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 되기

-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디지털은 혁명이라 할 만큼 많은 것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디지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한병철 교수는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시대의 병폐를 논하며 이런 말을 한다. “, , 진리는 농부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냥꾼이다. 정보의 사냥꾼들은 먹이를 찾아 디지털 사냥터인 인터넷을 쏘다니고 있다. 농부와는 반대로 사냥꾼은 이동성을 지닌다. 그에겐 정착하도록 강제하는 경작지가 없다. 그들은 거주하지 않는다”(171).

 

이러한 정보사회, 디지털 사회, 투명사회를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주의하지 않으면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정보의 사냥꾼들로 전락하기 쉽다. 사실, 그러한 일들이 이미 설교가 예배의 중심인 개신교회 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의 설교는 정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사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는 어느새 정보로 변모한 듯 하다. 이것은 매우 기형적인 현상이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선택된 디지털 매체가 복음의 내용을 바꾼 듯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먀샬 맥루한이 말한 매체가 곧 메시지다의 실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병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디지털 무리는 그 속에 영혼과 정신이 없다. 기독교인이 디지털 무리에 속하는 순간 그들은 영혼과 정신이 없는 정보만 습득하게 되는 데, 이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접하게 되는 설교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디지털 매체 속의 설교자가 하는 설교는 그것을 듣는 이로 하여금 설교자와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설교를 자기의 삶에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한 자유를 맛본 디지털 무리 속의 기독교인은 자기 입맛에 맞는 먹잇감(설교)’을 찾아 인터넷을 이리저리 쏘다니게 된다.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 사냥꾼으로 변한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 열매는 그냥 맺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수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열매는 정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쌓아야만 얻어지는 지식을 통해서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농부는 기본적으로 열매를 얻기 위해서 한 곳에 오래 머무른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다. 이 땅에 두발 딛고 살며 신과 진리를 찾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더욱더 농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교회는 그의 경작지이다. 농부가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에 오래도록 머무르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앙의 열매를 얻기 위해 경작지인 교회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 농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단순히 한 교회에 오래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가 가져다 주는 사냥꾼 되기의 습성에서 벗어나 농사 짓듯이 복음을 진지하게 대하며 그 복음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농부가 되기보다 사냥꾼이 되려는 습성이 강하다. 어떻게 이러한 습성에서 벗어나 농부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다.

 

우선 개인적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목회자의 설교 듣기를 지양하는 일이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인격이다. 복음은 나에게 유익이 되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나의 삶을 통째로 바꾸게 하는 능력(transformation)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지, 그분의 만 듣는 일이 아니다. <투명사회>에서 말을 빌려와 표현하자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디지털 매체, 특별히 인터넷에는 시선이 없다. 일방적 관음적인 태도밖에는 없다. 디지털 시대에 물든 사냥꾼 같은 교인은 설교가 나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떠나고, 신선한 정보가 없으면 떠나고, 스타일이 자기와 안 맞으면 떠난다. 디지털을 통해 접하는 설교에는 함께 머무르는 시선이 없다.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는 우리의 삶을 바꾸는 복음이 되지 못하고, 눈과 귀와 마음만 즐겁게 해주는 외설적 정보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복음을 정보로만 접하면 행함이 없는신앙인이 되기 십상이다.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실천은 설교 중심의 예배를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다. 성례전이 가지는 일차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받는 일에는 참여가 필수 요소이다. 성례전은 곧 참여이다. 물론 설교학자 메어리 힐커트 같이 설교를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에게는 설교(말씀)와 성례전을 구분 짓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지 몰라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설교는 기본적으로 참여의 요소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배 참석자들은 설교 시간에 목사의 일방적인 선포를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은혜 되는 말(?)’에 그저 아멘정도로 화답하는 것이 참여를 이룬다.

 

성례전 중심의 예배로 바꾸는 일이 디지털 시대에 중요한 이유는 성례전은 기본적으로 머무름거리 두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정보재미감동'에서 떠나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한 기억(anamnesis)에 머무르게한다. 사냥꾼은 이동하지만, 농부는 머무른다. 사냥꾼은 먹잇감(열매)을 즉시 보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한다. 사냥꾼은 먹잇감을 찾아 떠돌지만, 농부는 열매를 상상하며 그 상상 안에서 오래 참고 견딘다(참여한다).

 

인터넷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허물어 그들 간에 친밀성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출시켜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를 만든다고 한병철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76).

