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학의 긴급한 과제]

ㅡ 근대성 넘어서기

 

근대성의 키워드는 '자유'이다. 그래서 근대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여기서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인간 중심성'이다. 이러한 근대성을 나쁘게만 보면 안된다. 근대성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사회'에 살며,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발견하고, 개인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데카르트의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별 말 아닌 것 같지만, 그당시 핵폭탄같은 선언이었다. '자아'가 생각하는(사유하는) 주체로서 모든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자아'는 지식의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구사회에서는 '' 또는 '성경'이 그 토대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개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종속되어 살았다. 그래서 그때를 봉건사회라 부르는 것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를 '토대주의(foundationalism)'이라 한다. 데카르트 이후, 그 토대는 생각하는(사유하는) 인간의 자아(cogito)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자아'는 몸, 역사, 전통 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이다. 인간을 매우 긍정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근대(modern)와 후기근대(post-modern)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자유'가 무한정 주어져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 자유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지구촌 곳곳의 장소와 사람들이 있지만, 경제가 발전되고, 적어도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를 향유하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자유의 과잉' 문제를 겪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어딘가에 속박되어 있었다. 특별히, 서구사회는 기독교의 존재가 너무 큰 존재였기에,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개인은 교회(또는 신)라는 거대한 힘에 종속되어 살았다. 가톨릭의 7가지 성사는 인간이 '교회(또는 신)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룩한 성사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그러한 '종속성'에 도전장을 던진 사건이고, 그 이후 서구사회는 '자유'를 위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근대를 이루고, 그 근대의 심화라고 불리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우리는 진입해 있다.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접근하는 (보수) 기독교의 시각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동성애 문제는 ''의 문제라기 보다, '근대성'의 문제이다. 지식의 확고한 토대가 'cogito'가 된 근대 이후의 인간은 '자아'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규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순수한 자아(또는 '누스'(마음)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몸, 역사,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규정할 수 있다. , 내 몸은 '남성'을 가리키고 있다 할지라도, 내 자아(누스)가 나를 여성으로 규정하면, 몸은 비록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내 자아가 나를 '여성'이라고 규정하기 때문에 나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성의 문제를 간과하면서 동성애 문제를 ''의 문제로 논의하는 것은 맹목적인 '정죄'에 불과하다. 이는 근대성을 형성하면서 획득하게 된, '자유'를 부정하게 되는 '역린'을 저지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의 과잉' 문제로 인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환경에서 전방위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요즘, 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걸음을 내딛으려면, 인간이 근대성을 구축하면서 토대로 삼았던 'cogito'의 문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cogito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은 것이 옳은 것인가?

 

현대 철학과 신학은 이것을 질문하고, 이것에 대하여 정당한 대답을 내놓으려고 노력 중이다. 한마디로, 요즘 철학과 신학은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를 통하여 '자유'를 획득했지만, 그 자유라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인다면, 우리가 얻어서 누리고자 했던 '자유'란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데카르트가 생각한 ', 역사, 전통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자아', 즉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이 가능한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복잡하고 난해한, 그리고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바디우나 지젝 같은 철학자도 '사도바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급진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운동을 벌이는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전통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는 것이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자아를 지식의 확고한 토대로 삼으며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간 근대의 인류는 마치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같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총,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운운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정죄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근대성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성의 고착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자아'만 있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놓여 있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도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 도전 안에서 인류는 계속하여 분열을 경험할 것이고, 고통을 떠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 던지고, '독립된 인간의 자율적 이성'을 토대로 삶을 꾸려 나가려는 인류의 삶은 탕자가 경험했던 '허랑방탕한 삶' 그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근대성'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다'고 고백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 안에서 힘을 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