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

 

미국 달력에는 Father’s day(아버지 날)라는 날이 있습니다. 미국에 오래 사신 분들에게는 낯설지 않지만,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은 낯선 풍경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Mother’s day Father’s day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Parent’s day(어버이 날)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더 편만한 미국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죠. 한국은 아무래도 아직까지 가족의 개념이 개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을 따도 구분하지 않고, 어버이 날의 형태로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 전직 경찰이 지은 ‘아버지’라는 소설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권위와 힘이 축소되고 자꾸 나약해지면서 소외되어 가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 상을 아주 실감나게 그려내 많은 사람의 눈시울을 적셨던 소설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를 흔히 ‘고개 숙인 아버지’라고 합니다. 가장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잃고 직장인으로서의 정당한 자기 역할을 상실한 중년 이상 된 아버지들의 자화상인데,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왠지 가슴 찡한 정감과 서글픔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먼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 ‘아빠’를 살펴보면 그 역사가 상당히 깊습니다. 15세기 문헌에는 ‘아바’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흔히 사극에서 등장하는 ‘아바마마’의 ‘아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바’의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엄마’의 전 단계인 ‘어마’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아바’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어로 쓰여 왔는데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압바’ 또는 ‘아빠’로 그 어형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빠에 비해 아버지는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아바지’로 나옵니다. 평범한 호칭어인 ‘아바’에 접미사 ‘지’가 붙어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여기에 붙은 접미사 ‘지’는 고대의 관직명인 ‘막리지’, ‘세리지’ 등에 붙은 ‘지’와 비슷한데 이때의 ‘지’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아바지’라는 말이 ‘아버지’로 변한 것은 19세기 말입니다. 지금의 아빠와 아버지는 같은 호칭어이면서도 하나는 유아어 다른 하나는 성인어로 그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아빠라는 말은 1960년대만 해도 그렇게 자유롭게 쓰이던 호칭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구조가 핵가족화되고 생활양식이 서구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에 대한 호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마중물 기도의자

 

요즘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지만, 옛날에는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펐습니다. 요즘과 옛날 중간에는 펌프질을 해서 물을 펐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물을 한 바가지 부은 다음 손잡이를 잡고 아래위로 펌프질을 하면 펌프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던 펌프를. 그 물을 받아서 생활용수로 사용을 했지요. 펌프에서 물을 얻으려면 물 한 바가지를 꼭 부어야만 했습니다. 그 물 한 바가지를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콜링 워터(Calling Water)라고 하고, 경제학 용어로 쓸 때는 죽어 있는 투자욕구, 성취욕구를 유발해 주는 정책을 일컫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깊은 곳에 숨겨진 것을 퍼낼 때 마중 나가서 데리고 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도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자를 마중물 기도의자라고 이름 붙여 봤습니다. 기도의자를 사용해서 기도할 때 기도의 샘이 터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여본 이름입니다. 이 기도의자는 특별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도움을 줍니다. 기도할 때 여러 가지 자세를 잡고 기도할 수 있으나, 뭐니뭐니해도 기도는 무릎 꿇고 할 때 가장 겸손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접힌 다리가 저리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무릎이 상해서 건강에 치명타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바로 기도의자입니다.

 

기도의자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무릎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을 무리 없이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물론 기도가 1시간 이상 길어지면 기도의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만, 어찌되었든 기도의자는 기도의 샘에서 거룩하고 참된 기도가 콸콸 쏟아져 나오도록 도와주는 마중물 역할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마중물 기도의자를 가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기도가 나오는 것이죠.

 

아무쪼록 기도 없이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마중물 기도의자가 기도의 샘이 터지는데 조그만 힘이 될 수 있다면,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톱밥을 먹어가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기도의 샘아, 터져라!

 

Posted by 장준식

아무것도 얕보지 말라

 

곳곳마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들꽃의 정체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꽃을 피우는 절기 이외에는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기 보다는 자신의 정체를 잡초로 위장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평소 우리는 그것이 잡초라고 생각하기에 뽑고 또 뽑아 그 씨를 말려버리려고 합니다. 잔디 깎는 기계로 깎아대고, 잡초를 죽이는 화학약품도 뿌려봅니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봄이 오면 고개를 쑥쑥 들어대는 들꽃을 보면 차라리 신비롭습니다.

 

 

요즘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보게 되는 들꽃 때문에 오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즐겁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갖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안 하다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만 관심을 가져주니 말입니다. 올 해부터는 들꽃에 관심을 좀 가져야겠습니다. 관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내년 봄에도 어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들꽃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이지요.

