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 사랑 묵상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에 대한 언어가 별로 다양하지 못하지만, 옛날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한 언어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C. S. 루이스(Lewis) 의 책 네 가지 사랑을 보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구분하고 있는 네 가지의 사랑은 스톨게, 필리아,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 입니다. 우리나라 말 번역본은 그것을 각각 애정, 우정, 에로스, 그리고 자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선 스톨게(애정)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반대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나타낼 때도 씁니다. 두 번째로 필리아는 흔히 친구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C. S루이스는 스톨게(애정)와 에로스와 관련해서 필리아(우정)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에로스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스톨게(애정)이 없었다면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양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아(우정) 없이도 우리는 살고 번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리아(우정)는 왜 필요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진리를 공유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에로스는 흔히 남녀 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에로스에 대한 얇은 이해에 불과합니다. 에로스의 깊은 뜻은 누군가 또는 어딘가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언제나 다른 무엇인가에 지배를 받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 섬길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 교리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위험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자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씁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과 이 아가페 사랑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것, 나와 비슷한 것, 그래도 사랑할 만 한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반해, 아가페의 사랑은 나와 전혀 다른 것,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에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력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주제가 바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네 가지의 사랑을 모두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들려오는 뉴스를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스톨게 사랑도, 친구 간의 필리아 사랑도, 어딘가에 빠져드는 에로스 사랑도, 그리고 원수까지도 받아들이게 하는 아가페 사랑도 그 순수함과 진실성을 모두 잃어버린 듯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묵상은 아가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죄로 인해 원수 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의 온갖 사랑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파루시아를 살다(신학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삶 – 역설적인 삶  (0) 2013.04.08
예기치 못한 기쁨  (0) 2012.12.15
그리스도인의 희망  (0) 2012.12.13
긍정의 밥  (0) 2012.12.08
사회법정과 천국법정  (0) 2012.11.30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