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4.02.27 소통 문제
  2. 2014.02.23 거룩이란 무엇인가? 2
  3. 2014.02.17 교회의 성장통 2
  4. 2014.02.09 생명의 물, 생명의 길 (2, 2, 20 운동) 1
  5. 2014.02.06 아무도 모른다 1
  6. 2014.02.03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7. 06:22

소통 문제

창세기 17

(창세기 19:1-14)

 

2004년에 만들어진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 즉 소통의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겪는 아픔 그리고 화해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중에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란인 가게에 문이 고장 나서 그것을 고쳐주러 간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자물쇠는 고쳤지만 문 자체가 문제이니 문을 꼭 고치라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이란인 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돌려 달라고 고함칩니다.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돈을 돌려 주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인 가족의 가게는 강도를 맞고, 문을 고치지 않은 것 때문에 보험금 처리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가 털려 화가 난 이란인 가장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에게 총을 겨누며 강도 맞은 피해 보상을 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서 뛰어듭니다. 동시에 이란인 가장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디오) www.youtube.com/watch?v=Tjct4zCo_Qg

 

다행히도 이란인 가장의 총에 들어있던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열쇠수리공의 딸은 무사했습니다. 가게로 돌아간 이란인 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나의 천사야.”

 

이것 외에도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검문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방송국 PD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동차가 폭발하기 직전 본인을 구하러 온 경찰관이 바로 자신들을 욕보인 그 백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의 얼굴을 알아본 흑인 부인은 “no, not you”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관에게 구조받기를 거부합니다. 백인 경찰관은 사력을 다해 흑인 부인을 설득해서 자동차가 폭파되기 일보 직전에 그녀를 구출합니다.

 

모두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천사들, , 소돔사람들, 그리고 롯의 사위들입니다. 이들 간에 일어난 소통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천사들과 롯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서의 롯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성문은 장로들과 공직자들이 앉아서 법적인 문제를 논하거나 판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소돔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영접합니다. 롯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알아본 것과 똑같이 롯도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기운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소식이 소돔사회에 금방 번져나갔나 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소돔지역 사방에서 노소를 불문하고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그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사람들과 천사들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니까, 결국 소돔사람들과 하나님 간의 소통의 문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돔 땅에 도착한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그들과 관계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한 처사입니다.

 

둘째는 소돔사람들과 롯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7-8). 롯은 소돔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려고 그들을 형제들아라고까지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롯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을 다음과 같이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너는 물러나라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a).

 

문제가 발생하니, 평소에는 모르던 것이 드러납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반해, 소돔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불렀습니다. 롯의 노력과는 달리, 소돔사람들은 롯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느 설문 조사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뭔데 그러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들은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롯은 평소 소돔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형제로 생각했는데,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을 이방인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부재하니,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소통이 부재하고, 관계가 상대화 되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폭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소통의 부재를 내세워야 하고, 상대방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소통이 잘 되는 상태를 나와 너의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소통이 잘 되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상대화되면 거기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롯과의 관계를 상대화시킨 소돔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b).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롯은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 소돔 땅에 온 이유를 롯에게 알립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이 말을 들은 롯은 다급한 마음에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일어나 소돔땅을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위들이 장인의 말에 순종하여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전합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b).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것은 롯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에게서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성내며 달려드는 소돔사람들에게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롯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을 앞 두고 있는 두 딸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하는 롯의 모습을 예비 사위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장인 롯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들이 장인 롯의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Crash>나 오늘 말씀이나,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참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발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소돔땅을 구원하러 간 것이지 멸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돔땅이 멸하게 된 이유는 소돔사람들이 천사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롯이 사위들에게 찾아가 구원 받을 방도에 대해서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비극을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이 약장수의 허튼소리로만 들릴 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를 신뢰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겁니다.

 

소통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평소에 주님을 가까이 해야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통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에만 잘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성공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실패한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통에 실패하여 멸망 받은 소돔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소통에 성공하여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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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3. 23:56

거룩이란 무엇인가?

