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기독교의 합리성]

ㅡ 로크에게서 배우는 기독교

 

중세를 벗어나 근대의 문을 열었던 정치 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홉스, 그리고 루소와 더불어 반드시 살펴야 하는 인물이다. 서구 근대 사상가들은 단순히 정치 철학을 펼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은 눈여겨봐야 할 신학 서적이기도 하다. 중세의 사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국가는 종교(교회)의 시녀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과 비슷하다). 가부장제를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유교의 종교적 이념을 통해서 설명해 보자면, 국가는 왕을 보존하는 기구로 기능한다. 모든 국민은 왕을 받들어 모시는 일에 동원된다. 국민의 개별적인 삶은 모두 왕을 위한 헌신으로 표현된다. 가정은 이러한 왕정제도의 미니어처 역할을 했다. 집안의 어른,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는 가정의 왕으로 군림했다. 가정은 ‘가장’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가정의 모든 활동은 가장을 보존하는 데 헌신된다. 가장을 좀 더 확대하면 ‘가문’이 된다. 가문의 모든 식솔들은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 희생된다.

 

서구 중세는 종교가 사회의 기반이었다. 국가도 국민도 모두 종교를 보존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중세의 왕이 왕권 신수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왕은 신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다. 왕은 종교(교회)를 지키고 번성하게 하는데 특별한 임무를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회를 보호했고, 교회는 왕에게 신적인 능력을 부여해 왕을 신성화시켰다. 그래서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고, 교회는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근대 정치사상은 바로 이것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의 저술들은 모두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또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국가와 종교의 역할을 정의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 중에 존 로크가 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언뜻 보면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은 국가와 교회가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기독교는 진리이고,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에 있다.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아 구원에서 멀어진 이방인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인 힘을 사용해서라도 그들을 구원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로크를 비롯한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논리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로크가 펼친 사상은 ‘관용론(toleration)’이다.

 

로크의 사상적 배경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로크는 엄격한 칼빈주의적인 배경에서 성장을 했고, 유명한 청교도 설교가인 오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로크는 연인 마다리스 마샴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 물론, 여자도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 서로 잘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로크도 그랬다.) 로크의 연인 마샴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명했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랄프 커드워쓰(Ralph Cudworth)이다. 로크는 연인 마샴의 권고로 성경과 신학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특별히, 로크는 마샴의 아버지 랄프 커드워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것은 로크가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Radical Orthodoxy’(급진적 정통주의)로 알려진 사조이다. 물론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는 로크 당시의 캠브리지 플라톤주의를 보완, 발전시킨 신학사상이지만, 그 기조는 같다. 이들은 당시에 새로 시작되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사회가 세속화되는 것을 반대하고, 고전적인 기독교 신앙, 즉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기반, 또는 세계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오늘날 급진적 정통주의 신학을 이끌고 있는 존 밀뱅크, 캐서린 픽스톡, 그레이엄 워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신학의 틀에서 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세속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신학의 영역 안에 있다는 뜻이다. (급진 정통주의 신학을 조금 더 알고 싶으면, 바이블 오디세이에서 ‘급진적 정통주의’를 검색해 읽어 보시라.)

 

