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끝은 어디인가?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흑인여성해방신학, 남미여성해방신학(Mujerista), 퀴어신학, 탈식민지신학, 그리고 장애인신학,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악들과 맞서 싸우느라 참 고생이 많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분명히 느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지목하는 일 보다(물론 이것도 중요하다)는 어떤 악이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사회에 아무렇지도 않게 배어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말 쉽지 않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차별하게 되었는지, 왜 차별하고 있는지 모르고 차별한다. 일례로, 장애인신학에서 말하는 근대의 주체는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주체이다. 근대는 경제적 관심에 의해서 인간의 주체를 파악하지,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성이 없는 인간은 구조적으로 사회에서 거부된다. 그러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거부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것은 장애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현재 탈근대(Post-Modernity)를 살고 있다고 흔히 말하지만, 탈근대는 근대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런데, 경제적 양극화의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보면, 내 생각에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가 아닌가 싶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경제성을 확보하고 어필하느라 모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탈근대는 근대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시키는 현대인은 그렇게 사회에서 소비되다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려질 뿐이다. 이 거대한 소비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니어링 부부가 주장하고 실천했던조화로운 삶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돌파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성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비사회를 돌파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더 갈망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 메시아 사상이 할리우드에 히어로 물들과 만나 판타지로 치닫고 있지만, 판타지가 아닌 희망(궁극적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기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은 깊고, 내 발걸음은 너무 느리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