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너머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며, 알아차린 그 세계를 어떻게 지금이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 이것은 설교자의 과제이다. 나는 텍스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세계를 확실히 본 것 처럼 자신하며,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확실한 언어로 전달하는 설교자가 가장 무섭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텍스트 너머의 세계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는 종말의 때이다. 종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텍스트 너머의 희미한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야만 하는 설교자의 직무는 참으로 고단하고 미련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로 부르신 그분의 뜻 가운데 설교자에게 그 직무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에 설교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단에 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무서운 설교자가 아닌, 부족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설교자로, 강단에 겨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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