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III

2.2.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소명이 먼저일까? 자질이 먼저일까? 우리는 흔히 소명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아니 소명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소명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의 소명의식이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자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이 꽂히는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귀에 안 들리고 눈에 안 보인다. 그때부터 소명의식에 대해서 의심을 갖는 것은 불신앙이 되어 버리고, 자신의 목회적 소명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모두 사탄의 농락으로 여긴다. 정말 소명이 전부일까?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부족하다. 그리고 소명에 대한 검증 절차 또한 부실하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이유와 신학적인 부재의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일단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소명에 대한 성찰을 신학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소명을 무당 신내리듯한 그 무엇쯤으로 생각한다. 신학교를 다닐 때 수업 시간에 한국 샤머니즘의 대표적인 의식인 굿에 대한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영적 존재에게 점지를 받은 예비 무당은 그때부터 무당수업을 받는데, 자신이 평생 모시고 살 영적 존재에게서 신 내림을 받을 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신 내림을 받고 무당으로 안수받는 마지막 의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작두타기이다. 신내림을 받은 처녀 무당(무당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무당이라는 뜻)은 맨발로 작두 위를 걷고, 날 선 칼을 깔아놓은 그네를 타는데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당의 본업을 수행한다. 신기한 것은 예비 무당이 영적 존재로부터 점지받는 과정이 예비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비 무당이 점지받고 나서 고민하는 모습이 소명받고 고민하는 예비 목회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점지 받은 예배 무당은 결국 영적 존재의 점지(부르심)순종한다. 예비 목회자가 그러하듯.

 

이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은 분명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무당의 신내림과 목회자가 소명 받는 것이 같을 수 있어?” 물론 본직적인 차원에서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구별하고 구분해낼 수 있는 신학적이고 방법적인 잣대를 구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잠재의식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정신에 오랫동안 깃들어온 샤머니즘적인 정서를 어떻게 걸러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목회자가 무당 신내리듯이받은 소명은 아예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검증을 무색하게 만든다. ‘내가 하나님께 소명 받았다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소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을 보면 한 사람이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기나긴 성찰과 검증을 한 기록들이 즐비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했다는 뜻이다.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적인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소명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 경향이 강한 한국 교회에서 소명에 대하여 성찰하고 검증하지 않는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꼼꼼하게 한 신학자이다. 그는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성직세속직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명을 성직에만 국한시키는 한국교회의 관행과는 완전 딴 판이다. 칼빈은 소명을 직업과 연관시킨다. 칼빈은 직업(calling)’소명(calling)’과 같은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직업이란 소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 말로는 칼빈의 직업 개념을 천직이라고 번역한다. 소명을 직업(천직)의식으로 확장시킨 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이를 목회직에 적용해 보면, 목회직을 수행할 때 중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것이 있다. 소명 없이도 자질만 있으면 목회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칼빈의 소명 개념은 일차적으로 신앙을 전제한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성직과 세속직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명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므로 성서의 한 구절을 들어 주석적으로 더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요한복음 1 43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나다나엘이 예수께 소명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을 부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1:51). 이것을 꼼꼼히 주석하기 위해서는 좀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지면이 허락되지 않으므로 핵심만 짚고 넘어가자면, 소명(부르심)이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명의 개념과는 차원이 다른 소명의 개념이다. 우리는 자꾸 소명의 개념을 무엇인가를 하는 것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정작 복음서에서는 소명을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들(, , 죽음)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즉 이 진리에 나를 매는 것, 이것을 토대로 삶을 사는 것, 이것에 모든 인생을 거는 것이 소명(부르심)’ 받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와 관련된 주석작업을 바탕으로 좀 더 자세히 씌어진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여기 블로그에서 "부르심이란 무엇인가"라는 설교문을 읽어보시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의 소명 설화를 토대로 소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나면 칼빈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소명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지, 우리가 언뜻 이해하고 있듯이 어떤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르심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을 받았다면,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은 나의 천직(calling, 소명)’이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은 목회직을 수행하는 사람만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의사를 하든, 변호사를 하든, 택시기사를 하든, 식당 아줌마로 일하든, 환경미화원이든, 무엇을 하든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명과 자질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존재론적으로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소명이 아니라, 자질이 된다. 목회직은 목회의 소명 받은 사람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자질이 있는 사람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직이든, 판사직이든, 그에 대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어떠한 직이든 그 일을 수행하는 데는 갖추어야만 하는 자질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의 교권이 왜 무너졌는지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소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는 자가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고, 목회직에 대한 자질이 없는 자가 소명이라는 자의적인 착각에 빠져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21세기이다. 아직까지도 잘못된 소명의식에 사로잡혀 목회적 자질을 갖추고 있지도 않으면서 목회직을 수행하려 드는 어리석은 목회자의 영성은 분명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영성에도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를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21세기에서 목회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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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