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25. 15:12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

(골로새서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또한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대강절)로 시작되는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력은 온통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서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여러분은 왜 감사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의 언어가 흘러나오게 합니까?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쉽게 우리가 부자인 것(잘 먹고 잘 사는 것), 우리가 건강한 것, 우리의 어떠한 모습이 잘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러한 감사의 고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정말 감사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왕 또는 왕권은 다스림을 말합니다. 왕권은 다스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의미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권력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력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패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모든 영웅들은 권력을 손에 거머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꿈을 꾸며 이 세상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왕권을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적이라는 단어로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에 대한 세속적 이미지가 그리스도의 왕권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권도 세속적인 왕권처럼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패권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말하는 왕권과는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의 왕권은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멸망시키고 종속시킬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는 구원하는 왕권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섬김의 왕권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에서 왕권을 주장하는 것들을 짚어 보면, 정치인들, , 죽음 정도로 추려낼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러한 것들이 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백성을 기만하기 일쑤입니다. 그들이 하는 정치적 공약은 모두 장밋빛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 표를 모아 권력을 쟁취하려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일단 당선되고 나면 정치적 공약은 휴지통에 버려지기 일쑤입니다.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쁩니다.

 

이 시대에 왕권을 가진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좀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절대로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값비싼 건강보험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으리으리한 집과 최신형 좋은 차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의료서비스를 그때그때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죽음의 문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가 이 땅에서 살아온 이래로 가장 치열하게 싸워온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둘러 싸고 철학이 발달되어 왔고, 이것을 둘러 싸고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왔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죽음을 막아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눈물 겹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이 가장 작고 초라해지는 순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밀려올 때 그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왕권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왕권을 만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왕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15).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만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하나님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15b-16a).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체험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체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재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을 가져다 주는 존재 일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 인식된 것이죠.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주권자로 받아들여 집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생명현상만 볼 뿐이지, 생명 자체를 보지는 못합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음현상만 볼 뿐이지, 죽음 자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또는 죽음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 모든 것(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의 주권자시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하시는 일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9-20).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화평을 이루는 왕권,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왕권, 즉 우리를 구원하는 왕권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진정한 섬김의 왕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과 같은 것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패권은 로마 황제가 쥐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는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숭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 스스로를 신이라 하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황제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그들은 어떤 왕이 참된 왕인지, 뼈 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감사의 이유는 놓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려드리는 감사의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참으로 세속적입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 때문에, 건강한 것 때문에, 자식이 잘 된 것 때문에, 또는 하늘이 맑은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즉 가난해지거나 건강을 잃거나 자식이 속 썩이거나 또는 하늘이 흐리면 감사할 이유가 없어져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는 것처럼 감사의 이유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추수감사주일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맞아,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고, 그분의 다스리심만을 받으며 사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바로 그리스도께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을 이루는 참된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시요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을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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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8. 05:12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27:13-26)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의 재판을 모두 바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이사에게 상소한 까닭에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중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재판을 통해서 바울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전부터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해 왔습니다. 시골 촌놈이 그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로마에 한 번 구경 가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이 아니라, 로마를 발판 삼아 그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사바나(스페인)까지 선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말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요즘 지중해라고 불리는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를 타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는 유로굴라라는 광풍이 때때로 부는 데, 그 광풍을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로 대속죄일이 끝난 뒤에는 지중해에 유로굴라가 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 일행이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시점에 대속죄일이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호송을 담당한 로마 황제 부대의 백부장에게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그런데 백부장과 선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편하게 겨울을 나고자 하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가 앞에 놓여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불편한 것보다,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생명이 붙어 있으면 불편한 것을 견딜 수 있지만, 생명을 잃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때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이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생명에 맞춰져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도로교통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몇 분 빨리 가려는 급한 마음에 과속하다가 사고 나기 일쑤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습관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 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어떤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과 백부장의 뜻대로 항해를 합니다. 물론 출발할 때 날씨가 안 좋았으면 달랐겠지만, 공교롭게도 출발 당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바울의 예상과 우려대로 광풍을 만납니다. 아찔한 순간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유로굴라 광풍 때문에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최후의 수단까지 진행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즉 배에 있는 짐과 기구 모두를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안전, 생명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가 풍랑을 견디지 못하면, 모두 물에 수장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게 됩니다. 1972년 럭비 선수들과 그의 가족들을 실은 비행기 한 한대가 우루과이를 출발하여 안데스 산맥을 넘다가 추락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추락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중에서 16명이 살아 남았습니다.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다 72일만에 구출되는데, 구출된 후 그들의 증언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행한 마지막 수단은 먼저 죽은 친구와 가족의 인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두 명의 청년이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가 구조 요청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까지 모두 강구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하자 점점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모든 물건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바람에 먹을 것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정말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 일어나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선 아쉬운 마음을 전합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고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입니다. , 지난 번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번에 자신이 하는 말은 꼭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던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 메시지가 얼마나 위로됐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그들은 바울의 말에 희망을 걸었을 겁니다. 게다가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23-24).