 

인터넷을 통해 시선과 인격이 거세된 설교를 듣는 것과, ‘제의와 예식의 객관적 기호들참여가 없는 예배는 결국 나르시시즘만 가득한 교인을 만들 뿐이다. 성례전은 적극적인 참여(머무름)’인 동시에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75). 성례전은 개인의 주관적 심리상태와는 상관 없이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머무르게 하며 참여하게 한다. 그러므로 친밀성을 가장해서 머무름거리 두기를 제거해 버리는 디지털 시대에 성례전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더욱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는 편리한 시대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리품 팔아 복음을 들으러 가야 하는 수고 없이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내 입에 딱 맞는 말씀을 편리하게 골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이, 농부로 태어난 우리가 어느새 먹잇감을 찾아 이러저리 쏘다니는 사냥꾼이 되어 간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그리스도 신앙인은 농부이다. 복음은 경작지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씨를 뿌려 경작해야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사냥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내 입에 맞는 먹잇감고르듯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설교자의 설교는 가능한 한 멀리 하자. 그리고 하나님과 나’, ‘이웃과 나’, ‘나와 나사이에 거룩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적극적인 참여를 갈망케 하는 성례전적인 예배를 세워나가자. 이것이 디지털 시대에 농부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Posted by 장준식

제로(nothing)로 놓기

 

나이 들어가며 맛있는 게 없다. 음식 자체가 맛있는 음식은 없고, 그저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최고로 맛있다. 그래서 요즘엔 무엇이든지 맛있게 먹으려고 먼저 속을 비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할 때는 기대를 전혀 안 했는데 뜻밖의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이다. 특히, 사람에게 상처 받지 않고, 그 사람으로 인해 기쁘고 감사하려면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로 나의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인생에서는 채우는 일보다 비우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원래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원래 벌거벗고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물건이든, 기억이든, 사랑이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모든 것을 제로(nothing)로 놓기, 이것은 인생의 가장 뛰어난 기술(art)이다.


Posted by 장준식

케노시스의 일상화

 

미국 시골에서 목회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보니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시몬느 베이유가 신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고난" "불행"으로 가득 찼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이 별볼일 없고 초라해지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일반 인간이 그토록 혐오하는 "케노시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 짊어졌다. 그 당시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 별볼일 없고 초라한 인생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걸어갔다.

 

삶의 자리는 참으로 수렁과도 같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안 된다. 빠져나오려고 힘 쓸수록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감각은 마비되고 어둠은 깊어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은 고난의 향유가 아니라 케노시스의 일상화이다. 잠시 고난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래서 그에겐 자유가 있었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모두 ''이라는 십자가를 수동적으로 짊어졌다. 살면서 우리는 질병이라는 폭력, 늙어감이라는 폭력, 죽음이라는 폭력에 의해 고통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성실하게 마주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질병과 늙어감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케노시스의 일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란?


성탄절기를 맞아 양로원 봉사 가서 느낀 거지만, 복지국가에서는 특별히 개인이나 단체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잠시 방문해서 어떠한 물건이나 돈 같은 것(물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을 전달해 주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마워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필요해 하지도 않는다.


우선,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시간 내어 와서 그들과 말동무 해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그들과 놀아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 ‘정기적인, 그리고 지속적인 방문을 통한 친구되기가 복지국가에서 필요한 진정한 봉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세금을 잘 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지국가에서는 세금을 가지고 복지정책을 세우기 때문에 성실한 납세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나의 성실한 납세를 바탕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이 가는 것이 복지국가의 특징이므로, 세금을 성실하게 잘 내는 것을 통해 봉사하게 되는 것 .


여기서 더 나아가, 복지국가에서의 봉사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진정한 봉사인 것 같다. 세금을 아무리 잘 내도 그것이 엉뚱한데 쓰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낸 세금이 합당한 곳에 합당하게 쓰이고 있는 것을 모니터링 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정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만족할 수 있는 정책,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약자들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세우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일은 행복한 복지국가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것 같다.