종교(기독교)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그의 주요 저서 <인간 오성론>, <통치론> 등에 나타나 있지만, 그것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는 1695년에 출간된 <기독교의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이다. 중세의 종교(기독교)는 다분히 강제적이었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신앙을 강요했다. 근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종교 형태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인간 영혼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외부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면 안 되고, 순전히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의 배경에는 그 유명한 ‘사회 계약설’이 있다.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국가 권력은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의 합의에 의한 계약에서 온다는 것이다. 사회 계약설은 개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자유를 중시한다. ‘계약’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오는 자유이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 더 이상 외부의 개입이나 강제를 거부하는 근대 사상은 기독교의 전파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 전파는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종교는 국가의 도움이나 국가의 강제력 없이 스스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힘이 약화된 것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로크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영혼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사적인 것이기에, 그래서 남에게, 그것이 국가라할지라도, 절대로 남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에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신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영혼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외적인 힘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을까? 로크는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한다. 온유, 설교, 그리고 모범적인 삶이다. 이것을 설득(Persuasio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종교는 설득을 통해서 전파되어야 하지, 힘에 의해서 전파되면 안된다는 뜻이다. 로크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더 이상 국가의 힘에 의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교회를 향해서 사람들을 설득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크는 기존의 전통이나 신학자들의 의견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여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합리성>의 부제는 ‘성서에 제시된 대로’(As delivered in Scripture)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로크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하지 않고 이성을 넘어서는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로크가 신앙을 이성의 한계 안에 가두려 했던 이신론자들이나 유니테리언들과는 다른 신앙의 결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합리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대개 ‘합리성’은 이성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로크는 이성의 연역적인 관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안자(계시자)가 신실하면 믿을 만하여 그 명제(주장/복음)에 동의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계시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대한 신뢰가 곧 합리적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계시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로크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인 잘 만난 덕?)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크가 ‘기적’(miracle)’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기적은 계시나 예언이 참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보면, 기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로크는 이 점을 들어 복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해서 기독교는 외부(국가)의 힘(도움) 없이 전도/선교를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이 바로 말씀과 기적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로크가 기적을 기독교 전파의 강력한 수단 중 하나로 보는 것은 참 흥미롭다. 로크에게 기적은 사람을 외부에서 강제로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설득하는 도구이다.

 

로크는 기적과 더불어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도구 도덕을 말한다. 여기에서 로크는 역사적인 신앙과 구원하는 신앙을 구분한다. 역사적인 신앙은 단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하는 신앙을 말한다. 그것은 참된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이다. 이것을 로크는 도덕이라고 일컫는다. 국가의 도움이나 강제력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 하는 입장에서 교회(그리스도인)는 사람들에게 도덕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이 곧 설득의 도구이다.

 

국가의 강제나 도움 없이 기독교를 전파해야는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다시 정리하면, 로크는 온유와 설교와 모범적인 삶을 제시한다. 이것을 통해 사람들을 설득해야지, 다른 방법을 통해서 신앙을 강요하거나 강제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는 국가로부터 더 이상 비호를 받지 못하는 교회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은 영혼의 문제는 국가조차도 개입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면서 발전했다. 특별히 근대 정치철학은 국가와 교회(종교)가 결탁한 것 때문에 발생해온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서 반성하며 그것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근대 사상가들은 국가와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국가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구별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세속화라고 부르지만, 세속화라는 말이 곧 신앙의 축소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모두 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로크도 그 당시 영국 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본인이 성경을 직접 연구해 보니 영국 국교회가 성경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크는 성경으로 돌아가자(성서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서로 돌아가자.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게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해석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크가 말하고 있는 ‘관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크의 종교 관용론의 핵심은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파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로크의 종교 관용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한 관용이다. 다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 당시 영국 국교회의 횡포를 겨냥한 것인데,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 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반영한 것이다. 관용이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표현하는 다양한 교회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교파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관용은 혐오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교회의 선교가 어려운 시절이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근대 정치사상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로크, 홉스, 루소, 그리고 칸트를 비롯한 근대 정치철학자들의 책은 단순히 정치철학 서적이 아니다. 모두 국가와 교회를 비판하는 정치신학서적이다. 그들은 교회를 그냥 무작정 비판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비판에 눈이 가려져 고개를 돌리지만, 그러지 말고, 그들이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면 이 어려움 시절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좋은 지혜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로크가 말하는 설득의 원리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온유, 설교, 모범적인 삶. 그리고 기적.