(레위기 19:1-2, 9-18)

 

자고 일어나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각종 사건들이 전해져 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인 입양아를 살해한 혐의로 현직 국가정보요원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양아버지에 의해 살해된 한인 입양아의 나이는 세 살이었고, 부검해 본 결과 뇌의 진액이 신체 곳곳에 스며들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을 보면, 절대로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한국에서는 13, 15살 먹은 어린 조카를 임신시키고 출산까지 하게 한 삼촌의 범죄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욕 때문에 소녀들의 소중한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런 인면수심의 인간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떤 중년 여인이 이혼소송을 냈는데, 그 이유가 남편의 종교 강요 때문이랍니다. 남편은 가족들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헌금을 바쳤답니다. 그 액수가 처음에는 수 천, 그리고 나중에는 수 억 원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은 교회를 잘 안 나가려고 하는 부인과 자녀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족들 간에 불화가 생기고 급기야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법원은 남편의 잘못된 종교 강요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판단과 함께 부인의 손을 들어 줬습니다. 종교 문제로 이렇게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보면 거룩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대표적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유다의 부정과 다윗 왕의 간음이 있습니다. 유다는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자 셋째 아들 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계대결혼법을 어기며 며느리 다말을 시집으로 돌려 보냅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을 합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 사건을 보면서 거룩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이야기를 당당하게 싣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을 통해서 난 베레스와 쎄라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또한 다윗 왕의 간음 사건은 매우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자신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의 부인인 밧세바를 왕궁으로 범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듭니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폭로를 통해 다윗 왕이 회개하긴 했지만,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것 자체가 거룩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도대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2).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선 거룩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인 거룩을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레위기서의 이 말씀을 살펴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오늘 말씀과 관련된 것을 토대로 가르침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이웃사랑법이 레위기서에서 비롯됩니다. 레위기 18절 후반부 말씀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런 것을 보면, 거룩이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에 담아낼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라는 말씀 뒤에 이어지는 레위기의 규례들은 하나님 자신의 어떠한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웃과의 관계법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넓게 말해서, 레위기 19장에 등장하는 규례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배려하고(respect) 공경해야(honor)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웃)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웃이란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the poor), 거류민(the stranger), 이웃(fellow), 품꾼(laborer), 귀먹은 자(deaf), 맹인(blind), 부자(the rich), 친족(kinsman), 동포(countryman).

 

가난한 자와 거류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9-10). 거룩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한 자와 거류민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의 최저 생계를 보장해 주는 것. ‘이것도 내 꺼, 저것도 내 꺼, 다 내 꺼야라면서 혼자서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거룩이라는 겁니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지리적 위치에서 내 옆집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삶 가운데서 만나서 삶을 나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13a). 거룩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 만나는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에 생명력이 넘치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들을 오히려 섬기는 것이 거룩입니다.

 

품꾼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13b). 품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참 대견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죠. 남에게 빌어먹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꾸려가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그날 벌은 돈으로 그날 먹거리를 사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그래서 품꾼의 삯은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주어야 합니다. 주지 않고 그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붙들고 있으면, 품꾼은 꼼짝없이 굶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일 한 것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자신의 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의 배까지도 생각하는 것.

 

귀먹은 자와 맹인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14). 저 사람이 안 들린다고 저주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이 안 보인다고 그 앞에 장애물을 놓으면 안 됩니다. 안 들리기 때문에 더 조심해서 말해야 하고, 안 보이기 때문에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치워주어야 합니다. 거룩이란 이런 것입니다. 저 사람은 안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저 사람은 안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말이 뒤에 붙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그 사람이 없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없는 말을 지어내 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 또한 거룩하지 못한 겁니다. 지금 내 앞에 없어서 그 사람에 대해서 험담하고 흠집을 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을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듣고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15). 재판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데, 특별히 가난한 자와 부자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공의라는 개념을 들어 거룩을 표현합니다. 재판을 할 때, 올바르게 재판하기 위해서 동정도 아첨도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동정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부자는 아첨표를 얻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의가 제대로 서지 않게 되고, 관계가 어긋나게 되며 결국 이것은 거룩과 멀어지는 상황을 낳게 됩니다.