복지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현혹시키는 당근이 아니다. 복지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 특별히 사회적 약자가 불평등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한 복지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그러한 복지는 돈이 많다고,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일깨워주고 보듬어 줄 때, ,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있을 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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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감리교 개혁의 길을 묻다

-       예후의 개혁과 여로보암의 죄

 

지금 한국 감리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타락했다고 지적 받고 있는 오므리 왕조(아합 왕조)와 다를 바 없다. 감독 선거는 금권선거의 온상이어서 돈이 없으면 감독이 되지 못하고, 목사들은 자기의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 출신 학교에 따라 줄 세우기 바쁘고,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전혀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불합리한 선거법이 지배하고 있는 감리교의 요지경을 보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 중에 자격이 미달인 감독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각 신학교 출신(감신, 목원, 협성) 목사님들 중에 이상한 목사님은 없었다. 내가 만나본 젊은 목회자 중에 멍청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감리교는 수렁에 빠져 있을까? 개인적으로 만나본 감독님들이나 각 신학교 출신의 목사님들, 그리고 젊은 목사님들은 모두 다 훌륭했다. 그래도 수많은 한국 교회의 기독교 교단 중에 감리교 목사라고 하면 어디에다 내 놓아도 빠지지 않는 분들 아닌가. 그런데 왜 감리교는 이렇게 수렁에 빠졌을까?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이어도 사회가 부도덕하면 도덕적인 인간도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이는 라인홀드 니버가 가졌던 관심사인데, 그는 개혁주의 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독특한 정치신학 사상을 펼쳤다. 정치신학에서 특별히 국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국가가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그 구성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발붙이고 사는 도덕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 민족이 2차 대전 당시 그토록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던 것은 그들이 부도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국가’(사회, 시스템)가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이 정치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지금 신학계에서는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는 독자적인 분야가 생길 정도로 요즘 신학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사회 체계의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열왕기하 9장에 등장하는 예후는 선지자 엘리사의 후원에 힘입어 저돌적인개혁에 돌입한다. 예후의 개혁은 아합의 집안에 초점을 맞춘다. 잘 알려졌듯이, 모반을 통해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형성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방 여인 이세벨을 며느리로 들이면서 이세벨의 고향인 시돈(페니키아)과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오므리 왕조는 아합 왕 때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들의 오만 방자함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놓고 무시하며 바알신을 섬기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힘 없는 자들(대표적인 예로, 나봇)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괴롭힌다.

 

오므리 왕조의 횡포에 맞선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줄기차게 전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심판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의 끝자락까지 치닫는다. 결국 오므리 왕조에 대한 심판 예언은 요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를 통해서 실현되는데, 예후의 종교 개혁과 숙청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카락이 솟을 정도로 오싹하다. 예후는 아합 일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우선 아합의 아들 아람을 제거하고, 그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유다 왕 아하시야를 동시에 제거한다. 그리고 오므리 왕조 타락의 원흉 이세벨을 제거하고, 그의 모든 자녀들을 제거한다. 또한 그들과 연관이 있는 친인척들을 비롯하여, 바알 숭배자들 모두를 제거한다. 그야말로, 조선 시대 연산군 때 있었던 것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 작업이 벌어진다.

 

예후의 개혁은 그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고백하고 있듯이,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었다(왕하 10:16). 엘리사 선지가가 기름을 붓고 열왕기하 기자가 예후의 피비린내 나는 개혁에 대해서 악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예후의 열심은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회의 구조적 악에 관심이 높았던 호세아 선지자는 예후의 행동을 비판한다(1:4). 또한 예후의 개혁에 대한 열왕기서는 이러한 평가로 마무리 된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 28-29).

 

여기서 지적 받고 있는 예후의 잘못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예후는 부도덕한 인간(아합 일가)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부도덕한 사회(시스템)를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서 부도덕한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바꾼다 할지라도, 그 도덕적인 인간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사회, 시스템)가 부도덕하면 구조적인 모순과 악은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여로보암의 죄가 큰 것이다.. ‘여로보암의 죄는 구조적인 악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로보암은 솔로몬 이후에 정권을 잡은 뒤, 북쪽 열 지파의 지지에 힘 입어 북이스라엘을 세운다. 그러나 그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만 있던 솔로몬 성전으로 북쪽 지파의 사람들이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결국 자신의 통치 영역에 두 개의 산당을 세워 금송아지 형상의 여호와를 모셔 놓고 거기서 예배하게끔 종교 시스템을 바꾼다. 신명기 사관의 입장에서 기록된 열왕기서에서 여로보암의 죄로 지적되는 이 문제는 독특한 성전신앙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제도였다.

