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7. 04:46

2013 6 1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12-26

제목: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이다

  

신약성경 중 마음에 와 닿는 성경을 고르라면, 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고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 또는 기도행전이라 불리고, 누가복음은 성령복음 또는 기도복음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지향해야 하는 삶의 가치를 너무도 잘 가르쳐 주는 지표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어떤 신적인 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을 일컬어 예수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을 차지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생명의 영이고, 예수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십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뜻은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는데,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은 온갖 우리의 욕망을 자극시키고 만족시키는 것이 있어 즐거울지 몰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삼켜버리는 지옥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 나아가는 길 가운데 눈에 보이는 주변환경이 우리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실망시키는 것이어서 재미 없다 할지라도, 그 길의 끝에 우리의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천국이 있다면, 그 길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결코 우리를 죽음의 길, 거짓된 길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생명과 진리는 성령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겁니다. 우리는 본질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좌절하고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참으로 희망찬 것이죠.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을 건 제자들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교회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했던 120명의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b).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에 마음이 참 끌립니다. 이 부분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se all with one mind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 여기서 ‘one mind’라는 말과, ‘continually’라는 말, 그리고 devoting themselves’라는 말이 모두 ‘prayer’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아주 기본 자세를 말해주는 귀한 용어들입니다.

 

우선 ‘one mind’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기도란 혼자서 하는 기도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요즘 시대는 너무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이것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냥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서 하면 되지, 무슨 ‘one mind’로 하라는 것일까?’, 라며 의문을 품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번도 혼자서의 기도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공동체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연결된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자신의 유익만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는 사랑의 기도,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말 그대로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기 희생적인 기도, 즉 이웃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비즈니스는 경쟁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 쪽이 흥하면, 한 쪽은 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데 이 기도 속에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자동적으로 이런 뜻도 들어가 있는 겁니다. ‘주님,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한 적 없는데요. 저는 저의 비즈니스를 흥하게 해달라고 했지, 나의 경쟁상대인 저 사람의 비즈니스가 쇠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 없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겉으로 볼 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만 들어 있지, 이웃의 유익은 아랑곳 하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 비록 우리들이 경쟁관계에 있지만 저도 흥하게 하시고, 저 사람도 흥하게 하여 주옵소서.’ 물론 공동체성이란 이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다만 일례를 들어서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맛을 본 것이지요.

 

다음으로 ‘continually’‘devoting’은 하나로 묶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제자들이 얼마나 기도에 집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기도했는데, 단순히 그냥 기도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기도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과 질이 함께 갔다는 뜻입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기도의 양도 중요하지만, 1시간 2시간 기도할 때 그 기도의 질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시간만 때우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다고 앉아 있긴 하지만, 중언부언하는 기도, 딴 생각 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continually’‘devoting’은 무슨 일을 하든 매우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운동하는 사람, 그리고 운동할 때 운동에 집중하는 사람은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끊임 없이 공부하는 사람, 그리고 공부할 때 딴 생각 안 하고 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반대로, 눈 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운동 안 하고,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운동하고, 그나마 운동하면서 운동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할까요 아닐까요? 눈온다고,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그런 날은 공부 안 하고,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 싶은 날, 마음에 내키는 날만 공부하고, 그나마 공부하면서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할까요 아닐까요?

 

굉장히 단순한 진리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간과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 기도하면서 기도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눈이 온다고,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분다고, 왠지 기도가 안 되는 우울한 날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거르고, 그나마 기도할 때 딴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까요 아닐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기도를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헌신해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배신해서 자살해 죽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궐하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를 열 둘로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12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인데, 야곱의 12 아들, 이스라에르이 12지파처럼, 12 사도들은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새 이스라엘을 통치하도록 임명된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놓아두고,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맡게 될 두 사람을 천거합니다. 그들은 요셉과 맛디아였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12 사도의 자리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봉사의 직무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는 맛디아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으로 선정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우 첨예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늘,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을 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 우리의 미래를 밝게 해줄 것인지, 우리는 지혜가 부족하여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선택은 나의 미래를, 나의 인생을, 나의 삶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고, 저렇게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고,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의 질은 달라집니다. 그 모든 변수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에 헌신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점 집에 찾아가시겠죠.)

 

예수님의 12 사도로 맛디아가 아니라, 요셉이 선택되었다면 초대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것이 달라졌겠죠.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제자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선택이라면,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신뢰할만한, 그리고 삶의 질을 바꾸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나폴레옹이 패망하게 된 워털루(Waterloo)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격전이 있던 날 아침, 작달막한 키의 나폴레옹 황제는 싸움이 벌어질 벌판을 바라보며 사령관에게 그 날의 작전을 설명했다. “여기에 보병을 배치하고 저쪽에는 기병을, 그리고 이쪽에는 포병을 배치할 것이오. 날이 저물 때쯤 영국은 프랑스에게 굴복되어 있을 것이며 웰링턴은 나폴레옹의 포로가 될 것이요.” 하고 자신에 넘치는 야무진 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듣던 한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그의 작달막한 몸을 쭉 펴서 키를 늘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군은 이 나폴레옹이 친히 계획을 세웠다는 것과 나폴레옹이 성패를 주장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하고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빅토르 위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워털루 전투는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 비와 우박을 퍼부었으므로 나폴레옹의 군대는 계획한 작전을 하나도 펼 수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진 그날 밤에 나폴레옹은 웰링턴 장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는 영국에 굴복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다 알 수 없고 다 판단하여 말할 수 없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인 제1통령·황제로 제1제정을 건설했고 제1통령으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세력을 팽창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전략가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광활한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가 세운 전략들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려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 때문에 그는 전쟁에 패하였고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놓친 하나의 변수는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언서 16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와 비슷한 구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언 16:1).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걷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6:25).

 

그렇다면, ‘어떻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의무를 감당하고 말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현실적인 실존적인 삶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질이 곧 기도의 질로 결정난다는 엄청난 메시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으면, 내가 보이게 바르고 좋아 보이나, 필경 사망의 길일 수 있다는 경고를 경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걸기로 결단한 사람답게, 예수의 영인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도의 퀄러티가 삶의 퀄러티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먹느냐,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 내가 지금 어떤 집에서 사느냐, 내가 지금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 내가 지금 어떠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느냐가 삶의 퀄러티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느냐가 삶의 퀄터티를 결정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패는 없다  (1) 2013.06.24
살아 남은 자의 슬픔  (1) 2013.06.20
신앙의 도약  (0) 2013.06.10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4) 2013.06.03
황폐함을 보라!  (0) 2013.05.2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