 

친족과 동포와의 올바른 관계는 이것입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17-18). 살다 보면 가족 간에도 미워하고 원망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마음으로 미워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마음으로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적인 개념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이 가득해야 하는데, 그곳에 사랑 대신 미움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거룩한 모습이 아닙니다. 미움을 마음에까지 남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형제와 이웃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할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마음에 미움을 안고 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주어진 본문 내에서만 거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만,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에 레위기서를 찬찬히 들여다 보십시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는 말씀 아래, 거룩이 무엇인지 제시되는 것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지만, 그것을 우리 인간 존재에 가져오는 방법은 다름 아닌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예배 잘 드리고, 교회에서 봉사 잘 한다고 그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에게 붙는 수식어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23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배제한 거룩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만 올바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시는데,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거룩한 예배란 우리가 얼마나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거룩한 예배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부족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예배나마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올바른 이웃관계를 맺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respect & honor).” 이것이 거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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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17. 05:03

교회의 성장통

(행 2:42-47)

 

우리 큰 아들이 이제 7살이 되는데, 자주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키가 클 때 그런다. 육체적인 성장통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사춘기가 되어, 정신적인 성장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성장통이 얼마나 힘들면, 괴테 같은 사람은 그 성장통을 일컬어 질풍 노도의 시기라고 했겠는가? 성장통을 겪을 때, 잘 겪어야지 성장을 잘 할 수 있다. 성장할 때 제대로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 육체적으로 성장할 때는 영양분이 충분이 섭취되도록 해줘야 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때는 사랑이 많이 필요하다.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면 키가 안 크거나 성장이 멈추고, 사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인간성이 비뚤어진다.

 

교회도 유기체이기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교회가 생겨났을 때도 성장통을 겪고, 서서히 성장해 가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어느 교회든지 성장할 때는 성장통을 겪는데, 그것을 영적인 눈으로 잘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오늘 말씀에서 본 대로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탄생하여 잘 성장해 갔다. 47절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러나 초대교회에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성장통을 심하게 겪었다. 첫째, 교회는 복음 자체 때문에 성장통을 겪는다. 복음을 못 받아 들이는 대적자들이 교회를 핍박한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온다. 4 1절과 2절을 보면 이렇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매..”라고 나온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가둔다.

 

교회가 복음 자체 때문에 받는 성장통은 교회가 겪어야 할 필연이기도 하고, 그것이 오히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빛을 싫어한다. 자신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벌인 악한 일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

 

복음 자체 때문에 교회가 성장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교회가 올바로 성장해 간다는 증거이다. 아이가 올바르게 성장하면 성장통을 겪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이가 성장통을 겪을 때 부모의 마음은 안쓰럽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안도감에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1-12).

 

둘째로, 교회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때 교회는 성장통을 겪는다. 4장에 보면 복음을 전하던 교회 지도자,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것이다. 이러한 신변의 위기를 초대교회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라. 423절과 24절을 보면,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그리고 31절을 보면,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지도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들은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교회는 지도자의 신변이 늘 안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성장통이 잘 지나가고 교회가 잘 성장할 수 있다. 목회자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 목회자의 주변(건강, 가족 등)이 편안하도록 늘 기도하시라. 교회가 잘 성장하다 성장통을 심하게 앓는 경우,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자의 신변의 문제이다. 돈문제, 여자문제, 건강문제, 가족 간의 불화, 자녀문제 등 일반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통해 목회자를 넘어뜨려 교회를 힘들게 하려는 사탄이 호시탐탐 교회의 지도자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세 번째 성장통은 5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다. 오늘 말씀에서 봤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내놓아야 할 것을 숨겼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5:2).

 

베드로가 아나니야를 이렇게 꾸짖는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교회의 성장통은, 이렇게 성령의 충만한 마음이 밀리고, 그 안에 사탄이의 마음이 들어올 때 온다. 마음에 성령이 충만한지, 사탄이의 마음이 가득한지 평소에는 잘 모른다.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성령님께서 아신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육신을 멸할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영혼까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는데, 성령을 실족하게 하는 죄는 참으로 두려운 거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같은 날 초상을 치르게 된 것은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기 때문이다.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지런히 살펴서, 성령이 가득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그래서 범죄치 말아야 한다. 마귀는 교회 지도자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를 노린다. 베드로 사도는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그를 대적하라고 말한다. 마귀에게 몸과 마음을 내어주지 말라.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주님께서 도우신다.

