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 개신교]

에모리대학교 수학시절, 나의 스승이었던 테드 런연(Ted Runyon) 교수는 수업 시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셨다. 본인이 그당시 개신교 신진학자로서 초청을 받아 참관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공의회가 갖는 역사적, 사회적, 신학적 의미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는 이승원의 <민주주의>는 그 공의회를 이렇게 평가한다.

"민주화와 관련하여 이 공의회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중시하면서, 사회 정의에서의 참여,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사회 내 여러 피억압 계층의 청지사회적 구원을 위한 가톨릭교회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 등 가톨릭의 사회적 역할을 명시했기 때문이다"(이승원, <민주주의>, 140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발맞추어 개신교 측에서는 WCC 모임을 통해 기독교가 나아갈 바를 명시한다. 특별히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열렸던 제 4차 웁살라 WCC 총회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계21:5)"는 주제 아래, 교회의 일치를 넘어 인류의 일치를 종말론적 비전으로 제시한다.

인류의 역사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뉘고, '냉전'이 극에 달하던 1960년대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참담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각 진영의 핵무기 경쟁, 사회주의 진영의 부다페스트와 프라하 사건, 자유주의 진영의 케네디 암살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암살,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그로 촉발된 68혁명운동 등, 세계사의 가장 극심한 혼란 시기였다.

무엇보다, 냉전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정의와 경제정의가 땅에 떨어진 때였기에, 종교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웁살라 WCC 총회를 통해 사회정의와 경제정의에 대한 '저항운동'의 기초를 기독교 세계가 놓았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남미의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분에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해방신학은 그동안 기독교가 등한시 해왔던 '사회구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것은 구원론에 대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그동안 기독교는 개인구원에 치중하여 이 세상의 일에는 관심을 적게 가지고 '죽어서 천국가는 문제'에만 집중하였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웁살라 WCC 총회를 통하여, "현실에서 발생하는 가난, 불평등, 불의로부터 해방된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구원론에 편입시켰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창조한 현실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선언인 것이다. (이승원, 141쪽)

한국 개신교의 불행은 신학의 부재로부터 온다. 현재 '사랑제일교회'로 대표되는 보수 한국 개신교회의 반사회적 일탈은 현대신학의 과제를 끌어안지 못하고 한참 지나간 세대의 구시대적 신학 유물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개신교회는 결코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어놓은 새로운 신학의 비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와 발맞추어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신학의 과제를 정립해 나가는 WCC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세상은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시대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배제한 채 '자본'이 공중권세 잡은 자 되어 세상을 뒤흔드는 시대이다. 인간이 배제된 마당에, 하나님은 설 자리가 전혀 없는 시대이다. 이런 '사탄의 체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협력하는 일은 '신학의 부재'가 불러오는 재앙이다. 그 일이 지금 한국 보수개신교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보수 뿐 아니라, 한국개신교 전반이 그렇다. 무리한 교회건축, 세습 등을 보면 어렵지 않게 그 현상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신학생들/목사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갖는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공부하지(배우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의 '적대세력'의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다(가톨릭은 개신교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형제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거대한 물줄기이다. 지금이라도 한국의 개신교회가 그 거대한 물줄기에 발을 담그고, 그것이 가져온 '사회적 구원'이 기독교의 구원론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자각했으면 좋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