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절망에게

 

절망아 잘 있었니? 나 희망이야. 오늘 내가 이렇게 펜을 든 이유는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야. 옛날에 키에르케고르 아저씨가 너에게 심한 말을 했었지? 너를 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잖아. 나도 그 말을 듣고 너에 대해서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어. 병도 아주 심각한 병이라고 생각했었어. 사실 그렇잖아? 절망이 너를 만나는 사람마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으니까.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그 모습을 보았어. 특히, 가룟 유다라는 사람이 그랬지. 그는 자신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절망에 싸여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잖아. 그리고 다른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처형당하자 절망해서 뿔뿔이 흩어졌잖아. 그 중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로 돌아가 원래 직업인 고기잡이를 다시 시작했었지. 그 때 그는 고기 잡으러 나가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밤을 지새고 말았어. 3년 예수님을 따라 떠돌아다니다가 오랜만에 그물질을 해서 그랬을까? 그래서 감각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가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유는 바로 너, 절망을 품었기 때문이야. 절망 속에 있었기에 아무것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이지. 내 생각에는 그 상태가 조금 더 지속됐다면, 아마도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도 그만 두고, 세상을 떠돌다 절망 속에서 삶을 짧게 마감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절망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니? 너를 품고 있으면 꼭 이르게 되는 죽음, 바로 그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셨기 때문이야.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불러. 그 부활이 바로 절망이 너에게 기쁜 소식인 거야. 너 절망이를 품고 죽음에 이르는 아무리 깊은 병에 걸렸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그래서 부활은 희망 중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거야. 내 친구 절망아!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기를 바래. 너의 그 깊은 절망도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희망으로 바뀌기 때문이야. 부활절에 너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절망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 너는 더 이상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나와 같은 희망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 앞에서는 희망 밖에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희망이니까. 우리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자!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