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와 평화

 

2차 대전이 한창 중이던 19443, 미국에서는 엄청난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장소는 뉴 멕시코 로스 알라모스(Los Alamos, New Mexico), 프로젝트 책임자는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였다. 이들이 만든 것은 원자 폭탄이었고,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폭파 시험을 트리니티(Trinity)’라고 이름 붙였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용어가 인류 최초의 대량 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쓰인 것은 비극일까 희망일까. 1945716일 새벽, 원자 폭탄 폭파 시험에 성공한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이제 우리 모두는 미친 사람이 된 거야!”

 

어떤 신학자는 그들이 대량살상 무기 프로젝트에 트리니티의 용어를 가져다 쓴 이유를 자신의 흔적을 감추어 죄의식과 양심을 숨기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원자 폭탄 실험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대량살상 무기 개발에 기여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했는데, “가장 파괴적인 무기의 개발은 언젠가 전쟁이 아니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희망하였다. 어떻게 파괴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는가?

 

오펜하이머의 희망은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된 망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사야서 17장에는 다메섹(아람)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져서 양 떼가 지나가다가 몸을 뉘어도 아무도 그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17:2, 우리말성경).

 

여기서 아로엘은 아람의 통치가 미치는 최남단의 도시 이름이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려진다는 말은 아람의 모든 영토가 철저하게 파괴된다는 뜻이다. 그곳은 이제 사람이 살지 않고, 양들이 살게 되는데, 양들이 그곳에서 몸을 뉘어도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놀라게 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엔 마하리드, ‘평화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2절 전체를 다시 해석해 보면, 철저하게 파괴된 다메섹에 평화가 온다는 뜻이다.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다. 파괴가 되었는데, 어떻게 평화가 오는가? 파괴가 어떻게 평화를 가져오는가?

 

우리는 이 구절을 신앙의 역설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읽어야 한다. 물론 실제 삶에서도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를 목격할 수 있다. 원자 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곧바로 원자 폭탄 생산에 들어가, 한 달 여 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터뜨린다. 그 대량 살상 무기를 통해 일본의 두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것으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 세상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파괴와 평화의 상관관계는 너무도 비참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파괴와 평화는 메타포로 읽는 게 좋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활동한 영국 국교회의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거룩한 시편(Holy Sonnets) 열 네번째 시를 보면, 파괴를 통한 평화, 파괴를 통한 구원의 모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렇다.

 

삼위 하나님이여 / 내 마음을 부수소서!

당신을 위하여 / 내 마음을 두드리소서.

주님의 숨으로 나를 들이 마시고, 내게 빛을 비추어

고쳐주소서.

내가 일어서도록 나를 꺾으소서.

주님의 능력으로 /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새롭게 하소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구한다. “나를 부수고, 때려, 태우소서!” 이것은 참 역설적인 표현이다. 나 자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때, 나는 새로워진다. 파괴가 평화를 불러온다. 사실, 인간의 존재가 그 누구에게도 위협(놀라게 하는 것, frighten)이 되지 않는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내가 파괴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평화를 가져온다.

 

다석 류영모는 이 역설을 깨닫고 몸소 실천했던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다석(多夕)은 저녁(, 죽음)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처럼, 밤이 되면 널판자를 깔고 거기에 누워 죽음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죽음의 실존을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없는 듯 있는 사람이 되어, 그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 선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았다. 한 끼만 다른 생명을 취해 먹고, 나머지 두 끼는 자기 살을 먹었던 것이다.

 

이사야서 17장은 파괴와 평화의 역설을 말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날에 사람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을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 눈을 맞출 것이다.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제단은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 상이나 태양 기둥은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17:7-8).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신뢰의 태도를 가지고 보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신뢰한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나 이룬 것은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손을 신뢰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뿐이시다. 자기가 철저하게 파괴된 인간은 이것을 깨닫고, 오직 자기를 지으신 이만 신뢰한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평화의 상태이고, 이 평화는 파괴를 통해서 온다. 파괴와 평화의 역설이 심장을 찌른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