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졌다는 것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의 세계가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가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언어 자체의 유희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아니, 언어의 장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언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가령, ‘종말이라는 언어를 생각해 보자. 종말이 담고 있는 언어의 뜻은 세상의 마지막 날정도다.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 날이 도대체 뭐가 어쨌다는 것인지, ‘종말이라는 언어에만 빠져 있으면 세상의 마지막 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언어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래야 종말이 가리키는 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신학적으로 종말은 하나님이 온전히 드러나시는 때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은 심판의 때로도 불린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불러 줄세워 놓고 정죄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만물이 벌거벗겨진 채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빛을 감당할 자 누구랴! 종말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인물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종말론적 사건이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만이 종말의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하니, 좀 허무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종말론적 사건을 긍정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수단(증거)을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단은 믿음이외에는 없다. 그래서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 같이 공허하고 불안하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지만, 인간의 믿음은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뿐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인간의 불안한 믿음이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인간의 불안한 믿음을 붙들어 주신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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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