 

그러나,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벧엘과 단의 산당에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저 멀리 남쪽 예루살렘 성전(솔로몬 성전)까지 가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도적인 악이었다.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께 순수하고 거룩한 신앙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벧엘과 단의 산당에 설치된 금송아지 신상(여호와의 신상)에게 절하며 예배 드리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제도()는 그 제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한 을 생산하도록 인도한다. 내가 만나본 감독님들과 목사님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었지만, 현재 감리교의 법 제도는 감독이 되고자 할 때 또는 어떠한 이익을 대변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잘못된 제도 안에서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가피한 을 생산해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오는 10월에 있는 입법총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장정개정위원회는 열심히 의견을 모으고 개정법안을 마련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열심은 예후의 열심에 비견할 만 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공청회를 거쳐 확정 지어가는 장정개정위원회의 개정법안을 바라보자니, 그들에게 예후의 열심은 있는데 결국 여로보암의 죄를 피하지는 못할 것 같아 우려된다. 특별히, 그 동안 감리교회의 혼란의 중심이었던 감독제도와 선거권, 그리고 신학교 통합 문제에 대한 안일한 대처는 예후(장정개정위원회)의 열심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여로보암의 죄로 남을 것 같다.

 

도덕적인 인간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려면 도덕적인 제도는 필수다. 도덕적이지 못한 제도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을 기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이번 입법총회는 도덕성에서 다른 교단 목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감리교의 목회자들이 그 도덕성을 잘 유지하도록, 도덕적인 제도를 기필코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예후의 열심이 여로보암의 죄(제도적인 모순)까지도 바로 잡는 온전한 개혁을 이루게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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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가인의 후예에서 아담의 후예로

 

미국은 졸업의 계절이다. 졸업한 이들의 웃음이 담긴 사진이 도처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졸업한 이들의 희망찬 웃음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은 정말 냉혹하기만 하다.

올해인가 작년인가, 연세대학교 졸업식에 이런 현수막이 걸린 적이 있다. "연대 나오면 뭐햐나, 백순데.."

 

요즘엔 아무리 높은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다. 학위가 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기 만족이라도 받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인 시대이다. 자기 만족도 없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인양 죄책감마저 드는 시대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처럼 그나마 낫다( 3:17). 수고하면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런 형벌을 받는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4:12).

요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 같다.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수고한 만큼 먹고 살 수 없으니 말이다.

 

땅을 아무리 갈아도 효력이 나지 않는데, 땅 가는 것 자체로 만족을 얻으며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을 먹을 때 오는 만족만큼 근본적이고 더 큰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자기만족만 누리다가 그렇게 그냥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 즉 일명백수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는가.

 

1994년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곡을 발표하여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할 수 있어.”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가방 끈 길게 만들어 주는 데만 관심 있는 한국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서태지는 가방 끈이 길어야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신화를 깨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깨졌는가?

 

한국 사회의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은 단순히 가방 끈을 늘려 보겠다는 관심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가방 끈이라도 늘려야 빡빡한 현실이 좀 달라질까 시도해 보는 젊은이들의 절박함이 담겨 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은 바라지도 않는다. 아무리 땅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는 가인의 후예에서 벗어나, 그래도 평생 수고하면 먹고 살 수는 있었던 아담의 후예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자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학위를 받아도 갈 데가 없고, 목사 안수를 받아도 갈 데가 없는 답답한 현실에 신음하고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요즘 젊은이들에게서는현실인식능력을 찾아보기 힘들고, 현실에 처절하게 저항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너무 박약하다는 것인 것같다.

- 사회체제의 불의에 대해 사자후를 토하는 젊은 마르크스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뚫고 지나가는초인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 사회체제가 불의한데 개개인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불의한 사회체제를 바꾸기 위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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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율(통제)의 가치

 

“창조적인 유망주에게는 어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 - 거스 히딩크

 

최근 한국 축구 유망주 이승우 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을 두고 말이 많은가 보다. 그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 국가대표 이영표 선수와 히팅크 감독이 한 마디씩 했다. 한 매체에서 이영표 선수는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선수 아르연 로번을 어떻게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거듭나도록 훈련시켰는지를 소개하며 이승우 선수에게 뼈 있는 충고를 했다.

