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개론서, <십자가와 보좌 사이>를 읽고

 

저자가 결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은 요한이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밝힘으로써 요한계시록을 보다 접근하기 쉬운 책으로 만드는 것”(116)이다. 책은 요한계시록을 문학으로 읽을 것을 요청한다. “만약 우리가 요한이 사용한 방법들(문학적 장치들)을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독자들이 읽기를 꺼려하는 책이거나 현대의 예측 차트가 아닌 본래 목적의 그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언으로 보일 수 있다”(18).

 

저자는 저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문학적으로 읽어내는 일을 해 나간다. 책은 개론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첫 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는 방식이 아닌 5개의 소주제(구속의 드라마 /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서술 / 하나님의 적들에 대한 서술 / 어린양의 전쟁 /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와 대조하면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는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와의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때 하나님의 백성과 불신자들의 행동은 구속의 드라마 속에서 분리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신실하고 정결하지만,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의 기만에 속아 넘어간 불신자들은 추하고 악한 일들을 통해서 사탄에게 신실하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요한은 발생반복(recapitulation/재현)’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구약성경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뚝 덜어진 문서가 아니고,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는 문서라는 뜻이다. 구약과의 연장선 상에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찬양이고, 하나님이 아실 일에 대한 소망의 기록이다.

 

개론서라는 지면의 제약상 저자는 모든 문학적 비유를 세세히 풀어내지는 않지만 요한계시록을 본래의 기록 목적에 합당하게 해석하도록 돕기에 충분하게 풀어낸다. 특별히 요한이 왜 7이라는 숫자를 사용했는지(7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보편을 나타낸다), 또한 왜 6이라는 숫자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대적인 짐승의 숫자를 만들어 내는지(6은 인간의 숫자이고, 7이 아닌 불완전한 숫자이다)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게다가 저자는 하나님의 대적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왜 거룩하지 않는 삼위일체(unholy Trinity)인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맞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조롱하는지를 비교적 자세히 밝힌다.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 주로 참고한 학자는 리처드 보캄(Richard Bauckham)G. k. 비엘(G. K. Beale)이다. 두 학자의 책을 참고하여 논의를 진행시켰다는 것은 이 책의 개론적 설명이 신뢰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보컴과 비엘은 요한계시록 연구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은 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적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요한계시록 읽기에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키면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현대인들에게 탄압방탕이 개인들의 행동 속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 속에 내재된 것을 환기시키면서, 주류 문화와, 정치권력에 맞설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저자가 미국인이어서 그런지 미국이 잘못한 옛일(Jim Crow )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갈 뿐, 현재 미국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고, 지면의 제약상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신기하고 안심되는 점, 그리고 책에 대한 신뢰를 할 만한 또다른 점은 저자가 삼위일체 사역 뿐 아니라 전례(Liturgy/예전), 그리고 성례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 것을 감안하면 약간 이례적이다. (물론 미국의 학풍은 한국의 학풍과는 달리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이 있다.) 그가 그러한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적으로 배우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반복해서 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형성되기때문이다(109).

 

저자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나 쾌락, 거짓 예언과 마주할 때, 여전히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반응하도록 하기 위해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믿는 이들을 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성만찬의 중요성과 세례의 중요성, 그리고 말씀 선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특별히 저자가 말하는 성만찬의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다”(112). 저자는 말한다. “기억과 소망, 이 두가지 모두는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갈 힘을 부여한다”(113). 세례도 말씀 선포도 모두 이 두 가지를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한 전례들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하고, 우리는 하늘의 보좌를 소망한다. 그래서 책 제목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두 번의 오심(십자가와 보좌) 사이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믿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면서 살아간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의 일에 대한 감춰진 코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소망의 복음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