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2. 18. 15:48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시편 62:1-12)

 

성경의 풀네임은 성경전서라고 한다. 앞의 두 글자만 따서 성경이라 부르기도 하고,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따서 성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경이든, ‘성서든 모두 성경전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이라는 말을 고집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마치, ‘성경성서가 따로 있는 듯이 말이다. 그것은 성경전서에 대한 큰 오해다.
(
한국 교회는 기독교예수교로 크게 나뉘었다는, 웃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싸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도 답답해서 그것 때문이라도 빨리 오실 듯 하다.)

 

동양문화에서 ()’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위키백과)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는 성경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를 안 하는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닐 정도이다. 개신교회는 성경에 죽고 성경에 산다. 그런데, 성경공부가 발전하면서 잃어버린 전통이 있다.

 

요즘엔 성경공부를 하면서 눈으로 읽으며 밑을 그어가면서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나오면 노트를 한다. 그런데, 원래 경은 소리를 내어 낭독하는경전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 좋다. 예로부터 경전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새겼다.

 

구규(九竅)라는 것이 있다. 사람 몸에 있는 9개의 구멍을 말한다. , , , , 그리고 항문과 요도가 그것이다. 눈으로 읽으면 2개의 구멍만 작동하지만, 낭독을 하면 7개의 구멍이 작동한다. ()경은 그렇게 사람 몸의 온 규(구멍)을 작동시켜 뇌와 온 몸에 파동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은 몸을 흔들면서 암송해야 한다. 성경이 산문체가 아닌 운문체로 여전히 보존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낭독과 암송, 그리고 흔들며 읽은 습관이 사라진 것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잃고 굳어져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옥성득 교수의 블로그, 성경 독서법)

 

오늘 말씀 같은 경우도 그냥 눈으로 읽고,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에 밑줄만 친다면, 오늘 말씀이 가진 위력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실제로, 몸을 흔들며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 그 울림이 완전히 다르다. 마음에 뜨거움과 확신이 스며든다. 눈물이 나고 힘이 난다. 하나님이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며 나의 울부짖음을 옆에서 들어주시는 분처럼 느껴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얼마나 힘 있는 말씀인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영혼은 자기 자신을 어쩌지 못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어 댄다. 그럴 때, 갈대처럼 흔들리는 영혼을 향해, 큰 소리로 이 말씀을 낭독하면, 영혼이 잠잠해지지 않을 수 없다. 영혼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돌비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기는 것이다. 심비는 마음 속에 있는 비석이다. 오장육부에 말씀이 새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심비에 말씀을 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암송과 낭독이다. 말씀이 심비에 새겨져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갈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9절이다. 9절 말씀은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가르쳐 준다.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9). 한국어 성경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다. 이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Lowborn men are but a breath, the highborn are but a lie, if weighed on a balance, they are nothing; together they are only a breath”(NIV). 번역하면 이렇다. “태생이 천한 사람도 입김이고, 지체 높게 태어난 사람도 거짓이다. 그들을 저울에 달아보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 모두 하나의 입김에 불과하다.”(사역).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모두 입김보다 가벼운존재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가난한 사람은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음을 더 잘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은 가난한 자보다는 부유한 자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인 듯 하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10). ‘포악, 탈취이러한 단어는 부유한 자가 가진 권력(power)’를 말한다. 대개 권력을 쥐면,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위대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여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

(얼마전 발표된 뇌과학자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뇌파가 달라지고, 무엇보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 의지한다는 뜻이다.)

 

고대시대는 태생이 비천한 자와 태생이 고귀한 자의 구분이 명확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이 그들의 귀에 더 잘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처럼 태생의 구분이 없어진 시대와 우리처럼 선진국에서 평균이상의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더욱더 암송하고 낭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자기가 구원이고 피난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칭 메시아가 즐비한 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구원이고 피난처로 삼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명확하게 들어야 하는 말씀은 8절의 말씀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8). 그리고 셀라가 나온다. 충분히 멈추어 서서 새겨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rust in him at all times, O people,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8). 모든 시간, 언제든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께 네 마음을 쏟아 놓으라!”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자.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마음을 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영혼이 바람 맞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 다른 것에 마음을 쏟아 놓으니, 우리의 영혼이 잠잠하지 못하고 아우성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영혼에 큰 소리로 외쳐보자.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마음을 주님께 쏟아 놓으라! 하나님만이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시라! 권능이 하나님께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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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