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문2024. 3. 5. 13:28

라합의 해방일지

(여호수아 2:1-14)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 삼아 우리 자신의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1.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 성경

라합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로 소개된다. 라합을 소개하는 신약성경도 세 군데나 된다. 라합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신약성경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마 1:5). 다른 한 곳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이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마지막 한 곳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이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4). 신약성경 두 군데서 소개되고 있을 만큼 라합은 중요하다.

 

2.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논쟁은 이제 그만

위에서 보듯이 라합은 믿음을 강조하는 성경 히브리서와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야고보서에서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질병 중 하나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을 때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것은 명백히 구원과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믿음이 자꾸 사변화되는 것(어떤 교리에 동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쓰여진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믿음은 어떤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한 인격(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이다. 믿음은 사랑의 깊이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교리는 필요하지만, 믿음을 교리와 결부시켜 교리와의 관계 안에서만 믿음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3. 라합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어 성경에서 라합을 ‘기생’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것은 히브리 원어에 표현된 라합을 순화시켜서 표현한 것이다. 히브리서나 영어 성경이나 세계 어느 나라 성경이든 라합을 ‘창녀’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라합의 직업(?)이 창녀(기생/prostitute)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녀는 고대 사회에서 ‘빚진 자’의 대표 인물이었다. 창녀는 사회적 약자를 나타내는 명칭의 대표 중 하나였다. 성경이 라합을 소개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녀를 ‘창녀’라고 밝히는 것은 빚을 지게 만들고, 그 빚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악한 구조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담고 있다.

 

4. 이스라엘과 라합의 상관관계

이스라엘과 라합은 매우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대표적인 노예 계급이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로 전락한 일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요셉이 총리로 있을 때와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있었을 때만해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요셉을 아는 애굽 사람이 사라지고 요셉을 전혀 모르는 새왕조가 애굽에 들어서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 계급으로 강등되었다. 이스라엘은 노예 계급으로서 약자의 대표였다. 애굽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로서 약자의 대표였고,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다.

 

5. 왜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관심과 소망을 두게 되었을까?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라합은 자신과 같은 약자들이 결박을 풀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여리고 성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였던 라합의 고민은 매우 분명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행보는 라합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여 홍해를 가르고 탈출에 성공했고, 그 당시 이름을 날렸던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격파했다. 라합은 궁금했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게 힘없는 약자, 노예계급이 이토록큰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이끄는가? 라합은 정탐꾼에게 고백한다. “우리가 듣고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수 2:11). 이 고백의 속뜻은 이런 것이다. ‘와 이런 분이 계시구나. 이런 분을 믿고 의지하고 모시면, 나의 삶에도 해가 비추겠구나! 내가 이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 받을 수 있겠구나!’

 

6. 라합의 신앙고백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도구원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처럼 고백한다. 매우 강력한 신앙고백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수 2:11). 라합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다. 그 믿음은 정탐꾼을 돕는 데서 드러난다. 라합의 행동에서 드러나듯이, 믿음은 행함 그 자체이다. 발각되면 여리고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겠지만, 이렇게 사악한 여리고 성의 창녀로 사느니 자신의 인생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걸어보겠다는 라합의 결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7. 우리의 삶에 있는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나를 노예처럼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나를 힘들게 만들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나를 아무것도 아닌 자로 만드는 일이 무엇인가? 그러한 것이 있다면, 라합처럼 해방일지를 써보자. 현대인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유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현대성의 문제는 많은 현대 철학자/신학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비문화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소비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소비사회를 들여다 보면 우리의 의식은 남들이 하는 대로 소비하도록 지배당하고 있다. 이러한 것만 아니다. 현대인은 자유로우나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 소비문화 체제의 구조적 폭력에 교묘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할 자인지를 온전히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8. 믿음이란

믿음이란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무엇에 마음을 주고 있는지를 보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런 것이다. ‘다른 것들은 온전한 구원을 주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정확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믿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끈다.

 

9. 라합의 해방

라합은 지긋지긋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난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어 더 이상 라합은 그 성이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창녀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는 한낱 창녀/빚진 자/사회적 약자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난 뒤에(새로운 질서가 들어선 뒤에는) 라합의 인생은 역전된다. 라합은 정탐꾼 중 한 명(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는다. 보아스는 구약성경 룻기의 주인공이다.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는다. 여리고 성에서 라합은 그저 비천한 창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라합은 완전 역전된 삶을 산다.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10. 성경은 전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전개되는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막 쳐들어가서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무지막지한 정복이야기가 아니다. 정복 전쟁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용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정복 전쟁은 한 사회에서 비천했던 인생이 어떻게 역전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해방일지이다. 강한 자가 하나님을 등에 업고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 편이시고, 약자의 눈물과 고통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역전시키시는 분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져야 한다.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있는 곳을 섬겨야 한다. 자신이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역전될 인생을 생각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일 뿐이다.

 

라합의 해방일지는 아름답다. 이런 역설과 역전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라합의 이야기와 끈이 닿아 있는 룻기에서도 우리는 라합의 해방일지와 같은 역설과 역전의 드라마를 본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의 해방일지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본다. 현실이 힘들고 어렵지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라합의 해방일지를 참고삼아, 아름다운 역설과 역전이 있는 해방일지를 써 나가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