 

내가 얼마 전 읽은 어떤 심리학자의 글에서도 확인한 바, 어린이가 성장하여 사회에서 훌륭한 인재로 커 나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과 규율' 두 가지이다. 가장 뒤쳐지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부류는 부모에게 사랑만 받고 '통제' 받지 못한 아이들이고, 오히려 사랑을 못 받고 통제만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앞의 아이들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사랑과 규율(통제)'이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가치는 잘 알아도 통제(규율)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미국 사회에서 감동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검소함이고(허례허식이 없음) 다른 하나는 이들의 질서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은 자유분방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미국 학교를 다니는데, 실제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보면 강력한 규율 아래 아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본다. 한 마디로, 학교가 무슨 수도원 같다. 복도를 걸어 다닐 때 뛰어다니거나 시끄럽게 잡답하는 친구가 없으며, 어딘가로 이동수업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한국의 초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아이들에게 적용되는 강한 규율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규율을 잊은 채 자기 자식에게 무조건 사랑만을 베풀기에 여념 없고, 학교에서는 부모와 학생의 눈치를 보며 아이들에게 강력한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창조성은 자유분방함에서 오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창조적인 인재를 키워 창조경영의 국가로 도약하고 싶다면,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규율(통제)'에 대한 부분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먼저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규율에 자기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훈련부터 필요하다. 그 다음에 오는 자유로움이 가치 있는 창조, 방종하지 않는 창조를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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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

 

子曰, 非其鬼而祭之 ,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조상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 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고,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非其鬼而祭之비기귀이제지를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에 비견할 수 있다. 이런 자에 비견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공자는 이런 자를 일컬어 용기 없는 자라고 한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義라고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의로움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의와 대면하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의에 죽고 의에 산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를 행하다 불의한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빛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다. 그 빛이 세상에 왔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둠이기 때문에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더러 그 빛을 싫어했다. 그래서 세상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의로운 것이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의로운 것) 그것을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에게 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단행위이다. 그것은 믿는 자가 아니라, 용기 없는 자에 불과하다. 믿음은 결단이다. 절대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인 파울 틸리히는 이것을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고도 표현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세상은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서슴없이 불의를 행한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이다. 즉 비겁한 세상이다. 비겁한 자들이 잘 사는 세상이다. 용기 있는 자는 거지 꼴로 병신취급 받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로운 일이다. 그러니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자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포장하는 일은 쉽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것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들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것을 보고 행할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용기가 있는가? 그런 용기를 지닌 자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아니, 그런 자만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리라. 의로운 것을 보고서도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요, 의로운 것을 보고서 행하는 용기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 그래서 난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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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먼저다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이.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목회하면서 가장 황당한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믿음 좋은 신앙인이라 여기며 교회 봉사(주일성수, 헌금, 교회의 각종 행사 참여)를 열심히 하는 이를 만날 때이다.

 

한국 교회의 신앙은 '믿음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사람됨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믿음'을 먼저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급선무이고, 나머지는 구원 받은 후에 해결해도 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정녕 기독교인은 구원에 환장한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소위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는 구원파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플라톤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이것은 구원을 너무 이원론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교리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그 시대의 언어로 옮기기 위해 헬라철학을 빌려온 것일 뿐 그렇다고 헬라철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헬라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바탕으로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정작 성서의 사상은 이원론을 거부하고 전인적이고 종말론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여기서 전인적이라는 말은 소위 육체와 영혼이 구분된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육체와 영혼의 통합이다. 그리고 부활은 이 세상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체를 향해 되어져가고 있음에 대한 비전(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됨을 생각지 않는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사람됨 없는 구원은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사람됨의 믿음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사람됨의 구원이다. 믿음을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실현하지 않으려는 자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오히려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됨이 먼저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됨에 대한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를 믿음 있는 자라고 부르지, 믿음 있는 자가 곧 사람을 사랑하는 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자라고 하지 않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이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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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

 

교계의 상황을 보면, 개혁의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이런 저런 활동들을 통해 개혁을 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활동은 기득권자들을 향한 저항이 대부분이다. 참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들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들도 결국 새로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개혁의 대상을 향해 외치는 개혁의 주체들은 분명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란, 내 생각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흙탕물을 휘저으면 흙탕물은 계속 탁한 상태만 지속될 뿐이다. 흙탕물은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고다. 그러면 어느 정도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 앙금이 가라앉고 투명한 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연을 고치겠다고 휘저으면 자연은 더 망가지고 만다. 자연을 고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사람 손이 타면, 무엇이든 망가지고 마니까.

 

교회 개혁을 위해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은 참 칭찬할만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그 시도들이 또다른 흙탕물을 생산해 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꼭 필요한 것 같다.

 

, 그런데, 무엇인가를 가만히 냅두기에는 인생이 너무 심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를 계속 하려고 드는 것 같다. 결국, 성자란 심심하고 지루한 일상을 잘 견디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그냥 잠잠히 자기 자신이나 잘 달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개혁이 아닐까?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는 늘 교집합이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랴.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 문구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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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관계가 대등하지 못하면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만이 발생한다.

