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7. 05:54

마음의 문화

창세기 19번째 시간

(창세기 19:30-38)

 

소알로 피신한 롯과 두 딸, 그들은 거기에서 얼마 살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서 살게 됩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알로 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죠.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롯은 자신의 뜻대로 소알 땅으로 가지만, 결국 못 버티고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산으로 쫓겨 갑니다.

 

롯이 살던 고대사회는 현재의 문명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되어 있지만, 옛날 고대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이사가 자유롭지만, 옛날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 자체가 큰 모험이고 도전이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형성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소돔 땅에서 거주하던 롯도 겪은 바입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비하하면서 그를 헤치려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재물이 많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던 소돔 땅에서조차 그럴 진데,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피난한 소알 땅에서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죠.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과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간에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롯처럼 이렇게 산으로 쫓겨 갑니다.

 

산으로 쫓겨간 롯의 가족에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합니다. 요즘 말로 19금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바로 근친상간입니다.

 

근친상간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산으로 도망한 이들은 동굴 속에서 은둔하며 살게 됩니다. 소돔 땅에서 많은 재물을 내세워 떵떵거리며 살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의 삶입니다. 거지를 넘어서 거의 짐승처럼 살게 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은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 가자”(31, 32).

 

물론 롯의 두 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급작스런 일련의 일들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엄마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죽었죠. 아버지는 소돔을 멸망시킨 재앙 때문에 벌벌 떨고 있죠. 약혼자들은 소돔과 함께 멸망했죠. 자신들이 누리던 풍요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죠.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자신들의 배필을 구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것 같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신 차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기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례로, 미국에는 곳곳에서 동물들이 자주 튀어나오는데, 여러분이 운전하다 사슴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사슴이 튀어나오면 무조건 받는다라는 마음을 정해 놓지 않으면, 우물쭈물하다가 사고 날 가능성이 큽니다.

 

큰 일을 겪을 때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면 엉뚱한 결정과 함께 인생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바로 롯의 가족처럼 말이죠. 위기의 상황에서 잘못된 생각을 한 롯의 두 딸은 정말로 온 세상의 도리를 따르지 않고, 이방인들조차도 저지르지 않는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돌아가는 일을 보십시오. 두 눈 뜨고 보기에 참 민망합니다. 아버지와 동침하기 위해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입니다. 권력, , , 여색(남색) 등 사람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것은 온통 죄 밖에 낳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을 홀립니다. 창세기에도 그런 기사가 있지만, 영어로 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영웅 서시인 <베어울프>도 그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몇 년 전 안젤리나 졸리를 주인공으로 해서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어글리한 괴물 그렌델의 어미 역으로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했었는데, 겉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괴물 그렌델 보다 더 흉측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것이 그렌델의 어미였죠.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러 갔던 영웅들은 그렌델의 어미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결국 그렌델의 어미에게 오히려 농락을 당하고 맙니다. 그런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렌델의 어미를 죽이는 영웅이 베어울프인데, 그 과정이 정말 힘겹습니다.

 

롯의 두 딸은 이틀 상간으로 차례대로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그와 동침을 한 뒤 아이를 생산합니다. 첫째 딸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모압. 둘째 달이 생산한 아들의 이름은 벤암미. 이들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그들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죽을 까봐 두려워 안전한 곳을 찾아 도시문명을 떠나 산으로 들어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던 시대의 문화는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타락한 문화 때문이었습니다. 두 천 사가 소돔 땅에 살던 롯의 집을 방문했을 때 소돔 사람들이 두 천사와 상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거칠게 나왔었는지,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아 알고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문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척도는 눈에 보이는 문명에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에 있습니다. 문명은 눈에 담지만, 문화는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롯의 가족은 눈에 담았던 문명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래서 산으로 갔지만, 이들은 마음에 담았던 문화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이죠. , 모름지기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마음의 문화입니다. 이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했어도 문화가 타락하면 그 문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 로마 등 역사상 세계를 호령했던 나라들이 모두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삶이 풍요롭고 남들의 부러움을 살지라도, 즉 개인의 문명이 휘황찬란해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타락해 있으면, 개인이 파산 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죠.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종종 접합니다. 특별히 로또에 당첨되어서 일확천금을 쥔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종종 접합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한 것 같지만,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이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마음 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 마음이 품은 것이 무엇입니까? 탐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그렌델의 어미처럼 흉측한 것입니까? 물론 자기를 마음에 품어 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품으라고 핏대를 높여 말하는 것은 오히려 볼품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에 거리껴 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그것과 정대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하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십자가의 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래서 여전히 전쟁터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어떤 문화가 승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분명 그 운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사탄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없기에 오히려 마음이 평안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탄의 마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전쟁 상태에 놓여 있어 평안치 못한 상태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샬롬(평화, 안식)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디에 해당되시는지요?

 

한바탕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섭고 귀찮아서, ‘살던 대로 살다 죽을래’, 그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살아 있으나 죽은 인생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된다면, 그 인생은 죽은 것 같으나 살아 있는, 생명이 철철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화를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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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