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미주연회의 파행을 돌아보며

 

전쟁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미주연회의 파행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는 푸르른 5, 그리고 천사의 도시(Los Angeles)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일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연회 전날 있었던 엘에이 다저스의 경기에서 류현진이 완봉승 하는 것을 구경했다면 비행기 값이 아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이전투구를 보려고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동부에서 서부로 날아갔던가!

 

1936,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을 때,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씌어진 유명한 두 개의 소설이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그것이다. 언론기관에 몸담았던 이력이 같은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생생하게 목도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특별히 헤밍웨이의 소설은 1943년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나 오웰이나 그들의 소설에서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인간성의 문제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영화로 본 사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눈이 가겠지만, 헤밍웨이는 실제로 그 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그려진 정치에 대해서 영화가 온전하게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울리는 종은 조종(弔鐘)’이다. 그러나 그 종소리는 남을 위한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종소리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나의 일부를 소멸시키니, 그것은 나 또한 인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말지어다.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린다.”

 

나는 제21회 미주특별연회에서 인간성의 파괴를 보았다. 그리고 파시즘을 보았다. 헤밍웨이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본 바로 그것들이다. 솔직히 목사로서의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계급장 내려 놓고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합법적인 장소 아니던가! 그러나 어떠한 게임이든지, 그것이 파워게임이라고 할지라도 법칙은 있는 법이다. 그것이 깨지면 이미 인간성은 허물어진 것이다. 논리와 명분이 없는 고성방가욕설과 비난은 이미 상대방을 악으로 환원시킨 인간성의 상실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게다가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번져 나온 파시즘을 보았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국가, 민족, 인종이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찬양하는 사상이다. 욕설이 오가는 사이에 어떤 이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감리교는 연급이야! 너 이 XX 몇 학번이야!”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했을 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이 저도 모르게 입이나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법이다. 명분이 부족한 탄핵이나, 서로 욕설을 해대며 멱살을 잡는 것이나, ‘감리교는 연급이야!’를 외치는 말과 행동은 감리교에 몸담고 있는 목사들의 사상이 얼마나 파시즘적인가를 알려주는 지표다. 국가, 민족, 인종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 개인(인간)의 자유를 철저하게 짓밟았던 파시즘의 병폐가 감리교 목회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회의는 전반적으로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여성 목회자에게, 그리고 소위 연급이 안 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발언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니, 파시즘이 판을 치는 회의장에서 여성 목회자나 연급안 되는 젊은 목회자가 입을 열었다가는 생매장 당할 분위기였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21회 미주특별연회는 이번 10월에 열리는 입법총회에 두 개의 미주 선교연회 존립에 대한 입법안을 상정할 것을 결의하고 끝이 났다. 무엇을 위해 미주연회는 둘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차라리 이념싸움이나 교리논쟁 때문이라면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하는 첫 번째 방법을 택하는 일과 같다. 미주연회에 존재하는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을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결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처럼 살면 지옥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연회가 끝난 다음 날 후배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부터 줄 똑 바로 서라는 메시지가 왔다는 것이다. 어느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어쩌면 내년부터 못 만나게 될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글이 남겨져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헤밍웨이와 오웰이 소설 속에서 그리고 있는 스페인 내전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스페인이 겪은 상처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파의 승리로 일단락 지어졌지만, 이미 50만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그 후에 자행된 독재와 대대적 숙청은 인간성 상실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한 때 전세계를 호령했던 스페인, 그러나 그 내전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스페인의 국력은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끝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멸망하는 지름길에 불과하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목회자라면, 또한 우리가 감리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이 순간 잠시 멈춰 서서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미주연회는 분단의 아픔을 봉합하지 못하고 '합법적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적어도 법을 만드는 힘을 지니신 분들은 입법총회에서 어떤 종소리를 울리게 할 것인지 심사숙고해 주시기를 부탁 드린다.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린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우리 미주연회에 울리는 종소리가 '조종(弔鐘)'이 아니라, 그 옛날 온 동네에 울려 퍼졌던 생명의 종소리, 교회 종소리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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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