 

종교가 과학과 대화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종교와 과학이 대등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다. 그 동안 종교는 다른 분야의 학문을 그저 '시녀'로만 보아 왔다. 철학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래서 중세신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다. '철학은 종교(신학)의 시녀이다."

 

물론, 종교가 과학을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인식했다기 보다, 과학이 종교의 수준으로 상승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 같다. 서로 간의 이해 관계가 어찌되었든, 현재 종교는 과학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개봉된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는 그 동안의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종교의 독점적 주제인 종말과 구원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상황적 배경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지구인들의 생존 위기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더 이상 양식이 없어 모든 생존자들이 곧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절망적인 상황을 과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몸부림이 표현되어 있다.

 

멸망해 가는 지구인들을 구원할 프로젝트의 이름은 <나자로 프로젝트>이다. 나자로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죽어 장사된 뒤 사흘 만에 예수의 신적 능력을 통해 되살아난 인물이다. 이왕 성서에서 프로젝트의 이름을 따올 거면, 궁극적 부활인 <그리스도 프로젝트>로 할 것이지, <나사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것이 흥미롭다. 어쩌면 이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적 능력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시아의 구원 능력을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나자로를 끌어 들이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나자로 프로젝트는 두 개의 플랜을 갖고 있다.  플랜 A는 거대한 우주선을 띄워 생존자를 모아 지구를 탈출하는 방안이다. 플랜 B 1천개의 인공수정란를 외계로 보내 인종을 새롭게 퍼뜨리는 계획이다. 플랜 자체가 과학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말론적 신적 개입이 없다.

 

영화의 재미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천체 물리학 이론이 이야기 전개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중력, 상대성이론, 웜홀, 그리고 블랙홀 등이 그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천체 물리학 이론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생존에 대한 희망을 품고 우주 여행을 떠난 쿠퍼 일행이 10년 전 정착 가능한 별을 찾아 먼저 떠난 우주비행사의 신호를 좆아 들어간 밀러 행성은 중력으로 인한 시간의 왜곡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쿠퍼 일행은 밀러 행성에 단지 3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 지구 시간으로 23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다. 또한 블랙홀을 통과한 몇 분의 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56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시간이 시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의 줄거리 중 가장 압권은 쿠퍼가 블랙홀을 통해 사건의 지평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시간의 이편과 저편, 또는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빨아들여 새로운 공간인 사건의 지평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사건의 지평이 구분되고 있는 장면이 참 흥미로운데, 이 장면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결국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사건의 지평의 비밀을 풀어낸 쿠퍼의 딸(머피)은 어릴 적 서재에서 경험했던 신비로운 유령 또는 중력의 작용을 해독함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 젖힌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유레카!”

 

인류는 과학의 힘으로 멸망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블랙홀을 빠져 나온 쿠퍼는 딸(머피)이 창조해 낸 새로운 구원의 세상(구퍼 정거장)으로 구출되어 지구 시간으로 거의 80년 만에 딸(머피)을 만난다. 우주에서 겪은 시간의 왜곡 현상으로 실제 나이는 124세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떠날 때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쿠퍼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늙은 딸’(머피)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I knew I’d see you again.”

(“나는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아빠가 묻는다.

How?” (“어떻게?”)

“Cause my daddy promised me.”

(“왜냐하면 아빠가 나랑 약속했기 때문이죠.”)

 

종말과 구원을 과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차라리 종교적이다. 이 영화가 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종말과 구원은 우리 인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구원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종교적이냐 과학적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을 실제적으로 가져다 주기 위해서 종교와 과학의 끊임 없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종교와 과학, 대화의 끝에 발견한 구원의 길을 마주하며 함께 이렇게 외치는 날을 기대한다. 과학적으로 유레카!” 또는 종교적으로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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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ㅡ 내 슬픔을 누구에게 호소하리?

 

러시아의 문호, 안똔 체호프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부 이오나이다. 마부 이오나는 얼마 전 아들을 잃었다. 그것이 그가 최근에 겪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사건 자체가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간 아들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물론 이것은 신앙고백적 차원이라기 보다, 아들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아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부 이오나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혼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탄 손님들과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긴장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한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과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마음 사이에서 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제 긴장은 아들이 죽은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사람과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 사이에서 온다.