 

네 번째 교회의 성장통을 6장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교회의 지체끼리 서로 배려해 주는 일에 실수가 있을 때 그렇다. 61절을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초대교회(예루살렘교회)는 크게 헬라파 교인들과 히브리파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린도교회는 더 심했다.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었는데, 누구한테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나눠진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파당을 지은 것은 아니고, 그냥 태생이 그렇게 된 거다. 서로 그냥 다른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듯, 그리고 경상도 출신과 전라도 출신, 또는 충청도 출신이 다르듯이 말이다. 성향이나, 태생이 다른 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장에서도,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라파 유대인들이 다르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같지만, 한쪽은 이민자들이고, 한쪽은 유대땅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우리로 따지면, 미국에 사는 한인 이민자들과 한국에 사는 한인들인 것이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파 사람들이 배식을 맡아서 할 때 같은 히브리파 사람들에게는 생선을 나누어줘도 몸통, 살이 통통한 것을 주고,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꼬리나 삐쩍 마른 것을 주는 등, 이렇게 차별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누구든지 차별 당하면 싫은 법이다. 배척당하면 싫은 법이다.  교회가 이렇게 헬라파냐 히브리파냐, 남자냐 여자냐, 종이냐 주인이냐, 뭐 이런 것 때문에 차별하거나 배척하면 안 된다. 만약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교회는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하나님 체험에 대한 경험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그 다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도, 서신서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서로의 다른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잘 되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면 교회는 어려워진다.

 

여러분에게 여쭙고 싶다. 교회를 사랑하시는가? 에베소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교회는 우리의 신랑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가 교회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다. 다 비유인데, 그만큼 교회는 소중하고 사랑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성숙이란,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잘 지내는 능력을 말한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시민, 성숙한 사회, 우리는 성숙이라는 말을 통해 그 사람이, 그 사회가 얼마나 좋은 사람, 좋은 사회인가를 표현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주변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나와 다른 것을 잘 받아드리고 그것과 잘 지내며 화평을 이룬다.

 

위의 네 가지가 형통하면 교회는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하게 된다. 복음 자체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길 기도하시라.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신변을 위해서 기도하시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마음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부지런히 자기 자신을 살피시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시라. 그러면,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다. 교회가 성장통을 잘 이겨내고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두 팔을 넓게 벌려 기지개 한 번 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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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9. 23:39

생명의 물, 생명의 길 (2, 2, 20 운동)

(요한복음 4:1-15)

 

여러분은 하루에 물을 얼마큼 드십니까? 우리의 몸은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20%가 모자라면 곧바로 사망합니다. 그 정도로 물은 중요합니다. “돈을 물쓰듯 한다라는 비유문구가 있습니다. 돈을 거침 없이 많이 쓴다는 뜻인데, ‘물쓰듯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예전에는 물 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산좋고 물좋은 곳이어서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물쓰듯 한다라는 문장도 한 번쯤 돌아봐야 하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한국도 물부족 국가 중 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물이 가장 부족한 대륙은 아프리카 대륙입니다. 그들은 먹을 물이 없어서 목마르게살아갑니다. 국제기구에서는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물 자체가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나마 있는 물도 그냥 마시면 각종 질병을 유발시키는, 마시기에는 위험한 물들이 도처에 고여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만큼 오염된 물이 많다는 뜻입니다.

