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2. 27. 18:21

주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

(베드로후서 1:16-21)

 

오늘은 주님의 산상 변모 주일이다. 오늘로 주현절(세상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 끝나고, 수요일에 있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기에 들어선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안다.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전한다. 그 이야기에 보면, 주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었는데,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자 논쟁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 요한이다, 엘리야다, 예레미야다,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여 칭찬을 받는다. 그러한 인자 논쟁, 예수가 누구냐?”라는 질문 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산상 변모 사건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정황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그 때에,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누군가 데리고 온 어떤 사람의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이 변형되셨다(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는 것과 2) 변형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과 3)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이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는 것과 4) 그러는 사이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아라는 음성이 들렸다는 것과 5)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들을 안심시키고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냐?’라는 인자 논쟁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는 그리스도다(메시아다)’라는 증언이 펼쳐진다. 그런데,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이는 예수의 모습과 이사야서에서 증거하는 메시야의 모습은 매우 대조적이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님은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에서 빛이 났지만, 이사야서에서의 메시아는 주 앞에서 자라나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53:2)라고 전한다.

 

이사야서에서 전하는 메시야의 모습에 비하면,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어떠한 예수인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사야에서의 메시야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는 부활의 예수이다. 부활의 예수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눈다. 모세는 율법을 의미하고, 엘리야는 예언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본다.

 

부활의 예수의 모습을 목격했을 때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을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산에서 내려와 마주한 그들의 일상은 녹록치 않았다. 간질병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제자들은 쩔쩔 맸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 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서 아픈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갔지만 소용 없었다고 하소연한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장면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밤낮으로 예배하며 기도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4). 이럴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깨닫아 알아야 한다. 자신도,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모두 그렇다. 마음은 공부하고 싶은데 몸은 노는데 가 있으면 안된다. 가정도 부부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자녀들도 잘 키우고, 가정에 복이 임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야 교회가 부흥되는 법이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합시다!)

 

그 전까지 우리가 본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는 비겁한 자들의 모습이었다. 다른 말로 해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같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약속한 성령을 받은 뒤,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자신들도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도망치고 숨던 제자들은, 성령 받은 뒤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사도행전 214절은 그 정황을 이렇게 증거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우리가 읽은 베드로후서의 증언을 보면,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해도 거기에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듯 하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이전에 있었던 산상 변모 사건에서의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담대한 마음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한다고 증거한다.

 

산상 변모 사건에서 일어난 주님의 변모는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실 주님을 미리 보여주신 하나님의 예언이었다. 예수님이 변모하여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신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율법의 완성이요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의 증언에 따르면, 율법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말한다. 예수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뜻은 그 분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예수께서 예언의 성취라는 뜻은 그가 바로 오실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것을 제자들은 산상 변모 사건에서 보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확증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변모는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베드로의 고백대로, ‘그리스도(메시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제자들은 변모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산에 그냥 머물러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렇다면 예수가 누구인지 안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의 산상 변모 사건을 목격한 세 명의 제자들처럼 그냥 이곳에 머물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세상에 무관심한 사람들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다.

 

주님은 그들을 산에서 할 일 많은 세상(일상)으로 데리고 내려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괜찮으니, 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세상에 알리라고, 사명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을 예언하는 자로 부르신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19). 성경의 예언은 점쟁이들이 하는 예언과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이 궁금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에 출세길이 열릴까 하고 점쟁이를 찾는다. 한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은 충청도 산 골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부자가 많다고 하는 서울의 강남구, 서초구에 점집이 가장 많다.

 

성경의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증거하는 더 확실한 예언이다. 그 예언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다. 우리는 모두, 이 예언을 선포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다.

 

여러분, 변하고 싶지 않은가?(여러분, 변하고 싶죠?) 그래서 우리는 소소하게, 헤어스타일도 바꾸고, 예쁜 옷도 사고, 여행도 가고, 어떠한 일이든 변화를 구하며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우리를 모두 예언자로 부르신다. 그 예언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이다. 그렇게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초대교회 제자들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너무도 대조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 꽁꽁 숨어 있었는데,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 예언을 전한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한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21). 그러므로, 우리의 변모는 성령의 감동하심에서 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예배하며 기도했던 제자들에게 불같이 내려 주셨던 그 성령, 바로 그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변모하여, ‘예언의 일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성령을 날마다 기다리는 자들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의 예언을 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사랑을 이루셨는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를 세상에 증언하는,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우리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성령 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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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