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0. 17. 02:33

과부의 기도, 우리의 기도

(누가복음 18:1-8)


나는 녹차를 좋아한다. 커피를 안 마신다. (물론 스타벅스의 바닐라 라떼 같은 달달한 커피는 가끔 마신다.) 중학교 때 커피 마셨다가 밤새 잠을 못 잔 경험이 있은 후로는 커피에 손이 잘 안 간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속도 아프다. 요즘엔 커피가 너무 자본주의적이라서 싫다. 스타벅스 등 커피를 시장에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 기업들이 커피를 너무 현대인의 필수 음료로 띄워 놓은 경향이 있다.

 

한 동안 메스컴에서는 커피의 좋은 효능에 대하여 연일 기사를 띄웠다. 정작 커피를 재배하는 가난한 농부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고생은 가난한 농부가 하고, 돈은 거대 기업이 버는 불의한 사회 구조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커피 뿐만이 아니라,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를 재배하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농부들은 카카오가 그렇게 맛있는 초콜릿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커피를 안 마신다. 대신에 나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녹차에는 카테킨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쌉쌀한 맛을 낸다. 녹차는 이 쌉쌀한 맛 때문에 먹는데, 카테킨이라는 성분은 항암효과도 있고, 체내의 노폐물도 배출해 주고, 카페인 흡수를 억제해줘서 중독효과도 막아 준다. 녹차를 마시면 피곤함도 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낮춰준다. 다만, 이뇨작용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는 단점은 있다. 그리고 몸이 차가운 사람들(음 기운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못한 음료이다. 몸을 더 차갑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양 기운이 강한 사람이라 녹차가 몸에 잘 맞는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기도이다. 기도의 주제를 듣는 순간, 귀를 닫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들은 기도에 대하여 하도 많은 설교를 들었든지, 아니면 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기도를 통해 어떠한 좋은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내가 녹차의 좋은 점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를 했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커피만 고집하는 사람과 같다. 그런데 나처럼 녹차의 효능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녹차를 마시듯이,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절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지 않는다.

 

오늘 말씀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이야기는 비유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목적은 기도와 낙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다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낙심 하는 이유는 기도 안 하기 때문이고,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삶은 낙심 거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낙심하고 싶어서 낙심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나의 능력과 상관 없이 낙심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는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나는 영어 때문에 매일 낙심한다. 물론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일상 영어에는 별 문제 없지만, 모국어인 한국어로 깊은 사유를 하는 것만큼 영어로 사유하지 못해 공부하면서 토론을 하거나 페이퍼를 쓸 때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낙심한다. 그래서 때로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하여 한탄까지 섞여 나올 때가 있다.

 

미국에 살다보니 낙심하게 되는 게 언어 이외에도 많다. 특별히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사회참여를 깊이 하지 못하는 현실이라든지, 이 나라가 나의 조국(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태어나 살다 묻혀 있는 땅을 조국이라 한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곳이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 거기에 묻혀 계시기에 나의 조국은 한국이 될 수 밖에 없다.)이 아닌 것 때문에 느끼는 이방인의 느낌 같은 것이 현실 속에서 벽으로 다가올 때 많은 낙심을 하게 된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사업의 실패 또는 경제의 불황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거나, 여러 가지 삶의 환경들로부터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얻게 된 정신적 질병이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노화에서 오는 약해진 신체와 마주하게 될 때와 병 때문에 고생하게 될 때 우리는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러한 낙심의 상황들 가운데, 우리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노화 때문에 오는 육신의 연약함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낙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겪게 되는 낙심들, 즉 불의한 낙심들에 대해서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끊임 없이 탄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의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도 하고,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라고도 한다.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든, 이 비유의 핵심은 끊임 없는 기도이다.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과부의 끊임 없는 기도 때문에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황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다. 하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생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살면서 나의 의지와 상관 없고,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냥 자포자기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주께 아뢰며,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사무엘의 엄마 한나이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엘가나였는데, 엘가나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그런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는데,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에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는 사회적 사형을 당했다.