 

푸른 하늘만큼, 시원한 바람만큼, 따스한 햇살만큼 요즘 저에게 기쁨을 주는 들꽃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얕보지 말라."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얕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솔로몬의 영화도 저 들에 핀 꽃들보다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들꽃처럼 소소한 것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일 것입니다.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서 눈에 들어노는 들꽃을 물끄러미 바라 보십시오. 제가 들꽃으로부터 들은 목소리가 들리나 안 들리나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아무 것도 얕보지 말라."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신비로운 일이 여러분의 귓가에 펼쳐지기를 두손 모아 빕니다.

Posted by 장준식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미주연회의 파행을 돌아보며

 

전쟁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미주연회의 파행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는 푸르른 5, 그리고 천사의 도시(Los Angeles)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연회 전날 있었던 엘에이 다저스의 경기에서 류현진이 완봉승 하는 것을 구경했다면 비행기 값이 아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이전투구를 보려고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던가!

 

1936,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씌어진 유명한 두 개의 소설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그것이다. 언론기관에 몸담았던 이력이 같은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생생하게 목도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특별히 헤밍웨이의 소설은 1943년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나 오웰이나 그들의 소설에서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영화로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눈이 가겠지만, 헤밍웨이는 실제로 그 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정치에 대해서 영화가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울리는 종은 조종(弔鐘)’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남을 위한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종소리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나의 일부를 소멸시키니, 그것은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말지어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나는 제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 인간성의 파괴를 보았다. 그리고 파시즘을 보았다. 헤밍웨이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본 바로 그것들이다. 솔직히 목사로서의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계급장 내려 놓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합법적인 장소 아니던가! 그러나 어떠한 게임이든지, 그것이 파워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법칙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깨지면 이미 인간성은 허물어진 것이다. 논리와 명분이 없는 고성방가욕설과 비난은 이미 상대방을 악으로 환원시킨 인간성의 상실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게다가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번져 나온 파시즘을 보았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찬양하는 사상이다. 욕설이 오가는 사이에 어떤 이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감리교는 연급이야! 너 이 XX 몇 학번이야!”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했을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 저도 모르게 입이나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명분이 부족한 탄핵이나, 서로 욕설을 해대며 멱살을 잡는 것이나, ‘감리교는 연급이야!’를 외치는 말과 행동은 감리교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의 사상이 얼마나 파시즘적인가를 알려주는 지표다. 국가, 민족, 인종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개인(인간)의 자유를 철저하게 짓밟았던 파시즘의 병폐가 감리교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회의는 전반적으로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여성 목회자에게, 그리고 소위 연급이 안 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발언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파시즘이 판을 치는 회의장에서 여성 목회자나 연급안 되는 젊은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가는 생매장 당할 분위기였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21회 미주특별연회는 이번 10월에 열리는 입법총회에 두 개의 미주 선교연회 존립에 대한 입법안을 상정할 것을 결의하고 끝이 났다. 무엇을 위해 미주연회는 둘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차라리 이념싸움이나 교리논쟁 때문이라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는 일과 같다. 미주연회에 존재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결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처럼 살면 지옥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연회가 끝난 다음 날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부터 줄 똑 바로 서라는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다. 어느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어쩌면 내년부터 못 만나게 될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글이 남겨져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헤밍웨이와 오웰이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스페인 내전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스페인이 겪은 상처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파의 승리로 일단락 지어졌지만, 이미 5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 자행된 독재와 대대적 숙청은 인간성 상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 그러나 그 내전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스페인의 국력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끝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멸망하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목회자라면, 또한 우리가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순간 잠시 멈춰 서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미주연회는 분단의 아픔을 봉합하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적어도 법을 만드는 힘을 지니신 분들은 입법총회에서 어떤 종소리를 울리게 할 것인지 심사숙고해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 미주연회에 울리는 종소리가 '조종(弔鐘)'이 아니라, 그 옛날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생명의 종소리, 교회 종소리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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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희망이 절망에게

 