Posted by 장준식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남유다의 요시야 왕은 한국으로 따지면 구한말의 고종 왕 같은 존재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든 좋게 바꾸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한 왕입니다. 요시아는 아버지 왕, 아몬이 암살을 당한 바람에 그 자리에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쉬운 인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왕위에서 31년간 통치합니다.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통치를 열심히 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 왕 중에서 히스기야와 더불어 최고의 찬사를 받은 왕입니다.

 

요시야 시대에는 예레미야와 스바냐가 활동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스바냐를 읽어보면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만, 요시야 시대는 국제정세가 매우 안 좋을 때였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해야 했고, 전통적인 우방 애굽과 가까이 지내면서 새로운 제국으로 발돋움은 바벨론의 세력 확장에 대응을 해야 했습니다. 요시야 시대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국운이 맴돌던 때입니다. 마치 한국의 구한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요시야는 기울어지고 있는 국가의 운명을 바로 세워보고자 고군분투하면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폅니다. 그 중 하나가 성전 수리입니다.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필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전 수리를 하는 도중에 율법책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 사건을 요시야 왕과 더불어 대신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국가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발견된 율법책이라, 이것을 통해서 뭔가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던 것이죠. 요시야 왕은 율법책 발견을 토대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개혁 정책을 간절하고 처절했습니다.

 

요시야 시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애처로워지기도 하지만,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사람을 살펴보면, 첫째로 요시야 왕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26세의 젊은 나이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성전 수리를 위해서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신앙이 깊은 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요시야 왕은 겸손과 회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신앙인입니다. 율법책이 발견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자, 그는 곧바로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말씀을 들으려 하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나중에 훌다의 예언을 통해서 그가 유다 멸망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고 죽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원인이됩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 이것은 신앙의 리트머스지 역할을 합니다. 신앙 상태를 평가할 때, 말씀을 들으려는 자세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야김 왕은 완전히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여호야김은 율법책을 손에 들게 되었을 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불에 던져 태워버립니다. 신앙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교회 나오는 것부터 발걸음을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말씀을 들으려 예배의 자리를 더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어려움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서기관 사반(Shaphan)입니다. 서기관 사반은 요시야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인물입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의 의중을 잘 파악하여 개혁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사반 가문은 어려운 시대에 빛의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가문 전체가 예레미야를 돕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반의 세 아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돕습니다. 아히감은 예레미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보호해 주고, 엘라사는 예레미야의 목회서신을 바벨론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마랴는 정부관리로서 자기 방에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할 수 있도록 방을 내어줍니다. 사반의 손자 그다랴는 시드기야 왕 후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한 뒤 총독이 되어서 유다를 통치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고, 제사장 그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성전수리를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남유다 백성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반의 가문이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이 없었다면, 요시야 왕의 개혁도, 예레미야의 말씀사역도 진행조차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반과 그의 가문은 길이길이 기억될 만합니다. 그리고, 사반처럼 사역을 돕는 신앙인, 그런 집안이 되는 것은 참 영광스러운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사반과 같은 신앙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사람들 중 여선지자 훌다가 있습니다. 훌다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했던 인물입니다. 예루살렘 둘째 구역은 히스기야 왕 때 확장한 구역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이미 북이스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하고, 난민들이 남유다로 유입되던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히스기야가 세운 곳이 바로 예루살렘 둘째 구역입니다. 훌다가 그곳에 살았다는 뜻은 그가 북이스라엘 출신 선지자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시야 왕 당시 예레미야와 스바냐 같은 걸출한 선지자들이 활동했음에도, 성전 수리 도중 발견된 율법책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듣기 위해 여선지자 훌다를 찾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만큼 예언자로서 덕망이 높았다는 뜻입니다.

