안중근은 단순한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웅이다. 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한다.

 

걸그룹 AOA의 지민과 설현이 예능프로그램에서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뭇매'를 맞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문제를 못 맞힌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의 범주를 벗어났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중들과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역사는 소통의 핵심인데, 그 핵심을 잃어버렸으니 비난의 화살이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안중근에 대한 역사의 해석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갈등은 해석의 불일치에서 온다. 아직까지도 5 18일만 되면 '광주민주화투쟁'을 놓아두고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는 그 사건을 애써 다르게 해석하려는 불온한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역사 공부를 하며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나라의 소통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장사를 해서 돈벌이를 하더라도 '소통'에 실패하면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한다. 아이돌 그룹을 통해 장사하는 연예 기획사나, 아이돌 그룹의 당자자들도 이 점을 꼭 숙지해야 한다. 노래하고 춤추는 '예쁨' 자체는 소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대중들의 소비재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소비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떠받쳐주는 '소통'이다.

 

소통에 실패하면 누구나 괴롭다. 인기가 치솟은 걸그룹으로서 뭇매를 맞아 괴롭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무엇이 진정한 소통인가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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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