 

유럽 또한 물이 부족한 대륙입니다. 그리고 거기 지형에서 나오는 물은 석회석이 섞여 있기 때문에 그냥 마시면 안 됩니다. 물 속에 섞여 나오는 석회석을 꼭 정화시켜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로 맥주를 마시고, 그 지역에는 정수기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손쉽게 구하고 쓸 수 있는 브리타(Brita) 정수기도 유럽 나라인 독일에서 발명된 것입니다. 유럽 여행을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유럽에서 물 한 잔 얻어 먹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물은 사먹어야 합니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물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유럽은 물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차역 같은 곳에 있는 공공화장실을 갈 때도 돈을 내야 합니다. 용무를 보고 나면 물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 물값을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밥은 40일 동안 굶을 수 있어도, 물 없이는 며칠 못삽니다. 40일 금식기도 할 때도 물과 소금은 먹습니다. 단식하다 쓰러지는 이유는 배고파서가 아니라, 몸에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물, 그래서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란 동네에서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요즘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게끔 편리한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물을 쓰려면 물 깃는 것부터 해야 했습니다. 물 깃는 일은 주로 여자들이 담당을 했습니다. 사극 같은 것을 보면 궁녀 중 무수리가 있는데, 무수리가 주로 담당한 일이 물 깃는 일입니다. 일상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물 깃는 일만 감당하는 궁녀를 둔 것이죠.

 

사마리아 수가란 동네에 있는 우물로 물 길으러 나온 한 여인, 우리는 그녀를 일컬어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큰 인생의 굴곡이 있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인생의 굴곡이 심한 사람들의 특징은 이웃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생의 큰 굴곡을 겪었더라도, 물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우물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인데, 물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물을 길러 우물에 가야 하는 상황이 겹칩니다. 예로부터 우물은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를 떨던 곳입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라 삶의 필수품인 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매우 피곤한 상황입니다. 그 삶이 오죽 피곤했으면, 예수님께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주시겠다고 하시니까, 그녀가 이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이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서 사마리아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의 고단함이 묻어 있는 말입니다.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얼마나 애잔합니까? 남의 시선을 피해, 물 길러 와야 한다는 그녀의 삶의 상황이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애원하겠습니까? 타임머신이 있으면 이때로 가서 사마리아 여인의 집에 한일자동펌프라도 설치해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물에 대한 갈급한 삶의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겁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 우리는 이 말씀에 아멘하고 대답하기는 쉽지만, 사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게 될까요?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물을 얼마큼 드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루에 물을 충분히 마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건강을 헤치는 것 중 하나가, 몸 속에 수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몸 속에 수분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심한 탈수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각종 질병들이 유발된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물이 생명이다!”라는 것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술은 비유입니다. , ‘물이 생명이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지 못하면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비유가 절대로 가슴 속에 와 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 먼저 물이 생명이다라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 속에서 탈수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적어도 하루에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야 한답니다. 다시 말해, 하루에 적어도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야만 인간의 생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이 때의 물은 미네랄이 풍부한 생수이어야만 합니다. 탄산음료나 각종 차(커피, 녹차 등)는 안 됩니다. 탄산음료나 각종 차는 목마름을 더 유발하거나 이뇨작용을 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을 먹은 만큼 물을 보충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려면, 미네랄이 풍부한 생수 2리터 이상씩 매일 마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한 번 들여다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생수 2리터씩 마시면서 삽니까? 실제로 현대인의 90% 이상이 그렇게 못하고 산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심한 탈수현상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답니다.

 