 

훌다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한 것을 경험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왜 북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는지도 알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훌다의 마음은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의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 그 길로 가는 것 같아 그 누구보다도 애처롭고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훌다는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과 요시야가 생전에 유다 멸망의 참상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고 있지만, 그 예언을 전하는 심정은 남유다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멸망을 피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훌다의 예언은 짧지만, 거기에 담긴 간절함은 우주보다 컸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닮고 싶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남몰라라 하지 않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여 더 좋은 상황으로 공동체를 인도하려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는 우리의 마음에 용기를 줍니다. 좋은 공동체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공동체는 어려움을 이겨나가려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힘을 보태고 힘을 합치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뜻밖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요시야, 사반, 훌다 같은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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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우리 시대의 결정적 사건 두 가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종말이라고 한다면, 인류는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인간을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기후변화와 AI는 인간이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종말로 몰아 세운 사건이다.

 

앤서니 레반도프스키(Anthony Levandowski). 미래의 길(WOTF: Way of the Future)의 교주다. 이 교주는 AI를 통해 신의 섭리를 따르려는 목적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2015년 설립했고, 2017년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팬데믹 기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최근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종교는 AI를 예배한다. 교주 레반도프스키는 묻는다. “가장 똑똑한 인간보다 10억 배나 더 똑똑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 수 있냐?” AI를 신(God)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AI교는 벌써 수천명의 신도를 모았다. 인간은 머지않아 AI에게 지구 통치의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것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재신론(anatheism)이라는 개념으로 현대 신학을 새롭게 구성하고 있는 신학자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는 이렇게 말한다. “재신론은 망각된 것을 향한 미래 내지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신적 역사의 부름을 향한 미래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이후의 사유’ 내지 ‘이후의 정서’ 그 이상의 것으로서 ‘이후의-신앙’입니다. 이후의 신앙은 종말론적입니다”(재신론, 11쪽). 프로이트, 맑스, 니체 이후 서구 사회에서 신 개념은 이들의 비판을 거쳐 살아남은 것만 유통될 수 있었다. 종교(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비판의 그물은 촘촘하여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크게 두 가지이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등이 구축해 놓은 근대의 그물을 통과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을 우회했거나,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은 전자이다. 그물을 통과한 신적인 것을 모아 다시 신론을 구성한 것이다.

 

리처드 카니는 자신의 신학을 종말론이라 부른다. 이미 존재했던 성스러운 것을 다시 발견했거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선취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종말인가 종말론인가. 다시 말해,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은 인간이 스스로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종말의 사건인가, 아니면 성취되지 않은 것의 선취 사건인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 이후 불과 100년만에 종교(기독교)를 향한 그물은 더 촘촘해졌다. 팬데믹을 지나며 그리스도인의 감소가 두드러진 것은 이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촘촘한 그물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회가 기후변화와 AI의 출현을 신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앞으로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인간은 종말을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종말론을 원한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그리고 AI의 출현으로 인하여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기후변화는 인간의 멸종을 가져올 것이고, AI의 출현 또한 인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이렇게 종말이 확실한 시대에 신학을 한다는 것,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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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기도문2023. 12. 7. 06:36

엘르아살과 같은 은총을 간구하는 기도

(민수기 20:22-29)

 

주님,

우리를 새로운 교회력,

새로운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초대와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시간으로 들어온 우리들에게

한없는 은총을 부어 주소서.

아버지 아론의 옷을 물려 받은 엘르아살처럼

주님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시고,

우리가 입은 옷은 그리스도의 옷인 것을 기억하며

그 옷을 잘 입고,

그 옷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잘 물려주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좋고 복된 인생이 없습니다.

새로운 교회력의 첫 주일에

복음을 듣게 하셨사오니,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걸음처럼

새로운 해에도 우리의 발걸음에 희망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이제 곧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신적인 것]

ㅡ 어떤  존재론적 자율성(Auto)

 

1) 아리스토텔레스 - 부동의 동자(ummoved mover): 모든 사물을 운동하게 하는 원인이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것

2) 기독교의 신 개념 -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 (스콜라 신학)

3) 데카르트 - 자기의식적인 자아 (코기토 철학)

4) 스피노자 - 자기원인적인 자연

5) 칸트 - 자율성(autonomy): 자기의식적인 자아도, 자기원인적인 자연도 아닌, 다만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6) 마르크스 - 자본