절망아 잘 있었니? 나 희망이야. 오늘 내가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야. 옛날에 키에르케고르 아저씨가 너에게 심한 말을 했었지? 너를 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잖아. 나도 그 말을 듣고 너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어. 병도 아주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했었어. 사실 그렇잖아? 절망이 너를 만나는 사람마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으니까.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 모습을 보았어. 특히,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그랬지. 그는 자신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절망에 싸여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아. 그리고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당하자 절망해서 뿔뿔이 흩어졌잖아. 그 중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 원래 직업인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었지. 그 때 그는 고기 잡으러 나가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밤을 지새고 말았어. 3년 예수님을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그물질을 해서 그랬을까? 그래서 감각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유는 바로 너, 절망을 품었기 때문이야. 절망 속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내 생각에는 그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됐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도 그만 두고, 세상을 떠돌다 절망 속에서 삶을 짧게 마감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절망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니? 너를 품고 있으면 꼭 이르게 되는 죽음,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셨기 때문이야.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불러. 그 부활이 바로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인 거야. 너 절망이를 품고 죽음에 이르는 아무리 깊은 병에 걸렸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그래서 부활은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거야. 내 친구 절망아!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기를 바래. 너의 그 깊은 절망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부활절에 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절망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너는 더 이상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나와 같은 희망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희망 밖에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희망이니까. 우리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자!

Posted by 장준식

그리스도인의 삶 역설적인 삶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시의 처음 부분입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매우 유명한 시인이지요. 이 사람의 이 “황무지”라는 시 때문에 4월은 잔인한 달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했는지를 곰곰이 들여다 본다면, 그 잔인함은 어떠한 잔인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방에서는 보통 3,4,5월을 봄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3월은 겨울과 봄이 교차되는 달이고, 5월은 봄과 여름이 교차되는 달입니다. 오직, 4월만이 순수한 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봄은 잠자고 있던 모든 생명을 깨워냅니다. 시인의 말대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뒤흔들어” 깨웁니다. 요 며칠 비가 많이 왔던 상황과 같습니다. 게다가 4월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인 “부활절”이 들어 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는 우리들에게 4월이 잔인한 달인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멜 깁슨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잔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잔인함은 부정적인 잔인함만을 말하는 것일 뿐, 위에서 시인이 말하는 잔인함은 이러한 잔인함이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잔인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잔인하게 죽기도 하셨지만, 영광 중에 부활하기도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죽음” 또는 “악”의 세력 입장에서 보면 잔인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또는 “악”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영혼을 깨워 라일락보다 더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게 하고, 잠자는 영혼을 깨워 그 뿌리를 소생시키고, 향기로운 삶과 힘찬 발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으로 뒤집힌 것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4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사망권세"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적입니다.

 

Posted by 장준식

예기치 못한 기쁨

 

마가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람’이 전체적인 흐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생활하는 동안 놀람의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놀람이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에 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기치 못한 일을 겪었을 때 놀랍니다. 예기치 못한 일은 두 가지를 결과로 가져다 줍니다. 하나는 아픔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마다 놀랐고, 그 놀라움은 기쁨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놀람과, 그 놀람에서 생겨나는 기쁨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자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던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람 중의 놀람이었고, 기쁨 중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놀람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기치 못한 때,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긴장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놀라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못하는 신앙은 긴장감이 없는 신앙이요, 마음이 곤고한 자, 굳은 자는 놀람을 놀람으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에게는 기쁨도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기쁨 가운데 살아갑니까? 혹시 기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놀람이 없다는 것이고, 놀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마음이 곤고하고 굳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대가 갖고 있지 않은 기쁨을 얻으려면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어야 한다.

 

예수님은 즐겁지 않은 길, 골고다 언덕 길을 걸으셨기 때문에 기쁨 중의 기쁨인 부활의 기쁨을 맛보셨고, 그리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즐겁지 않은 길도 기꺼이 걸으려는 그 마음, 바로 그 마음이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요, 그 마음에 놀람의 경험이 있을 것이요,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보지 못했던 기쁨을 날마다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삶을 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을 언제나 주시는 우리 주님을 늘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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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아가페 사랑 묵상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에 대한 언어가 별로 다양하지 못하지만,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한 언어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Lewis) 의 책 네 가지 사랑을 보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구분하고 있는 네 가지의 사랑은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입니다. 우리나라 말 번역본은 그것을 각각 애정, 우정, 에로스, 그리고 자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톨게(애정)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반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나타낼 때도 씁니다. 두 번째로 필리아는 흔히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 S루이스는 스톨게(애정)와 에로스와 관련해서 필리아(우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에로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스톨게(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양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아(우정) 없이도 우리는 살고 번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리아(우정)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에로스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에로스에 대한 얇은 이해에 불과합니다. 에로스의 깊은 뜻은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자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과 이 아가페 사랑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것, 나와 비슷한 것, 그래도 사랑할 만 한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아가페의 사랑은 나와 전혀 다른 것,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네 가지의 사랑을 모두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스톨게 사랑도, 친구 간의 필리아 사랑도, 어딘가에 빠져드는 에로스 사랑도, 그리고 원수까지도 받아들이게 하는 아가페 사랑도 그 순수함과 진실성을 모두 잃어버린 듯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묵상은 아가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죄로 인해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온갖 사랑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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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희망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흐르고 있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물론 우리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발을 담갔던 강물과 두 번째 담갔던 강물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강물은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시간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번 살았던 시간에 또 한 번의 삶을 살아낼 수 없습니다. 강물처럼 시간도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반복이 아니라, 매 순간 특별하고 새롭습니다. 요한계시록 215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때를 향해 우주 만물은 매 순간의 새로움을 통해 그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통해서 그 새로운 창조를 경험합니다. 일 년 단위로 돌아오는 교회력은 시간의 반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새로움을 경험하게 합니다. 새로운 창조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교회력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에 교회력은 새로운 창조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과 같습니다.