기독교 신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 숨쉬는 것과 직결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가슴으로 잘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신앙 따로 생명 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것과 물이 생명이다라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물이 생명인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고 성실하게 마시는 자는 분명 예수님이 생명의 물이시다라는 진리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열심히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물처럼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깨달아 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2, 2, 20 운동을 제안합니다. “, , 투에니 운동이란 하루에 물 2리터 이상 마시고, 하루에 2마일 이상 걷고, 하루에 20분 이상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예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길을 걸어보지 않은 자는 예수가 길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디를 갈 때 우리는 주로 자동차를 타고 다닙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사는 미국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자동차 없이 돌아다닐 수 없는 구조로 사회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길이시다라는 것 또한 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한 번 도보로 걸어서 어느 목적지까지 가보십시오. 그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험난한 일을 겪게 되는지, 그 길을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지,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병 중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 혈관질환이라고 합니다. 다른 질병은 발견해서 치료가 가능하고 치료할 때도 드러나지만, 혈관질환은 생명과 직결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심장마비, 뇌출혈(stroke) 등이 혈관질환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심장마비에 걸리면 손 써 볼 겨를도 없이 즉시 사망합니다. 그리고 뇌출혈이 일어나면 전신마비가 되거나, 잠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사지 중 하나를 못쓰게 되거나 언어장애를 겪게 됩니다. 특별히 중풍병에 걸리면 골방에 틀어박히게 되는데, 그때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골방에 누워 인생을 보내야 하는 환자나, 그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이나,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는 인생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과 직결되는 혈관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2마일 이상 걷는 거랍니다. 걷는 것 또한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은 자만이, ‘예수님이 길이시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강건하게 하는 운동과도 같습니다. 믿는 이들의 주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밥만 먹어서는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운동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몸은 음식과 운동을 통해서 건강함을 유지합니다. 말씀을 먹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운동처럼 꼭 필요한 영성생활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께 굴복(surrender)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께 굴복한다는 것은 비굴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갈구하는 인생으로, 풍성한 생명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생명되신 예수님께 굴복한다는 뜻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만 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먹은 음식이 잘 소화되어 우리의 몸 구석구석까지 에너지를 잘 전달되게 끔 하려면 신진대사가 원활해야 하는데,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면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까지 에너지로 잘 전달되려면 영적인 신진대사가 원활해야 하는데, 그것에 필수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몸의 움직임이 운동이라면, 영의 움직임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20분씩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고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꼭 필요한 운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물이시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처럼 만나고 싶으시거든, 먼저 생명과도 같은 물 마시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그 길을 걸어 보십시오. 또한 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굴복(surrender)해 보십시오. ‘2, 2, 20 운동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한 설교자의 잔소리가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2리터의 물마시기, 2마일의 걷기, 20분의 기도가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물, 생명의 길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분, 물을 마시고 길을 걸으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생명의 물이시고 생명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것처럼 꼭 만나게 되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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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6. 08:20

아무도 모른다

창세기 16

(창세기 18:16-33)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면, 뭔가 아는 것처럼 살아온 인생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우리가 귀로 듣는 것, 또는 손으로 만져 보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뭔가 아는 것처럼 확신하고 눈과 귀와 손으로 느끼는 세상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아가지만, 결국 뒤돌아 보면 눈과 귀와 손으로 보고 듣고 만졌던 세상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었나를 깨달을 때 섬뜩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확실한 것에 근거해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하란 땅에 아버지를 묻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부르시는 음성 하나만 믿고 나아갔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시기에 조카 롯과 땅을 놓고 갈등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 땅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아브라함 일행은 불어난 재산 때문에 갈등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13:5-7a).

 

사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이렇게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투게 되었고, 그 다툼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가축들을 방목할 목초지였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서로 갈라서서 각자의 목초지에서 가축들을 키우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어느 목초지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아두고 의논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건네 줍니다. 물론 삼촌이 조카보다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해도 조카 롯이 토를 달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사랑했으므로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양보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고 덕입니다. 또한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모든 것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더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또는 내가 덜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먼저 양보하고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알고 먼저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화평과 사랑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먼저 내려놓은 것뿐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라리”(13:8-9).

 

그런데 문제는 롯입니다. 롯은 뭔가를 아는 듯이 선택권을 행사합니다. 눈과 귀와 손을 통해서 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뭔가를 안다는 듯이 자신 있게 선택합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은 소알 땅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빠진 이 문장을 몰랐던 것이죠.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13:10 중간).

 

