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호랑이를 죽일 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 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요즘 국제사회의 화두는 인권이다. 국제사회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는 미국이 내세우는 최대의 명분은 인권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 딴지를 거는 명분 또한 인권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의 대학교(Columbus State University) 교수 한 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김일성 탄생 100주년(2012 4 15)을 맞아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북한 관련 비디오 상영이 학교에서 있으니 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모임은 김일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는 아니고, 반대로 북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의 비디오를 상영하는 행사였다. 비디오 상영은 1시간 20분 정도 지속되었는데, 15명 남짓한 학생들이 심각하게 탈북자들의 증언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했다.

 

물론 비디오의 내용은 심각했다. 거기에 등장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인물들이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 억하심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고 자료 화면을 통해서 증언되는 북한의 인권은 참으로 참담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탈북했으니 그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분노가 가득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시선이다. 이들은 그것을 보면서 분명 정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쳐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미국 영화를 보면 대부분 정의의 사도가 악당들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것들이다. 미국인들은 이러한 선과 악의 구조가 편만한 영화를 보면서 자신들 미국인을 선의 축에, 나머지를 악의 축에 감정 이입시킨다. 얼마 전에 본 미국 영화 <Act of Valor>도 그런 류의 영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세계 각국에서 테러와 싸우는 미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인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한 군인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그 영화 속에서 미군은 인권과 평화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수 없는 악당들을 최신식 무기로 괴멸한다. 어려움 속에 처해 있는 자기 편을 살려내기 위해서 악당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로 그려진다. 악당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범죄이고, 인권을 위해, 평화를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정의이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인권보호평화유지를 보면서, 무엇이 인권보호이고 무엇이 평화유지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인들은 위의 영화를 보면서 미군이 아슬아슬하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이마에 땀이 흐르게 할 정도로 스릴 있게 자기 편을 구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자기 편을 구해내면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만 했던 악당들의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국제사회의 힘겨루기에서 단연 화두는 인권이지만, 나는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인권은 그저 그들이 내세우는 그럴듯한 명분일 뿐이다. 힘 센 나라가 힘이 약한 나라를 억누르기 위한 조작된 핑계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 갖는 것은 인권, 즉 사람답게 살기가 아니라 기득권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더라도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이 만일 민중들의 눈에 보기에 부당했다면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민중들은 봉기했을 것이다. 민중들의 눈이 아무리 어두워도 정당과 부당의 최소한의 차이쯤은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민중들을 로마 당국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긍정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 뿐 아니라, 그의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면서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이것은 그들 민중이 예수의 죽음을 정당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로마는 평화를 원했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원했다. 표면적으로만 그 표방하는 것이 달랐을 뿐이지, 그 심층적인 욕망은 모두 한결 같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유지하고 싶었던 것에 불과하다.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원수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는 피눈물 나게 될 것이다!”라는 무서운 속담이 무색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는 자신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세상으로 모두를 이끌어 주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권이 화두인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정의의 축에 놓고 타자는 악의 축에 넣은 뒤, 자신이 하는 일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일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마음에 젖어 사는 우리들. 내가 남을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헤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으면 좋겠다. 무엇이 진정한 인권인지. 무엇이 진정한 평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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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