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5. 4. 6. 06:49

'예수 부활하셨다'의 의미

(눅 15:11-24)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우리가 찬양했듯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우리는 이 날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며,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일단, 외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사실을 담고 있다는 뜻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 준다는 뜻이다.

 

유레카!”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찾았다라는 뜻이다. 기원전 25년경, 지금으로부터 2 2 20년 전 살았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일화로 알려진 말이다. 아르키메데스는 그 원리로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금세공사가 속임수를 썼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뭔가 어려운 일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유레카!”를 외친다. 아르키메데스가유레카!”를 외쳤을 때, “유레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찾은 그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 그 원리는물질의 밀도가 물질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칠 때, “예수 부활하셨다!”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He is Risen!)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어떤 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라는 현상은 그냥 신기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세상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만큼 신기한 일이 많다. 죽은 자가 살아날 확률이 많은 가? 아니면,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나 배가 뒤집혔는데 거기서 살아날 확률이 많은가? 실제로 옛날에 바다에 빠져서 죽게 됐는데 거북이가 등에 태워 뭍으로 실어다 준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라고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무엇인가 아주 큰 의미와 변화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외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예수의 부활은 지금도 계속해서 해석되고 있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예수의 부활이 진리인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진리는 확정된 원리가 아니라, 끊임 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신비를 말한다.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놓아두고, 그 부활 사건을 경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해석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가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우리(인류)를 구원한 구원 사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개념도 아주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쓰는언어의 범주에서 구원은 아주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고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아주 보편적인 기독교의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구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죄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죄의 개념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의 개념은범죄를 주로 의미한다. 나쁜 짓, 즉 윤리 도적적인 범주를 벗어난 일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사회적 지탄(손가락질)을 받고, 그 값을 어떤 형태로든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의 개념은 윤리 도덕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죄는 신학적 죄의 개념인데, 여기서신학적이라는 말은하나님과 관련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죄는 하나님과 관련된 죄의 개념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은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아주 유명한 예수님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예수님 버전(또는 누가복음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탕자의 비유 이야기에는 세 명의 주연급 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 큰아들, 둘째 아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는 작은 아들을 가리킨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그리고 며칠 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준 모든 분깃을 챙겨 먼 나라로 떠난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후려 아들 놈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통념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불구하고 재산을 요구하거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죽은 자로, 없는 자 취급했다는 뜻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신학적 죄의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창세기 말씀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순히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뜻은인간은 하나님의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보자, 어떻게 행동하는가?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와 분리되어서 마치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둘째 아들은 그때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단순히 시련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완전히 무너진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둘째 아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고 만다. 돼지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혐오하던 동물이다. 율법에 돼지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다. 율법에서 금하는 동물은 부정한 동물이요 혐오 동물이다. 그런데, 그 돼지를 치는 것으로 모자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죄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 수 없도록 창조된 존재인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귀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아가는 그 존재 자체를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원죄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 분리되어 살던 존재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원죄는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원죄는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죽은 자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누가 해주어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

 

둘째 아들의 상황을 잠시 더 보자. 둘째 아들은 궁핍한 지경 (죄의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삶을 살아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상태에 이른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지금 이 스토리의 전체 상황을 신학적인 용어로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회개는 단순히, ‘아이고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돌이켜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하나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제자들이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바로, ‘구원을 보았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신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살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다시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야말로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은 둘째 아들이 17절에서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했을 때처럼, “!!”라고 하는 깨달음의 사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즉 죄 가운데 살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은 열어준 구원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이다.

 

, 아버지께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보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이것은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유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분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도 눈에 안 보이고, 깨닫는 순간도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님과의 합일된 삶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뇌과학에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뇌의 작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뇌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정도만 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인지할 수 없다.

 

일례로, 개는 세상을 우리처럼 컬러플(colorful)하게 보지 못한다. 흑백으로만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개는 우리 인간이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듣는 소리의 범위와 개가 듣는 소리의 범위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박쥐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생활한지 오래 되었으므로 눈이 퇴화되었다. , 박쥐는 장님이다. 그들은 세상을 초음파로 인식한다. 우리처럼 눈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쉽게 생각해 보자. 눈 먼 자가 눈 외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과 눈이 보이는 자가 빛을 통해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착각 중의 가장 큰 착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인식하는 능력을영성이라고 한다. 빛이 없으면 우리 눈을 절대로 아무것도 못 본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절대적인 이유는 빛 때문이다. 그것처럼, 성령의 빛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은 어느 무식한 종교업자가 말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 구원 사건, 즉 진리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진리의 빛인 것이다.

 

오늘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부활하셨다!”를 외친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빛이 비추어, 영안이 열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보이게 되길 바란다.

 

* 실제 설교에서는 "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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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