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의 일상화

 

미국 시골에서 목회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보니 십자가의 고난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조금은 알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시몬느 베이유가 신비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고난" "불행"으로 가득 찼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이 별볼일 없고 초라해지는 것을 못 견뎌 한다. 그런데 예수는 일반 인간이 그토록 혐오하는 "케노시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 짊어졌다. 그 당시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 별볼일 없고 초라한 인생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을 걸어갔다.

 

삶의 자리는 참으로 수렁과도 같다.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안 된다. 빠져나오려고 힘 쓸수록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감각은 마비되고 어둠은 깊어지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은 고난의 향유가 아니라 케노시스의 일상화이다. 잠시 고난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 그는 십자가를 짊어지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폭력적이고 권세를 잡은 자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래서 그에겐 자유가 있었다.

 

인생이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는 모두 ''이라는 십자가를 수동적으로 짊어졌다. 살면서 우리는 질병이라는 폭력, 늙어감이라는 폭력, 죽음이라는 폭력에 의해 고통의 자리에 들어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성실하게 마주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질병과 늙어감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케노시스의 일상화를 이루는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