 

풍랑 속에서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바울도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겠죠. 바울도 아마 이렇게 죽는구나라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붙들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그렇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배를 타게 된 이유는 가이사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살아남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겁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드려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생명을 우리 자신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아무렇게나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의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중 지금 현재 주어진 사명은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그러한 사명이 없었다면 바울은 풍랑 속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주신 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바울을 살려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와 한 배를 탄 것만으로도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명자란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이웃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대로 풍랑 속에서 표류하던 그들의 배는 어느 한 섬에 걸리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그들,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성경은 그들의 삶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로 인하여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봅시다. 나는 사명자인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명자인가? 하나님께 생명이 드려진 사명자인가? 나의 생명은 누가 주관하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명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명자인가? 물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일컬어 사명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만, 사명자(使命者)와 사명자(死命者)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죽을 위기에 처해져 있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습니다. 또한 죽음 자체도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일례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있습니다. 1889 10 2,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소속 데이비스 목사가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누이인 메리와 함께 한국 땅을 밟습니다. 데이비스는 다섯 달 동안 서울에서 한국말을 익힌 후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 만인 1890 4 5일에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데이비스의 허무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교인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메케이(J.D. Mackay)목사 부부와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포셋(M. Fawcett) 등을 부산에 파송합니다. 그리고 189110, 수정산 자락 좌천동에 선교부를 세우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줍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라는 말씀,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셨을 때,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는다는 것,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생명력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 사명자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명을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생명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0. 23:34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살후 2:1-5, 13-17)

 

 

최근 뉴스 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기사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53살 먹은 아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 놓고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기러기 아빠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00아 끝까지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기러기 아빠의 장례식에 아내와 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장례는 형제와 친척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더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비참합니다.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았습니다. 아내 또한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아들은 어떠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까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한들 아빠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각박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삶에 대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위의 기러기 아빠를 통해서 보았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행동을 낳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질을 망가뜨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림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작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몇몇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보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오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도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생살이의 고단함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오는 고단함이 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잃은 크나큰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어디를 가든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방해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나, 목숨에 위협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그 고단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법입니다.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에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이 고단하다 보니,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길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크나큰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됐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더 광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냥 생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닥친 딜레마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딜레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사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종말, 재림등의 단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 재림등의 언어는 사기꾼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언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잘 믿어 지금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가 다시 오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숨통이나 좀 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통 트이는 데는 이 최고이니까, 돈이나 좀 잘 벌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더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인 예수님의 재림은 묻혀 버린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재림에 대한 징후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배교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내 교파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은 정통이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침반을 따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나침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나침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여 길을 나서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면 속은 편할지 몰라도, 사막에서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다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처럼, 사막처럼 숨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침반, 즉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막히는 세상,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개미 집단의 80%가 그냥 앞의 개미가 가는 대로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개미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개미를 보면 우습게 생각하고 침 바른 손가락 끝으로 하찮게 죽여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개미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왜요? 별 생각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나침반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개미처럼 하찮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숨막히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 안타까운 삶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께 복을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