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25. 04:38

소통의 능력

(여호수아 22:10-34)

 

대개 인간관계가 깨지는 가장 큰 원인은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집약 노동이다.” 인간관계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래서 일 중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얼마 전 미국 남침례회 국제선교이사회에서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나는 이유에 대하여 분석한 적이 있다. 그곳의 고위 보좌관 폴 아킨은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교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 부족, 질병, 테러, 향수병이 아니다. 심지어는 결실이나 복음에 대한 반응이 없어서도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재정과 질병과 테러에 대비를 잘 한다. 향수병을 극복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준비를 한다. 하는 일에 대하여 결실을 맺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것들을 하느라 소통의 능력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다. 결국 소홀하게 준비한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만다. 

 

오늘 본문에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보고 되고 있다. 가나안(요단 서편)에 대한 땅 분배 후, 이제 정복 전쟁을 마친 요단 동편의 세 지파 반(르우벤, , 므낫세 반)은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으며 자기들의 거처(요단 동편)로 돌아가면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는다. 그들이 쌓은 제단은 제법 컸기 때문에 멀리서도 사람들이 금방 알아보았고, 그들이 쌓은 제단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요단 서편의 지파들 사이에 퍼졌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오해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그 제단이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지파들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비느하스를 대표로 한 진상조사단을 꾸려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파견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쌓은 제단에 대하여 요단 서편의 지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들이 겪는 두 가지의 일 때문이었다. 하나는 바알 브올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아간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저지른 그 두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적지 않는 타격을 입은 경험이 있다. 바알 브올 사건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아간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만 했다. 그들은 그러한 끔찍한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민감성은 우리도 충분히 숙지하고 배워야 할 점이다. 죄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죄는 단순히 못된 짓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섬기는 게 아니라, 온 천하보다 귀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헤치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는 진상조사단은 요단 동편 지파들에게 이르러 그들이 거기에 제단을 쌓은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한다. 그들은 바알 브올 사건과 아간 사건을 언급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제단 이외의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라는 것을 확인시면서, “만일 요단 동편의 소유지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는 곳이라면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요단 동편 땅으로 건너와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지고 함께 살자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하여 자신들이 그렇게 제단을 쌓은 정당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의 말로 시작한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 엘로힘, 여호와! 그리고 자신들이 제단을 쌓음으로 우상숭배 한 것이라면,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지 마시고, 천벌을 내리시라고 말한다. 그만큼 자신들의 행위에는 아무런 우상숭배의 의도가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단 동편 지파들은 왜 요단 강 가에 제단을 쌓은 것인가? 그것은 번제를 위함이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요, 오직, “요단 서편의 후손들로 하여금 요단 동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한 자들로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일종의 증거물이라고 말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이 그 제단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은 요단 서편 사람들(가나안땅에 들어간 사람들)이나 요단 동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한 식구요 공동체라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를 헤치는 가장 나쁜 요소는 분리(separation)’배척(exclusion)’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분리하고 배척할 때이다. 분리와 배척이 일어 나면, 상대방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짐승 대하듯 상대방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결코 못된 짓을 못한다.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더 이상 존엄성을 갖춘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게 될 때, 사람은 사람에게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범죄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상실이고 존엄성의 상실이다. 그 현장에 생명도 없고 인간도 없다. 그저 흉악한 죄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은 단순히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차원의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무엇보다 상실된 인간성, 상실된 생명의 되찾음이다. 인간성과 생명이 상실되어 있는데, 그 상태로 천국으로 이동해 보았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곳에서도 상실된 인간성과 생명 때문에 분리와 배척이 일어나게 될 텐데! 구원은 존재의 변화이지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구원은 더 이상의 인간성 상실이나 존엄성 상실, 즉 생명의 상실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는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상실하지 않고, 다른 이(이웃, 타자)의 인간성이나 존엄성, 즉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자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고, 다른 이의 생명을 사랑한다.

 

소통은 단순히 서로의 말을 교환하는 행위가 아니다. 소통은 서로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이다. 소통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서로 기뻐하고 잘 지내는 것이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을 들은 요단 서편 지파들은 그들의 해명을 이해하고 기뻐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해명대로 그것은 그들의 생명을 헤치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안에서 서로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기 전에 요단 동편 지파들이 요단 서편의 지파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우려를 여호수아나 비느하스, 즉 지도자들에게 적극 알리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함께 강구해 나갔다면, 이렇게 불필요한 오해와 일촉즉발의 상황은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법이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그것을 푸는 일은 괴롭고 힘들다. 그러므로, 오해를 만들지 않도록 자기가 가진 생각을 상대방에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혜롭게 알리는 일은 관계를 부드럽게 풍성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삶의 능력 중 하나이다. 소통의 능력을 키워 인간관계가 가져다 주는 풍요로움을 더욱더 누리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 되면 되게 하라  (1) 2017.07.17
기쁨에 놀라다  (1) 2017.07.01
위로의 힘  (0) 2017.06.24
부활의 신비  (1) 2017.06.15
모른 척 돌아서지 말라  (0) 2017.06.12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