 

모 인터넷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슬픔에 관한 기사이다. 그런데 기사를 보면, 그의 슬픔은 세월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위 소설의 주인공인 이오나의 상황과 똑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그 어머니에게서 새롭게 생겨난 긴장은 이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고, 한 형제자매라고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남이었다. 우리를 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체호프가 그의 소설 <슬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만 남을 뿐이다.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쩌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만 피해자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싶어한다. 혼자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부도 국회도 교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체념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회를 보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사건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긴장이 생겨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체호프가 주목했듯이,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다. 소설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는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말하라니? 소설 속에서 아들을 잃은 이오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아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거나 아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왜 대통령은 국회 연설 하러 가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들어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그냥 지나치는가? 왜 국회의원들은 유가족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않고,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가? 왜 교회는 그들의 슬픔을 들어주지 못하고, 그들과 제대로 말 한 번 나눠보지도 않고, 서둘러 귀를 닫는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들은 그들의 슬픔은 말하고 싶어한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들의 슬픔을 제대로들어주자. 혼자 방구석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을 치며 벽에 대고 말하게끔 내버려 두지 말자. 제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을 견디고 있는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들의 슬픔은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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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식

 

사랑은 삶의 예술입니다.

그것이 존재케 하려면 창조의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요.

신뢰라는 토대도 있어야 하고,

용서라는 버리기의 기술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함께 시간 보내기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술이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듯이,

사랑도 삶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입니다.

사랑은 존재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상태로 존재합니다.

사랑은 창조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형상을 드러내는 신비입니다.

저절로 빚어지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눈물과 땀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맛 있고, 그 잎사귀는 묘약입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아픈 곳을 치료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따스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우리는 그것을 행복이라 부릅니다.

사랑은 수고의 열매라는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공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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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구원론

대속이 아니라 참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한다. 이것은 구원이 대속적 구원이 아니라, 참여의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통상적으로 '대속적 구원'이 더 익숙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 또는 예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인 것 같다. 크로산과 마커스 보그는 그들의 책에서 이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것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니다. 특별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알려진 마가복음은 그 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마가복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책을 보면, 예수의 복음은 '참여'이지 '대속'이 아닌 것이 드러난다.

 

교회의 정황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참여의 구원'에서 '대속의 구원'으로 신학이 바뀌는 경향이 있다. 후대에 씌어진 성경으로 갈수록 그 정황이 드러난다. 마가복음과 히브리서를 대조해보면 그 정황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 상황이 박해에서 제국의 지지로 바뀌면서, 교회의 가르침은 '참여'보다는 '대속'쪽으로 구원론이 기울어진다. 그럴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교회가 대중들을 콘트롤 하기에는 '참여'보다는 '대속'이 훨씬훨씬 수월하고 '은혜스럽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대속의 교리는 대중들을 위협하기에 좋은 문구이다.

 

성만찬은 원래 그리스도와의 일치, 또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를 뜻하는 것이었는데, 요즘 교회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대속교리가 낳은 병폐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는 이미 오해를 낳아,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믿음이란 원래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지, 어떠한 특정한 교리를 믿거나, 특정한 인물(예수)을 그저 의지하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에 도반으로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 구원이란 그 길에 들어섬이지, 믿음으로 인해 어떤 상태나 공간으로의 이동(천국으로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철저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이 말이 생각난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싶다면 꾸준히 의지력을 기르는 것 보다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대속이 아니라, 참여이다. 예수는 오늘도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당신의 일에 우리가 참여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런데 예수의 인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부활'에로의 여정이다. 그래서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데, 두렵고 떨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두렵고 떨리는 마음도 위로를 얻으리.

 

나는 요즘, 예수 믿는 게,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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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하며

 

서정주 시인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저는 이 문구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늘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다.” 정말 그렇습니다. 제 인생에서 교회라는 것을 빼면 그 무게가 2그램도 안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를 팔할이나 키워준 교회가 바로 벌떼교회입니다. 서른, 잔치를 시작하기 위해 유학을 나오기 전까지 제 인생은 온통 벌떼교회와 뒹굴었으니까요. 그래서 벌떼교회는 제게 참 특별합니다.