7) 하이데거 - 테크놀로지 (기술의 바깥이 없는 시대)

8) 푸코 - 권력

9) 4차 산업혁명 - 자동화/자율화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AI)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신학의 역할: 부동의 동자, 무제약적인 존재로서 자리매김 한 신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역할

ㅡ 그것이 정말 구원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행복을 주는가

ㅡ 그것이 정말 도덕적인 세상을 만드는가

ㅡ 그것이 정말 세계사랑을 이루는가

ㅡ 그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가

ㅡ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특별히 우리 시대에 신학이 주목해야 할 '신적인 것'은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이다. 자본과 테크놀로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정치신학의 과제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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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자기 반성의 시간

 

구약의 열왕기는 자기 반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역사를 돌아보며 자기 반성을 진지하게 합니다. “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은 멸망 당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가?” 열왕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게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반성입니다. 열왕기를 ‘성경’으로 읽는 그리스도인은 열왕기를 통해서 반드시 자기 반성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 반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기 반성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자기 반성에 쏟아부어야 할 시간을 유튜브 보거나 SNS를 확인하는데 빼앗깁니다. 칼 뉴포트(Cal Newport)는 자신의 책 ‘딥 워크’(deep work)에서 무엇인가에 몰입하는 것을 힘들어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스마트폰의 사용으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어느 한 가지 일에 몰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집중력이 감소됩니다. 칼 뉴포트는 하나의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시대에,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면 큰 성공을 거두는 대가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만큼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한 가지 일에 3-4시간 집중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그나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은 집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생활 마저도 안 하는 사람들은 스마트 폰을 내려놓고, 어느 한 가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일에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을 할 수 있는 삶의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 왕의 치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장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자기 반성은 열왕기하의 후반부로 갈수록 멸망의 원인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과 반성을 쏟아놓습니다. 므낫세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곳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멸망한 원인을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이 죄를 쌓고 쌓은 것’에서 찾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쌓이는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진지하게 갖지 않으면, 어느새 죄는 쌓이게 마련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사함의 표현을 ‘씻다’(wash)라는 말을 통해서 합니다. 몸을 생각하면 죄를 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언어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몸을 씻지 않고 살면 온갖 질병에 걸려 일찍 죽을 가능성이 큽니다. 홈리스들에 대한 보건의학 통계를 보면, 홈리스들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질병이 많고 수명이 짧다고 합니다. 물론 가족 또는 사회에서 소외되어 외롭고 힘든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위생이라고 합니다. 홈리스들은 잘 씻지 않습니다. 씻을 수 있는 시설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홈리스들은 위생에 어려움이 있어 일반인들에 비해서 질병에 걸릴 확률도 높고 평균수명이 현저하게 짧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늘 오던 홈리스들이 오랜 동안 안 보이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잘 씻기만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을 많이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는다는 것은 죄를 쌓아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으나, 적어도, 죄를 쌓아 두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 신앙의 유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즉 예배는 ‘씻는 행위’입니다. 매일 씻지 않으면 때가 쌓여서 몸이 불결해지고 병약해지기 쉬운 것처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죄를 쌓아 놓게 됩니다. 죄는 영혼의 바이러스와 같아서 제때 씻어내지 않으면, 또는 치료하지 않으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 반성은 결국 ‘씻는 행위’입니다. 나의 영혼(soul)에 혹시라도 쌓일지 모르는 죄를 부단히 씻어내는 행위입니다. 씻기만 잘해도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처럼, 자기 반성만 잘해도 인생을 복되고 값어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영혼이 깃드는 것도 맞는 말이고, 건강한 영혼이 육체를 건강하게 보존하는 것도 맞습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현대인들의 삶의 성패를 가릅니다. 자기 반성의 시간을 통해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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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교회]

 

현대사회에서 교회는 남유다 왕국처럼 작은 나라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이라고 하는 거대 제국, 즉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압박과 요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교회는 제국(자본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게 녹록치 않다.

