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4. 3. 05:56

선지자 아브라함

창세기 20

(창세기 20:1-18)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이 또 발생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그때와는 장소가 좀 다릅니다. 그때는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지금은 가나안 땅 남부지역인 네게브의 그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상황도 좀 다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애굽에서의 일은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에 대한 약속을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은 뒤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아브라함이 좀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들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부족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사건은 이전 장에서 보았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했지만, 이번 사건에서 아비멜렉 가문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멸망을 피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감당한 선지자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등 족장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직 거류민이었고, 게다가 그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유목민이란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가축들을 키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축들에게 꼴과 물을 먹이기 위해서 꼴과 물을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삶은 아브라함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형태였습니다. 아마도 마므레에서 네게브 지역으로 옮겨간 것도 새로운 목축지를 찾아 나선 것이겠지요.

 

유목민은 가는 곳마다 거기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짐승도 자기 영역 침범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호랑이 같은 맹수는 자신의 영역을 돌면서 자신의 분뇨 같은 것으로 영역 표시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적자가 있으면 가서 목숨을 내놓고 싸웁니다. 영역을 지키는 것은 곧 생명을 지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누군가를 순순히 받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싸움이든 타협이든 어떠한 갈등을 통해서 서로 간의 공생점을 찾아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랄 지역으로 이동했던 아브라함과 그곳에서 이미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비멜렉 간의 공생점은 사라를 아비멜렉이 차지하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가 일종의 화해를 가져온 것이죠. 이것을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성매매같은 것으로 보면 안 됩니다. 지금의 문화와 그 당시의 문화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를 전제해 두고 읽어야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단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일촉즉발의 갈등은 사라를 통해서 잠재워지는 듯 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일의 상황을 의롭게 드러내십니다. “[보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여자다”(3). 이에 대해서 아비멜렉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이러면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합니다. 순전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주장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아비멜렉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비멜렉은 즉시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사라는 어떠한 욕도 당하지 않고, 아비멜렉으로부터 풀려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만나 크게 힐책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를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9).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변명을 합니다. 첫째,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11)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인해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데, 위에서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선하고,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모두 악하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이것은 심각한 영적인 교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밀한 방식으로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우리 멋대로 제한을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교만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실제로 그의 아내 사라가 그의 이복 누이라는 변명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자신들을 지킬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지혜가 상대방에게는 멸망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혜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는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느 한쪽이 멸망하고 마는 제로섬게임 같은 것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함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합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이 아비멜렉에게 수긍이 가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비멜렉 측에서는 이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이방인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후한 처분을 내려줍니다.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15). 이 뿐만 아니라, 이유야 어찌되었든 잠시나마 욕을 보였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놓아주면서 사라의 수치에 대하여 그냥 넘어가지 않고 최대한 보상을 해줍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마지막 마무리를 아브라함에게 맡기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의로고 온전함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을 앞서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일의 마무리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넘어갑니다.

 

아브라함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17).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아비멜렉 집안은 대가 끊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풀리면서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하십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해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일컬어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선지자란 앞 날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란 신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지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역할은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역할이 좀 더 광범위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닌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속한 자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은 아마도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대가 끊길 것이다인 듯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줬던 것이 선지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선지자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있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에서 아비멜렉 보다 의롭거나 완전하지 못했지만 갈등과 문제를 마무리 짓는 결정적인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선지자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 의롭고 완전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노력해야겠지만, 그러한 것과는 상관 없이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 방점을 찍는 특권은 그리스도인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문제와 갈등의 마무리에 방점을 찍을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은 희희낙락 거릴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상황입니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잘 감당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생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도가 한 사람의 생명(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가 오늘 말씀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집안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신실하게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아비멜렉은 멸망에서 벗어났습니다. 선지자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람을 살리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여는 기도를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된 선지자 아브라함, 그러나 정작 자신의 아내 사라의 태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사라의 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궁금증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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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