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9. 19. 06:31

이삭의 결혼

아브라함이 받은 범사의 복

창세기 24

(창세기 24: 1-67)

 

사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한 켠을 차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이 헛된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그 죽음이 누군가의 인생에는 거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사라가 죽기 전에 어떤 유언을 남겼겠는가? 그리고 그의 죽기 전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아마도,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이 좋은 처자와 결혼하는 것 아니었겠는가. 엄마는 죽었지만, 엄마의 소망은 죽지 않는다.

 

창세기 2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 어떻게 보면 참 모순 된 말인 것 같다. “늙음과 복이라는 단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늙는 것을 부끄럽게생각하는 현대 사회의 허상일 뿐이다. 늙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신비한 일이다. 다른 말로 늙음은 신비이다. 늙음 속에는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늙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복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늙겠는가. 그러므로 현대 사회는 늙음을 신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고대인의 영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늙음의 신비에 눈 뜰 때, 우리는 늙은 이들을 천대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서 그들을 마음으로 존경하고 우대하게 된다. 늙은이를 존경하는 일은 사회적 규범이나 의무 또는 윤리를 넘어선 신비에 대한 눈뜸이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받았다.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이렇다. “The Lord had blessed Abraham in every way.” 여기서 ‘every way’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이것은 어떤 길을 가든 무엇을 하든 복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범사에(every way)’에 복 받기를 끊임 없이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이, 무엇이 복된 길이고 복된 일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길을 가고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예배해 놓으신 복된 길, 복된 일이라면 우리의 발걸음과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범사에 복을 받은 것에 대한 증거가 바로 이삭의 결혼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이겨내고 이제는 아들 이삭의 삶을 돌본다. 이삭을 결혼시키는 것이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과제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중 땅에 대한 것은 이제 사라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이제 남은 약속은 자손에 대한 것인데 그것은 아들 이삭의 삶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결혼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중차대한 일을 진행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종들 중 가장 신실한 종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이삭의 결혼이라는 중차대한 일을 맡기면서 이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를 환기시킨다. 그것은 다음의 의식(ritual)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어으라”(2).

 

의식(Rituals)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구원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하여 쉴새 없이 정신 없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은 일상의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 없이 반복하는 듯한 그 지루한 일상은 사실 우리 인생의 전부이다. 인생은 뭔가 특별한 일로 구성된 무엇이 아니라, 일상으로 구성된다. 일상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매우 의미 있고 특별하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식사하고 일하고 누군가와 만나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그것을 지루하고 권태롭고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러한 일상생활 때문에 이렇게 생존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일상은 매우 소중한 것이고 우리의 삶의 전부이다. 그런 일상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바로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행한다. 가령 결혼을 한다든지, 졸업을 한다든지, 생일이라든지, 그런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의식을 통하여 그날 또는 그것을 환기시킨다. 의식이 왜 특별한 날에만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의식은 특별한 날에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일상을 사소함에서 구원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잠 자기 전에, 잠에서 깨어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 누군가를 만나기 전, 그 일상이 지장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짧게 의식을 행한다면 우리가 이제 맞닥뜨리게 될 일상은 사소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것에서 구원된다.

 

의식을 통하여 어떤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한 중요성을 환기한다.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 일 수 있으나, 아브라함의 종의 입장에서 이삭의 결혼은 그저 또 하나의 지루한 일상일 수 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일상인데, 이삭의 결혼을 수행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서는 이삭의 결혼이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수행해야 할 지루한 일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브라함은 종에게 이삭의 결혼을 그냥 맡기지 않고 의식을 통해서 맡긴다. 이삭의 결혼이 얼마큼 중요한 것인지 종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허벅지에 밑에 손을 넣는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의 종은 그가 맡은 일을 지루한 일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정신 차리고 성실하게 수행해야 할 중차대한 일로 승화시킨다.

 

의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그의 종에게 내린 명령은 이것이다.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3-4). 종의 임무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 하란 땅에서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종은 그 임무를 받아 들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만약 그렇다면 이삭을 그 여자가 살고 있는 땅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5).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지침을 내린다.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 여기서 ‘~하도록 하라는 히브리어 히샤메르 레카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매우 강력한 표현으로써 결코 이삭을 그리로 데라고 가지 말 것에 대한 당부이자 주의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이토록 강력하게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신앙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택을 받아 가나안 땅에 왔고, 하나님께서 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삭은 이 땅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 이삭의 결혼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떠나서 결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삭의 아내를 찾는 일은 아브라함 집안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고 진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있는가를 살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결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언약도 중요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결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 보고 그 결정을 인정하시든지 말든지 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는 데 있어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 시킨다든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을 그쪽으로 보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결정하고 선택하고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한 질문을 뒤집어 보면 이런 것이다. 주인님, 왜 쉬운 길이 있는데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삭을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키면 얼마나 쉽습니까? 여자를 주인님의 고향 땅에서 이곳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이삭을 그리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이렇게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아브라함의 종만이 갖는 의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갖게 되는 의문이요 유혹이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면서, 그리고 쉬운 길을 생각하는 그의 종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그의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He will send his angel before you!)”(7). 언약 안에 머물러야 하는,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서 걸어 가야 하는 어려운 길을 택하면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쉬운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의식(Ritual)을 통하여 이제 이삭의 결혼은 아브라함에게나 그의 종에게나 똑같이 매우 특별한 일상, 중차대한 일로 승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를 만나게 된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데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2). 정말 멋진 기도다.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따라 해야 하는 기도이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며 그 길을 가는 우리에겐 끊임 없이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의식을 통해서 이삭의 결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종이 잠시라도 딴 맘을 먹게 되면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일단 길을 떠나면 그 길 떠난 사람의 행방은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확인할 길이 거의 없다. 그리고 변변한 교통 수단이 없었던 그 때에, 먼 곳을 여행하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딴 맘을 품고 얼마쯤 가다가 아무 여인이나 데리고 와서 주인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한 것처럼 일을 꾸민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라. 언약 가운데서 진행된 이삭의 결혼이 얼마나 은혜 가운데 진행되는지. 아브라함의 믿음과 종의 신실함은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낸다. 아브라함이 종에게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아브라함의 종보다 앞서 보내셨고, 종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끊임 없이 기도하면서 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선언한대로,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한대로, 종은 한 여인(리브가)을 만나게 되고, 리브가와 그녀의 가족 모두의 동의 하에 은혜롭게 리브가를 하란 땅에서부터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온다. 이 일이 진행되는 가운데 리브가와 그의 가족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의 고백을 들어보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이루어진 이삭의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이삭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 오랜 시간 동안 괴로운 시절을 보냈던 이삭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약속의 아내 리브가를 보고 기뻐했다. 엄마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엄마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삭이 눈 앞에 서 있는 리브가를 더욱더 기쁘게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사람에게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존재가 한 없이 더 귀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삭이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고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던 엄마의 죽음이 준 또 다른 선물이다. 참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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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