 

제 인생과 연관된 벌떼교회뿐만이 아니라, 벌떼교회는 그 역사 자체가 참 특별합니다. 벌떼교회를 다니는 모든 분들이 그 특별함을 인식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깊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헌신된 일꾼들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그 특별함은 1930년 정초, 덕적도에서 있었던 한 부흥집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외갓집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잇는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 서인 계열의 정부 고위관리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덕적도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외갓집은 덕적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1930년도 정초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한 겁니다. 감리교 목사로서 한국의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용도 목사가 1930년 정초에 덕적도로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온 겁니다. 외할아버지(오지섭목사님)께서 청소년 시기에 그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셨다가 이용도 목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정통 한학자 집안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는데,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외할아버지를 통해 내려진 신앙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 결국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신앙의 씨앗은 담쟁이넝쿨이었나 봅니다. 담쟁이넝쿨이 온 담에 퍼지는 것처럼, 외할아버지를 통해 뿌려진 신앙의 씨앗은 금방 온 집안에 퍼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퍼졌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영접을 넘어 외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이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 중에 벌떼교회로서 눈 여겨 볼 수 있는 것은 1954년 여름, 연세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원으로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벌떼교회(당시 과천하리교회)를 세웠던 학생들 중 송인호, 김광현 두 사람입니다. 송인호(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역임)는 저희 어머니(오세숙 사모)의 당숙이시고, 김광현(정신여고 역사교사 역임)은 저희 어머니의 4촌 오빠입니다. 결국 벌떼교회를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저희 집안 분들이셨던 것이죠.

 

저희 집안은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이어 받아 성장한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께서는 유명한 부흥사셨고, 그 자녀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는데, 감리교 역사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많은 목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특별히 한국 선교사로서 목원대학교를 세운 도익서(찰스 스톡스) 박사 그리고 목원대학교의 초대학장을 지내신 목원이호운 학장(찬송가, ‘부름받아 나선 이몸작사가)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안으로서 외할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저희 아버지 모두 도익서 장학금으로 신학공부를 하셔서 목회자가 된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용도 목사와 한국 4대 부흥사 중 한 명으로 추앙 받고 있는 박재봉 목사는 저희 집안의 사돈이십니다. 박재봉 목사의 집안도 그 형제와 자녀들이 모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집안인데, 그 중에서 박재봉 목사의 동생인 박재훈 목사는 한국 찬송가 사()에 길이 남을 분입니다. 그분이 지으신 찬송가로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서 돌아오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등이 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즐겨 불렀던 수많은 동요들 중 펄펄 눈이 옵니다”, “산골짜기 다람쥐”, 그리고 어머님 은혜등이 그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박재봉 목사의 야사 중 유명한 것은 한국 주먹계를 주름 잡던 시라소니를 전도한 사건입니다. 시라소니 아들도 목회자가 되었는데 현재 저희 집안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교류 중에 있습니다.

 

벌떼교회는 태생부터가 참 특별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희망의 촛불을 밝히기 위한 청년들의 선교사업을 통해서 생겨난 교회로서, 그 태생이 선교적입니다. 20세기 신학의 교부로 추앙받고 있는 칼 바르트가 교회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공동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벌떼교회는 그 증언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로서 태생된 벌떼교회에 그 증언의 역할을 특별하게 감당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담쟁이넝쿨과도 같은 목회자의 집안에서 성장한 장윤식 목사가 이 교회의 담임을 맡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역사적입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벌떼교회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저희 집안 어른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그 자손이 우연하게 목회하게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신앙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우로서 곁에서 지켜본 형님 장윤식 목사는 우리 집안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영성을 가장 닮은 목회자입니다. 강직한 성품도 그렇고, 불 같은 메시지도 그렇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정이 그렇습니다. 저는 고백하기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라고 하지만, 형님 장윤식 목사를 들여다보면 나를 키운 건 십할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인생에서 교회를 빼고 나면 어떤 인생의 무게가 남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회와 목회자가 이토록 한 몸, 한 뜻, 한 역사를 지니기는 정말 힘듭니다. 정말이지 하나님의 특별한역사하심이 없으면 이토록 절묘한 조합은 나오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지구와 달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의 주변을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오묘한 섭리와도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벌떼교회 60주년을 축하합니다. 인간의 삶 측면에서 60년은 이제 황혼으로 접어든 시기이지만, 하나님의 타임테이블 가운데 놓여진 벌떼교회는 이제 청춘의 시기로 들어섰다는 생각을 합니다. 새로운 성전 건축과 함께 벌떼교회는 이제 막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지닌 교회, 목회자와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만들어 가는 벌떼교회에 몸담은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으신 분들입니다.

 

R. M. 크리소스톰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다른 곤충보다 존경 받는 까닭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 희망으로 탄생한 벌떼교회,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이 교회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집니다. 특별한 역사와 사명을 가진 벌떼교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를 부지런히 지켜내는 꿀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떼교회 출신이며

장윤식 목사의 아우이며

컬럼버스감리교회 담임인

喜樂堂 장준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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