 

열왕기를 보면, 제국의 압박과 요구를 수용하여 과도한 행보를 보이는 왕(아하스)도 있고, 제국의 압박과 요구에 저항한 왕(히스기야)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남유다는 제국의 압박과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열왕기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본주의 제국에 맞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교회는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런데, 결과는 같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압박과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교회는 좀 더 오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결국 같은 길을 간다. 멸망.

 

우리는(교회는) 머지않아 나라를 잃고 멸망 당하여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민족처럼 디아스포라가 될 지 모른다. 영토를 확보하기 힘들고, 국민을 모으기 힘들고, 독자적인 정치와 경제 체제를 갖추기 힘들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성경의 유대인들에게 말씀 중심의 신앙(시나고그 신앙)이 생기게 된 것은 더 이상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하는 마지막 세대일지 모른다. 우리 시대가 지나고 나면,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처럼 교회는 더 이상 성전 중심의 신앙을 하는 게 힘들어 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대 나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유대인이 사라지거나 여호와 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가 사라졌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사라지거나 그리스도 신앙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신앙을 지켜나가는 형태가 바뀔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야 한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성전이 되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형편에 있든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성육신같이 이루고 사는 삶을 연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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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두 가지 불행]

 

1. 칸트를 통해서 근대국가 건설을 하지 못한 것

 

유럽과 미국, 심지어 일본도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 칸트 철학을 근간으로 삼았다. 근대 국가의 특징 중 하나는 '공화주의'이다. 공화주의는 입법권과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는 정치 체제다. 근대 국가는 칸트가 제시한 공화제가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정치의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

 

유럽은 일찍이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 설립에 힘을 쏟았다. 미국은 유럽에서 건너온 칸트주의자들에 의해서 공화제를 수립했다. 일본조차도 칸트에게서 정치철학을 배워 근대 국가를 수립했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칸트 철학 용어는 모두 일본어에서 차용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한국인들이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칸트 책은 일본용어로 된 한국어이다. 그래서 칸트가 어렵다. 칸트의 한국어 용어 번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냥 일반 사람들도 칸트를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다. 철학책을 보면 더 확연히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한국은 아직 일제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의 정치는 겨우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공화제로 아직 발돋음 하지 못했다. 삼권분립이 약하다. 행정권에 입법권과 사법권이 끌려다니는 형국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는 아수라장이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칸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 정치인들이 칸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서구 사회와 대등한 관계에서 국제 관계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정치에서도의 도덕의 부재, 그리고 종교에서의 도덕의 부재는 모두 칸트 정치철학을 잘 모르는 데서 오는 부작용들이다. 칸트의 도덕(정치)철학은 정치와 종교의 부패를 막고 비판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서구 사회의 거대한 두 권력, 즉 정치(정부)와 종교는 비판의 대상이다. 비판 받지 않는 정치와 종교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임무, 그리고 신학의 임무는 정치와 종교를 비판하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가 인간성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2.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한국 사회의 불행 중 두 번째 것은 한국 사회가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 역사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개의 혁명이 있다. 하나는 1848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소위 '국민국가들의 봄'(Spring of Nations)이고, 다른 하나는 1968년 프랑스에서 시작돼 온 유럽을 휩쓸고 미국, 그리고 일본을 휩쓸었던 68혁명이다.