 

교회력의 시작이 대림절(Advent)부터인 이유는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의 초림(2천년 전 유대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First Coming)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재림(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Second Coming)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4주 동안의 절기(Season)로 지키는데, 그 첫 번째 주일에는 “희망”이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한 것도 아니요 두려운 것도 아니요, 희망찬 일이기 때문입니다. 금방 다시 오신다고 하면서 승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자 초대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실망하고 절망한 나머지 신앙을 저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과 절망이 깊어지면 인간은 그 일에 무감각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지 2천 년이 흐른 21세기를 사는 요즘 기독교인들은 “재림”이라는 사건에 무감각해졌습니다. 더군다나 그릇된 재림신앙이 판을 치는 바람에 이제는 “재림”이 무감각을 넘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기독교인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희망 없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바로 재림신앙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림절기를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묵상을 통해 재림신앙과 신앙의 존재 근거인 희망을 되찾아야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희망의 근거는 바로 이 한 마디의 외침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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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밥

 

"싸움은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일어나고 있단다. 그것은 두 늑대의 싸움이지.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 그 녀석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거짓, 이기심 등이지.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인데 기쁨, 평안, 사랑, 소망, 겸손, 진실, 아량, 믿음 등을 가지고 있단다."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그 싸움은 어린 손자의 마음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손자가 묻자 추장은 대답했다. "내가 먹이를 주는 녀석이 이기지."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민을 듣는 듯한 예화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싸움 속에서 삽니다. 추장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이기는 쪽은 내가 먹이를 주는 쪽입니다. 악한 늑대는 육신의 정욕을 먹고 삽니다. 육신의 정욕을 먹이로 준다면 악한 늑대는 내 안에서 날마다 승리할 것입니다. 선한 늑대는 말씀을 먹고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먹이로 준다면 선한 늑대가 내 안에서 날마다 승리할 것입니다. 참 간단한 논리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만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한다면, 우리의 삶이 패배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긍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패배의 눈물이 더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패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패배 속에서 인정하고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멈추지 않는 한(결코 하나님의 은총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긍정의 밥을 계속 먹게 될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내 안에 있는 선한 늑대에게 긍정의 밥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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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법정과 천국법정

 

법정에 가면 사람들간의 약속인 법을 어긴 사람들이 판사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검사는 기소를 하고, 변호사는 변호를 해줍니다. 판사는 최대한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것이 공정한 재판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판결이 나올 때마다 원고든 피고든 어느 한 쪽은 판결에 불만을 제기합니다. 그래서 항소합니다. 그러나 평생 동안 진행되는 재판도 아니고, 완벽하게 공정한 판결이 나올 때까지 재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좋든 싫든 판사의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실 재판제도는 하나님의 정의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습니다. 완벽하게 판결할 수 있을 만큼의 지혜를 인간은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계명 중에서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조항들은 사회법정에서도 취급되지만, 1계명에서 제 4계명까지의 조항들은 사회법정에서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십계명의 제 1계명에서 제 4명까지만 완벽하게 지켜도, 나머지 계명들은 자연스럽게 지켜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법정이 필요 없겠죠. 하지만 사회법정이 필요한 이유는 사회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죄목들(특별히 우상숭배)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하나님이 대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사회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이웃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회법정에서나 천국법정에서나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겠죠.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당당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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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기도)하기 좋은 계절

 

테베를 정복한 오이디푸스 왕은 뒤늦게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 왕이 자기 아버지요 아내로 삼은 여인은 자기 어머니임을 알게 됩니다. 친부모도 알아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렸습니다. 의식을 잃었던 오이디푸스가 정신을 차리고 한 첫마디는 놀랍게도, “, 빛이여!”였습니다. 눈이 없는 사람이 빛이라니, 신하들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오이디푸스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그대들은 이 빛을 보지 못하리. 세상의 눈을 지닌 그대들은 이 빛을 알지 못하리.”