 

엘가나는 두 아내 중 한나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제사 드리러 갈 때 엘가나는 한나에게 브닌나에 비해 분깃을 두 배나 더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두 배 사랑이 아닌, 자식이었다. 그 일로 한나는 매일 같이 펑펑 울었다. 이에 대해 엘가나는 한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한나여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여러분 같으면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는 엘가나(남편)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고마워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을 향해 광선을 쏘며 도끼눈을 뜰 것인가? 남녀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너 없이는 못살아하다가 나중에는 너만 없으면 살겠다한다.

 

어느 부인이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을 구박했다. "당신이 뭘 알아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부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 이였다. 부인은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부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남편이 죽어서 하얀 천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허구한날 남편을 구박 했지만 막상 죽은 남편을 보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다. 부인이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남편이 슬그머니 하얀 천을 내리면서 말 했다. "여보! 나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깜짝 놀란 부인은 울음을 뚝 그치면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의사가 죽었다는데!"

 

남편 엘가나가 부인 한나의 마음을 뭘 알겠나. 한나는 실로에 있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 그 당시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이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로 아뢰었다. 한나는 오랫동안 끊이 없이 기도했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고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한나가 취한 줄로 생각하고, 한나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한다.

 

한나는 기도하되, 남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 간절히 기도했다. 이렇게 기도했던 사람들이 또 있다.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길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던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이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댔다.

 

이렇게 기도해 봤는가?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술 취한 것처럼기도해 봤는가? 내가 지금 겪는 문제가 불의하다고 생각이 들거든, 내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히 필요하거든, 그 삶의 문제를 놓아두고, 술 취한 것처럼 기도해 보시라.

 

두번째로, 우리는 생활인에 이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기도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 공동체의 상황 중, 재림의 지연 문제 가운데 놓여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재림이 지연되는 것 때문에 낙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주변 세계(로마와 유대공동체)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러한 핍박을 견뎠던 첫 번째 이유는 예수께서 곧 재림하여 자신들을 영원한 생명에 들이시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혼내주실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는 달리 재림은 지연되었고, 그들은 핍박(박해) 속에서 죽어갔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재림 지연의 문제 가운데 살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정의와 사랑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인데, 그 나라를 살다보니 세상의 불의와 부대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창궐하는 엄청난 악 때문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세상의 창궐하는 악을 보며 쉽게 절망하고 실망한다. 하나님이 안 계시나보다, 라는 불경한 생각까지 들 때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돼서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들처럼 적당히 살고 싶은 유혹이 몰려든다. 그래서 우리는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하나님 나라에 은근슬쩍 들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산다.

 

한국에서는 최근 6살짜리 입양 딸의 시신을 훼손해 야산에 묻은 혐의를 받는 양부모가 아동이 숨지기 전 온몸에 투명테이프를 감아 놓고 17시간 동안 방치한 것으로 드러난 사건 기사가 언론을 도배했다. 세상에 얼마나 악이 창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악이 창월하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주님은 우리가 끊임 없이 기도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 졸라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라는 뜻이 아니다. 험한 세상, 악이 창궐하는 세상을 보더라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나의 의도나 의지와 전혀 상관 없는 일, 나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일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야 한다.

 

끝까지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러시아 속담에 희망은 맨 나중에 죽는다는 말이 있다. 희망은 우리를 부활케 한다. 내가 죽었다고, 내가 과부처럼 힘 없는 자라고, 희망까지 죽고 힘 없나? 십자가를 보라. 죽었다고 끝이 아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든 자는 부활한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개고 있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개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 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는 게 아닌가.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이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우리가 기도를 끊임 없이 하느냐 아니냐는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비유의 불의한 재판장처럼 불의한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고, 우리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는 분이고, 우리를 올바르게 판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창궐하는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약함을 아시며, 우리에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거나 예상치 못한 기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과부는 그 시대에 가장 힘 없는 약자였다. 단순히 남편을 잃은 여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과부와 무엇이 다른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약하다. 힘 없는 과부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 없이 기도하라. 주께서는 분명 우리의 끊임 없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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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