 

1848년 혁명은 그렇다 치고, 1968년에 있었던 68혁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한국 사회의 큰 불행이다. 68혁명은 베트남 전쟁 반대를 기치로 일어난 혁명이었는데, 그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베트콩의 요청으로 김일성은 1969년 김신조 일당을 남파했고, 그것 때문에 남한은 공안정국에 휩싸여 그당시 전세계를 휩쓸었던 68혁명이 일본을 거쳐 현해탄을 건너오려다 막혀버렸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 즉 일본의 대동아전쟁의 책임을 통회하는 학자들, 일제 강점기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고 한국 정부나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학자들은 모두 68혁명 세대의 일본 학자들이다. 그만큼 68혁명은 세계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독일이 2차 세계 대전과 아우슈비츠 사건(나치 사건)에 대해서 통감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는 이유도 68혁명을 거쳤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치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세계의 흐름에 뒤처진 이유는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림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들은 칸트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근대 국가를 세웠고, 68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적, 사상적 진보를 이루었다. 칸트와 68혁명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으면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면면히 한국 사회를 들여다 보면, 칸트와 68혁명을 거친 선진국들에 비해서 부족한 것이 많다. 무엇보다 사상의 토대가 약하다.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을 뿐, 사회, 문화적 깊이와 진보성에 대해서는 아직 전근대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많다. 성(gender, homosexuality)의 문제만 봐도 그렇다.

 

3. 결론: 칸트와 68혁명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한국보다 앞선 서구의 선진국(일본 포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칸트와 68혁명을 열심히 공부하여 근대 국가의 기틀과 사상을 재점검하고, 사회 속속들이 깊게 칸트와 68혁명의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단순히 그것들을 내면화시키는 것을 넘어, 칸트와 68혁명을 재해석하고, 그것이 가져다 준 부작용들을 최소화시키고, 더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사회를 재구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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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풍경

 

감사절, 잘 보내셨는지요? 가족들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셨을 줄 믿습니다. 명절이 오면 혹시 쓸쓸한 분이 계시지나 않을까, 마음이 쓰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내시는 분이 없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저희 가정은 오랜만에 선/후배 목사님들 가정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알래스카에서 목회 중인 목사님 가정이 감사절 연휴를 맞아 배이지역을 방문하는 덕에, 겸사겸사 모였습니다. 막상 모임 장소에 가보니, 오기로 한 목사님들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습니다. 처음 모임에 나오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고, 정말 오랜만에 보는 후배 목사님 가정도 있었습니다.

 

목사들이 모이면, 목회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저희들이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팬데믹 이후 교회의 변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상황이 공통적인 것은 팬데믹 이후에 교인의 3분 1은 교회로 돌아오고, 3분의 1은 하이브리드 참석(현장과 온라인)을 하고, 3분의 1은 증발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팬데믹은 신체(body)에 끼친 영향보다 정신(soul)에 끼친 영향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바이러스는 백신을 통해서 퇴치했는데, 정신의 바이러스는 아직 퇴치를 못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미래 목회로 흘렀습니다. 미래 목회에 가장 영향을 끼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는 기후변화와 AI로 모아졌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잘 못 느끼지만, 당장 알래스카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 가정은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지 몸으로 체험한다고 합니다. 예년에 비해 눈이 두배 왔고, 빙하가 녹아 하천의 물이 너무 불어나 주변의 집들이 쓸려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연어가 돌아오질 않고, 고래 사냥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삶을 얼마나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 팬데믹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극지방의 눈이 녹으면서 그동안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출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바이러스 팬데믹을 또 겪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것이죠. 게다가 기후변화는 바다와 땅을 황폐화시켜, 어느 시점에 달하면, 식량폭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이 큽니다. 조금 춥거나, 조금 더워지는 것은 인간이 견뎌낼 수 있으나, 식량 제배가 되지 않아 식량폭동이 일어나면 인간의 삶은 야만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스갯말로, 비옥한 내륙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총을 구비해야 하는 시절이 되었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농담이면서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큰 농담입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일은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지난한 노력이 따라는 것이라,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무력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기후변화 대화는 그만 두고, AI로 대화의 주제를 옮겼습니다.

 

실리콘밸리는 AI의 메카죠. 가장 강력한 AI는 실리콘밸리에서 개발되고 있는 중입니다. Open AI라는 회사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그들이 내놓은 ChatGPT는 이미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이 파고 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개발로 인하여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AGI는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수학문제 같은 것을 풀 수 있는 단계의 AI를 말합니다.

