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신학하기]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말하고 있는 식민주의는 통렬하다. 그에 의하면, 식민주의란 같은 인간이지만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근원적 폭력이다. 식민지의 사람들은 제국주의가 만든 특정한 '인간형'에 적응할 때에만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고, 그런 대우를 받는 식민지인은 자신과 같은 식민지인을 똑같은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식민지의 피지배층은 시민 자격에서 소외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소외된다. 따라서 식민주의는 식민지 사람들이 이중의 소외를 겪고 자아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승우, <공공성>, 126쪽)
프랑스의 식민지를 겪었던 알제리 출신의 정치 철학자 파농이 폭로하고 있는 식민주의는 동일한 경험을 한 한국인들에게 큰 영감을 준다. 특별히 그가 주장하고 있는 정치 교육의 정의, "영혼을 창조하는 것"은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시민들이 식민경험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형성된 식민주의 인간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파농이 말하는 "영혼을 창조하는 것"의 정치 교육은 대단히 신학적이다. 그는 대중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창조하도록 정치 교육을 해야한다고 말하며, 이를 통해, "조물주 같은 존재는 없고, 어떤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일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식민주의는 사람을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결정짓지 못하게 만든다. 식민주의가 더이상 현실에서는 없는 일이지만, 식민주의에 의해 형성된 '인간형'은 계속해서 의존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이미 스스로의 영혼을 창조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때 독재자는 폭군이 아니라 메시아로 등극한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많은 독재자들이 한국사회를 망쳐 놓았지만 그들을 향해 '욕'을 하기보다 그들에 대해 오히려 '향수'를 지니는 한국인의 특징은 바로 그런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는 이러한 성향을 더 강화시킬 수도 있고, 그러한 성향을 끊어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의 신학하기란 매우 세심해야 하며, 매우 정치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종교가 사람들을 더 의존적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한다면,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의 시민들은 식민주의가 심어 놓은 의존적인 인간형에서 벗어나기 더욱더 힘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복음'은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신자들(또는 시민들)을 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었을 뿐, 파농이 말하고 있는 "영혼을 창조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파농이 주장하고 있는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조물주 같은 존재는 없고, 어떤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일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이라고 해서 이것을 '무신론'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사실 이것은 그 반대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을 통해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지, 의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쓰는 용어가 얼마나 사람들을 무의식 중에 '의존적인 인간'으로 만드는가. '죄인', '속죄', '주일성수', '십일조' 등의 종교적 언어는 그 행위에 매이게 만들어 사람들을 '컨트롤'할 뿐이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교회가 얼마나 "영혼을 창조하는 일"에 실패했는지 알 수 있다. 교회는 차이와 다양성을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을 억압하는가? 교회의 대형화는 차이와 다양성을 죽이는 방식으로 이룩될 수밖에 없다.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의 고발은 정확하게 교회에서도 발생했다.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에서 신학하기, 또는 신앙생활 하기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이 또는 신앙이 영혼을 창조하기는 커녕 영혼을 더 형편없이 망가뜨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신학하는 이들, 목회하는 이들,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이들은 역사공부와 정치교육을 더 넓고 깊게 해야 한다. 종교가 영혼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종교가 영혼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악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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