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6. 1. 02:51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친구 1 - 엘리바스)

욥기 2

(욥기 6:24-30)

 

욥기는 지혜문헌이다. 지혜는 하루 아침에 축적되지 않는다. 욥기가 지혜문헌이라는 뜻은 욥기에 제시되고 있는 지혜가 하루 아침에 깨달아진 진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삶을 꿰뚫고 나온 진리라는 뜻이다.

 

욥기서는 총 4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구성이 매우 짜임새 있고 촘촘하다. 욥은 하나의 잘 짜여진 드라마 같다. 거기에는 주연과 조연들이 있는데, 주연은 욥이고, 조연은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라는 지혜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이야기 전체의 줄거리는 동방의 의인이라 불리는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실하고 부유했던 그의 삶이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갈등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는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사탄의 참소에 의한 하나님의 허락이 작용한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에 동의하는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도 있지만, 욥기가 씌어진 시대는 대개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욥이 겪은 어려움이 보이지 않는 힘(신 또는 사탄)’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인식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고 믿지만,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섭리든 우연이든 우리가 겪는 삶의 고통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 어려움 가운데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도 허무해진다는 것이다. 즉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삶의 현실이라는 뜻이다.

 

욥이 재산과 자식을 잃고, 그리고 몸에 병까지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친구 세 명이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온다. 욥기서의 이야기는 욥과 그 친구 세 명이 주고 받는 지혜의 언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언변의 관점 포인트는 자신의 의로움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욥과 그러한 욥의 불의함을 지적하는 친구들의 지혜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서 어떠한 불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더 고통스러워 한다. 어떻게 의인이 이렇게 고통을 당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특별히 기독교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욥의 관점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 의인이 어떻게 고난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고난은 의인이 받으면 안 되고 악인이 받아야 한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별히 신명기서에는 이런 말까지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도 논증하고 있는 내용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구원)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예수가 죽은 후 당돌하게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배경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인데, 경건한 유대인이란 율법을 잘 알고 율법 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뜻한다. 신명기서 21장에보면 나무에 달린 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율법적 지침이 나온다. 그 부분을 직접 보자.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2-23).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주님)로 고백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을 온전히 준행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의 그러한 행동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의 아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부활 역사 때문이다.

 

이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율법의 가르침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인식하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이 존재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예수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라면, 또한 그가 정말로 의인이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사람들의 신앙을 방해한다. 이러한 의문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경건하고 건전하게 갖기 위해서라도 욥기서에 제시되고 있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통렬한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꼭 필요하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토로하는 욥에 맞서 그의 친구 세 명(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을 정죄한다. 그들의 논점은 이것이다. 고난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 그들은 인과응보론을 주장한다. 욥이 이렇게 고난 당하는 이유는 그에게 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래서 욥의 세 친구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맞서 욥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욥기서의 구성은 매우 탄탄한데, 그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일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서의 이야기 전개는 우선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탄식을 늘어 놓으면, 그에 대하여 욥의 친구가 한 명씩 대응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두 세트가 진행되고 나서, 엘리후라는 젊은 지혜자가 등장하여 욥과 세 친구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끝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여서 모든 문제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견지해야 할 자세는 일단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욥기서이기 때문에 욥의 편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없고, 욥의 주장과 세 친구의 주장을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분석하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의 주장이 인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지혜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욥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데도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고, 우리의 연약함 또는 죄 때문에 고난 가운데 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욥기서 3장에서 욥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견지하며,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에 대하여 읍소한다.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죽음을 동경하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데, 결코 자기 자신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 괴롭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당황해 한다. 그의 탄식은 고난 받는 의인의 탄식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것에 대한 가르침은 별로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 그저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며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탓하며 우선 회개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의식부터 갖고 보는 것은 건전한 신앙이 아니다. 물론 살다 보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많지만 인생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의 뜻(의지)과는 상관 없이 나에게 닥쳐 오는 불행과 어려움이 많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을 모두 자기 자신의 부족함 때문인 것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우선 그 상황에 대해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탄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문제 자체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가질 수 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대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칼 융이 이런 말을 했다.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은 운명이 된다.”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고 있는데 그 불행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 불행을 반복하게 되거나 그 불행 가운데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된다. 대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인식 능력은 형편 없이 결여되어 있다. 일례로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지금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인식 능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자기는 지금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주는 건강에 좋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알코올 중독 가운데 살다가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죄의식이 그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작용하기 때문이다. 배우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극중 성유리는 물에 빠지는데 자기를 구하고 죽은 동생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 폭력을 통해 자신의 죄의식을 씻으려 하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이것은 불행한 일보다 더 불행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면서 그 불행을 자기의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에 저항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다 간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불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욥기서에서 욥이 견지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의로움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다.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탓으로 금방 돌려 버리면, 우리는 평생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불행을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불행이 일상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욥에 대하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사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그러면서 그는 욥에게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를 인정하라고 촉구한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5:17).

 

이러한 주장을 펴는 엘리바스의 입에서 인생에 대하여 큰 통찰을 주는 지혜의 말이 쏟아진다.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5:6-7). 이 지혜는 불교의 그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라고 부른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러한 를 느낀다.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게 되지만, 정말 인생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우리는 왜 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내야만 하는가?

 

욥은 엘리바스의 권고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물론 욥은 엘리바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엘리바스의 인생에 대한 통찰도 모두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통찰이 욥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욥의 항변이 정곡을 찌른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6:25).

 

우리는 남을 쉽게 정죄한다. 특별히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해 쉽게 말을 내뱉는다. 물론 그들을 정죄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지’, 옳은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옳은 말조차 삼갈 필요가 있다.

 

인생은 어렵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도 아닐뿐더러, 내가 경험한 것이 전부도 아니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세는 열린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욥의 주장도 맞고, 친구들의 주장도 맞다.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각도로 진단해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도 죄의식에 물들어 버린 현대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욥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뻔뻔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되지 않는 불행은 운명이 된다라는 말처럼, 자신의 불행을 온전히 인식하는 인식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불행이 인식되지 않으면, 불행이 불행인지 모르고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그 행복의 시작은 내 삶 안에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욥처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하여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것이다. 욥은 말한다.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6:29). “나의 의는 아직 건재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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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