만약, 롯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것에 대해서 알았다면 과연 롯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의 감촉을 통해 느낀 대로 소알 땅을 택했을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그것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거나, 바보천치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인생이 힘듭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주요 논쟁점인 의인과 악인에 관한 것 또한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융성한 대접을 받으신 후, 소돔 땅으로 향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알려 주시는 데, 첫 번째는 18절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계획입니다. 또한 택함 받은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두 번째로는 20절 말씀대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려고 하는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해야 하는데, 무엇이 의와 공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명백하게 의로운 일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로운 일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거나 더 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잘못한 일인 것 같아서 후회하거나 회개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더욱더 잘 모르는 것은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을 티끌과 재같은 존재로 낮추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의인 50명만 있다면 그 의인들로 인해 악인들까지고 구원해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간구가 10명까지로 내려갑니다.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니라”(32).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소돔과 고모라에 롯을 비롯해서 롯과 엮인 의인이 열 명쯤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상과는 다르게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다른 사람(타자)에게는 박한 점수를 줍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고 전제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보통 마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어리석고 악독해서, 즉 그들은 악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자였고, 로마의 정치체계를 무너뜨릴만한 선동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명백하게 신성모독죄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 2122절과 23절 말씀은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들이 보기에 말씀에 근거해서 본 예수, 그것도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는 바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이 거리끼게 여기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가, 누가복음 2347절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향해 이렇게 외쳤듯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는 것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겸손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무지의 언어도 아니고 절망의 언어도 아니고 체념의 언어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정죄하기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세워주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는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인지, 좀 아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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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3. 05:14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마태복음 5:1-12)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행복을 느끼십니까? 교회 다녀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요즘 시대를 일컬어 소비사회라고 하는데, 소비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마음껏 소비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례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을 합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은 쇼핑을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행복한 자란, 더 소비할 수 있는 능력자란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해 주는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닌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성경에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해주면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그리고 이 사회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옳다 여기고 열심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텐데, 왠지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덮고, 못 본 척 하고 그냥 내가 행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인내를 가지고 들여다 봐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이러한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팔복”. 오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 받았다라는 것을 행복과 연관 짓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특별히 ‘lottery’복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단어인 은 영어로는 ‘blessedness’라고 하고,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는 ‘makarios’라고 합니다. ‘마카리오스는 어느 한 가지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행운, 행복, 특권 등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행복과 마카리우스의 의미가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팔복이라는 주제로 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가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딱히 행복을 약속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을 약속하시는데, 그 복을 약속하시는 정황이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애통할 때, 온유할 때, 화평케 할 때, 핍박 당할 때, 심령이 가난할 때 등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행하다고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이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상황에서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선포하시는 복의 내용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말하는 부(wealth)나 건강(health) 또는 사회적 지위(status)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복을 가져오는 인자(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의로움이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했을 때 받는 보상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하나님의 충만한 선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은 명예와 수치를 통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통해서 다스려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지금 말씀 드린 하나님 나라의 생명 경험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부나 건강 또는 사회적 지위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부할 때, 건강할 때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건강해지려고 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합니다. 내가 그러한 것을 못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식들만은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롭게 살거나 어떠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때는 당연히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상이 없다면, 의롭게 살 필요도 없고, 어떠한 임무도 성실히 수행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생명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오늘 말씀은 굉장히 낯설게 다가옵니다. 설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오늘 말씀과 다르게 작동하는 세상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오늘 말씀이 낯설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저도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잘 살았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세상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는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행복과 생명을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오늘 말씀이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건강치 못하게 늘 병에 들어서 살아야 하고, 사회적 지위 같은 것 없이 천민으로 살라는 뜻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통치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란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자라는 뜻은 그 마음에 무엇인가가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힘씁니다. 내가 얼마나 아는지,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행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것을 하기 위해 늘 바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비어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복이 임하는 방식, 즉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 할 때처럼, 무엇인가 비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온유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기업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배부름에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긍휼히 여김을 받음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음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를 위하며 박해를 받은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천국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때, 하나님의 생명을 살 수 있는(live) 때는 강할 때보다 오히려 약할 때이고 가득 차 있을 때보다 오히려 비어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하게 되는 것을, 비어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기를 쓰고 강하게 되려고 하고 기를 쓰고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오히려 약할 때, 오히려 비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때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가 지금 약한 처지에 처해졌다고 해서, 혹시 우리가 비어 있는 처지가 되어 있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비어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약한 것을 우리의 비어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을 내려주시는데, 그 복은 하늘의 복, 즉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하늘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 이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약한 것과 비어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이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강해지고 채우는 삶을 살겠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삶(천국, 하늘 나라)으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면,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을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도록 그분께 삶을 맡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아멘.

 

 

* 오늘 본문 말씀이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것을 한 편의 설교에 한꺼번에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하연이에게>라는 찬양을 통해 그 이미지를 더 풍성하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찬양을 듣고 싶으시면, 컬럼버스감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설교를 들으시면 좋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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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