 

오이디푸스 왕이 본 빛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가 눈을 뽑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눈을 감기만 하면 됩니다. 눈을 감되, 내 안에 살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은 하늘이 높고 바람이 시원하고 낙엽 지는 계절이라 사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색이란, 당연히 기도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겠죠. 여러분은 기도할 때 왜 눈을 감으십니까? 세상의 이꼴저꼴 다 보기 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감아버리는 것입니까? 습관처럼 눈을 감으십니까? 아니면, 눈을 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어느 것이든 기도할 때 우리가 갖는 마음 자세일 것입니다.

 

가을을 맞아 제가 한 가지 제안하겠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기도할 때, 눈을 감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서 기도해 보십시오. 오디이푸스 왕이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빛과 같은 것일까요? 그 빛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빛을 볼 수 있는 영성에 한 발짝 더 가가가는 가을, 사색의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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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꽃의 화용(花容)만 봅니다. 꽃의 겉모습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을 보면서 예쁘네 안 예쁘네 라는 평가만 내립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꽃의 향기와 아름다움만을 본다면 그것은 꽃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꽃은 화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품(花品)을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일컬어 사군자(四君子)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꽃나무들의 화품 때문이지 화용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의 외모만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서 잘 생겼네 못생겼네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인품(人品)을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성인군자는 인품이 매화처럼 매서운 세파에도 굽히지 않는 고매함을 지니고 있고, 난초처럼 기세와 자태가 곧고, 국화처럼 굳은 지조를 지니고 있고, 대나무처럼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생긴 것은 다를지라도 ()이라는 측면에서는 서로서로 통하는 것들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선비정신으로 통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인품이 중요합니다.

 

인품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지, 외모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야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신품(信品)"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품이라고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신품으로 판단 받습니다. 기품 있는 믿음,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죠. 믿음이 매화처럼 고매하고, 난초처럼 곧고, 국화처럼 지조 있고, 대나무처럼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면, 기품 있는, 품위 있는 믿음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중시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바로 "신품"입니다. 기품 있고, 품위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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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하나님 나라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인어공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동화들입니다. 이 동화를 지은 작가의 이름이 안데르센입니다. 위에 열거된 동화들은 모두 안데르센 동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들 입니다. 덴마크 출생인 안데르센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안데르센은 어머니에게서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아버지에게서는 상상력과 교양을 배웠습니다. <성냥팔이 소녀>는 어린 시절 너무도 가난해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하고, <미운 오리 새끼>는 안데르센이 작가로 데뷔한 이후에도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은 것을 소재 삼아 쓴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가난과 홀대에 시달렸던 그가, 그토록 인류 역사에 남을 동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가난과 홀대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권태로움이 그를 세계적인 동화작가로 만든 것입니다. 가난과 홀대 속에서 그가 그냥 가난과 홀대만 보았다면 그는 결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동화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데르센은 가난과 홀대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습니다. 그의 동화는 그 속에서 그가 본 것을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동화는 꾸며낸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가 경험하고 인식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근거로 삼고 있는 성경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권태로운 이 세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 인식한 믿음의 사람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써 내려간 하나님 나라 이야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창조,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경험하고 인식하려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의 영감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성경은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세상 이야기와 다를 바 없는 권태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지만, 성령 받아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성경은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 속에서, 그리고 권태로운 삶 속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가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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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시이며, 기도문입니다. 시편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언어는 탄식의 언어입니다. “탄식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한탄하여 한숨을 쉼. 또는 그 한숨”. 그리고 국어사전이 제시하는 예문은 이렇습니다. “그는 밤이 너무나 긴 것을 탄식하며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었다.” “그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탄식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시면 탄식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8:26). 그것이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숨 쉽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로 그 탄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그 이유를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탄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뻐하거나, 감사하거나, 둘 다 하거나 하면 됩니다.

 

탄식하지 않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살아 있는 자가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 마음이 이미 죽어 있는 자이거나, 성령 받지 못한 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고, 내 이웃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에 대해서 죽어 있는 사람은 탄식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걷히길 바라지 않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어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빛의 자녀라면 지금 내 삶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이 물러가길 탄식할 것입니다. 빛의 자녀는 어둠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탄식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탄식의 언어는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고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며 가슴을 두드리게 만듭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어떠한 언어와 어떠한 모습으로 기도하시는지요? 성령이 함께 하시는 탄식의 언어로, 탄식의 형상으로 기도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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