 

앞으로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AI가 목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대화를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저희들이 내린 결론은 AI를 적극 배워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ChatGPT를 활용하여 필요한 교회 사역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아주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배우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습니다. 영어로 사역을 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미 ChatGPT가 상당히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영어 설교도 교정해 주고, 기도문도 만들어 주고, 영상작업하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단축해주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통용됐지만, 이제 이 말은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로 바뀐 것 같습니다. 점점 변하는 속도가 빨라,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불안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이 시대에 응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좋은 것은 내가 현재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걱정’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걱정 보따리를 서로가 서로의 앞에 풀어 놓으면, 모두 비슷비슷한 걱정이기에 불안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하면서 걱정을 해소할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걱정 보따리를 풀어놓고, 우리가 얼마나 비슷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확인하면서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함께 그 걱정을 풀어나갈 지혜를 배우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함께 위로하며 기도하며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장준식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히스기야 왕은 다윗 왕과 요시야 왕과 더불어 유다 왕국 최고의 성군(聖君) 중 한 명입니다. 히스기야 왕을 뒤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12살이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55년간 남유다 왕국을 다스립니다. 그런데 므낫세에 대한 평가는 역대 왕들 중 최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쌍벽을 이루며, 누가 더 악한 왕인가 배틀(battle)을 벌일 정도입니다.

 

자식 농사는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성군 히스기야의 아들이라면 아버지를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는 최고의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 어리둥절해집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 것인지, 미궁에 빠지는 듯합니다. 정말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잠언 1장 7절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우리 시대는 이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학교 교육은 온통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지식의 ‘시작’(beginning)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이런 저런 비상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지고 이런 저런 훌륭한 일을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쳐 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찬란했던 계몽주의의 끝이 처참한 전쟁(1,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교훈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했고,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인간의 조건’을 되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없는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를 수 있는지, 인류는 역사에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악한 일들은 모두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합니다.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므낫세에게는 이러한 지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므낫세 왕의 행위를 서술하고 있는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 왕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립니다. 이런 므낫세 왕의 행위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

 

므낫세가 왕에 즉위할 때 나이가 12세였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므낫세 왕은 히스기야가 생명을 15년 연장 받았을 때 낳은 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15년 생명 연장을 받지 않았다면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므낫세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판 가룟 유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으니라”(마 26:24).

 

인류 역사에 보면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대 세계사에서는 ‘이디 아민’ 우간다 독재가가 그런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이 사람은 집권 8년간 5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경제를 심하게 망쳐 우간다를 파탄으로 몰고 갔습니다. 7-80년대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이 독재자는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도 태어나지 않았다면 자기 자신에게 좋을 뻔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집권하는 동안 13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국민을 학살했습니다. 킬링필드라고 불립니다. 폴 포트는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학살을 시행합니다. 인류 역사의 비극입니다.

 

므낫세는 자그마치 55년 동안 통치를 합니다. 남,북 왕조 통틀어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왕입니다. 오래 통치한 것 때문에 나라가 더 망가집니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왕과는 달리 친앗수르 정책을 폅니다. 남쪽 네게브 지역을 개간해 농지를 확장하고, 앗수르의 비호 아래 주변국들과 무역량을 증대시켜 경제적 안정을 추구합니다. 이는 장기간 통치의 기반이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을 걸까? 므낫세 왕을 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15년 더 생명연장을 받지 못했다면 므낫세 왕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므낫세가 55년간 장기 통치를 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더라면 남유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래 사는 일은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를 묻게 만드는 인생을 사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 오래 사는 것은 슬픈 질문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므낫세처럼 말이죠.

 

므낫세 이야기는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잘 살아야 겠구나, 다짐하게 됩니다. ‘오래 사는 게 좋은 걸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오는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에서, ‘오래오래 함께 해 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인생을 보람차고 의미있고 복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