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2015. 1. 24. 12:45

바람 부는 날

 

이름 없는 도시 번지 없는 집에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새들이 산다

어쩌다 차려진 밥상엔

뱃고동 소리만 들리는 소라 게가 올라오고

하루에 반나절도 햇볕을 못 쐐

영양실조에 걸린 산나물이 노랗게 오그리고 있다

눈이 퇴화되면서 방향감각을 잃은 새들은

바람이 부는 날에만 산책을 나간다

바람은 그들의 네비게이션이다

가늘어진 날개를 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안간힘을 쓰며 날개를 펴는 이유는

남은 깃털을 바람에 날려 보내기 위함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는 새들이 나는 것은 볼 수 있어도

그들이 죽는 것은 볼 수 없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새들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바람을 건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 세상과 이별하고 마는 것이다

바람 부는 날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깃털은

희미하게 살다간 어떤 새의 마지막 눈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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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