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3.12.2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2
  2. 2013.12.19 약속이니까 아프다
  3. 2013.12.16 길이 참으라
  4. 2013.12.09 왜 회개해야 하는가? 1
  5. 2013.12.05 엘샤다이 3
  6. 2013.12.02 깨어 있으라 2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2. 23:36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이사야 7:1-16)

 

아하스는 남유다 요담 왕의 아들이고 히스기야의 아버지였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서 20장에 걸쳐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는데, 아하스의 아버지 요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요담이 그의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왕하 15:34). 그리고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유명한 이스라엘의 왕 중 한 명으로서, 그의 기사가 무려 4장에 걸쳐 나옵니다. 그는 많은 치적을 쌓았고, 평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하스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왕하 17:2).

 

아하스가 통지하던 시대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고, 남유다 왕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국력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을 치기 위해서 이웃 나라인 아람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 사실에 아하스는 기겁을 합니다. 가뜩이나 국력도 약한데, 두 나라가 협공을 해오니, 이제 꼼짝 없이 나라가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전쟁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왕과 백성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이죠.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아하스 왕과 남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7:2b).

 

인간의 심령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물론 왕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저 깊은 심령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아하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7:4).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했을 때 두려워 떨고 낙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십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어 남유다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인 르신과 베가의 앞날도 예언해주십니다. 그들이 곧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전해 듣고도 아하스 왕이 잘 믿지를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7:9b).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이 믿지를 않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확신을 더해주는 가시적인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7:11). 사시시대 때 기드온은 자신의 부르심이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두 번이나 징표를 구합니다. 그 중 유명한 것이 양털 한 뭉치 징표입니다.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만 이슬이 떨어지고 주변 땅은 마른 것을 통하여, 하루는 양털 한 뭉치에는 이슬이 떨어지지 않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통하여,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징표를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에 아하스는 다음과 같이 응답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17:12). 징표 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에 비해 아하스의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그러한 행동은 좋은 뜻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아하스가 징조를 구하지 않는 것은 겸손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교한 자를 내치긴 하시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는 보듬어 안으십니다. 아하스는 배교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징조조차 구하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아하스에게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b).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징조를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을 물리쳐 주실 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대가로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왕에게 갔다 바칩니다(왕하 16:8).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큰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다 드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성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즉 하나님의 것을 가져다가 이방 나라 왕에게 갔다 바치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무심코 이렇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올려져야 할 영광과 예물이 엉뚱한 곳으로 드려지는 것이죠.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겁니다. 연약한 믿음을 그대로 놓아두면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4:14-15).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징조를 통하여 아하스 왕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라!”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큼 우리에게 힘이 되는 것, 좋은 것이 없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숨을 거두시면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리더십을 이어받았던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으로의 입성, 즉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금방 눈에 확 보이듯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구절이 오늘 말씀 15절과 16절입니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아이가 자라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것처럼,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명을 입고 태어나긴 했어도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분별력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새생명을 입고 다시 태어나긴 했어도 믿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지 못하면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미숙아가 되는 것처럼,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엉뚱한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영적 성장, 분별력, 이런 말들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도 계실 겁니다. 영적 성장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건이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아람이 오늘 말씀에서는 북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남유다를 침공하지만, 원래부터 아람이 북이스라엘과 이렇게 사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치 세계에서는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시절,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의 국력은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의 침공에 꼼짝 없이 당했습니다. 아람은 사마리아성을 포위했고, 북이스라엘은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합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b).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꽁꽁 포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게하시에게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 드려 사환 게하시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영안이 열린 게하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영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던 엘리야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게하시는 사마리아성을 지키고 있는 천군천사를 보았습니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징표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이신, 오늘 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징표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증거를 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하스처럼 믿음 없이 행동하면, 참 안타까운 겁니다.

 

여러분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십니까?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내십시오. 우리 서로 위로하고 축복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힘을 냅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9. 03:16

약속이니까 아프다

창세기 14

(창세기 179-14, 23-27절)

 

할례는 대표적인 율법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외적인 표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 때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배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

 

여러분은 이 말씀이 무섭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백성 중에 끊어지리라는 말씀이 무섭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별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창조신앙이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리고 그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인식하게 해 주는 중요한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또한 창조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시도록 놓아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인 되신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자유케 합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너무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누군가에 기대지 않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연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다른 인간에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일은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나의 버팀목인 자연, 인간,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자연을 착취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하나님을 착취하면 결국 기댈 곳이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 기대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 양무리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탕자의 비유는 매우 결정적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분깃을 챙겨 먼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탕자)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 집 울타리를 벗어난 것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것 같고, 자기의 분깃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 같았지만, 결국 둘째 아들의 신세는 돼지와 한솥밥을 먹는 돼지 같이 천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은 삽겹살이 금겹살이지만, 그 당시 돼지는, 특별히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천한 동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율법에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했겠습니까.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겁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무서운 말씀인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너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언약을 지켜야 한다”(9).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너는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하는 책임을 드러내십니다. 언약과 관련해서 아브라함이 이행해야 할 명령은 이것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 이것은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책임입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에서든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언약은 깨지는 것이죠.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것입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은혜의 강조로 인해 책임이 희석된 개신교 신앙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책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사상 중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바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외쳐진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라는 겁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호는 자칫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밥숟갈 떠서 입으로 넣어주신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에베소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은혜와 믿음의 합작품입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은 인간 편에서 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믿음이 소용 없고, 은혜가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소용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는 인간 편에서 이행해야 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음의 행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할례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믿음은 단순히 마음의 행위가 아니라, 행동을 동반한 총체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아픔을 동반하는 책임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뒤, 자기 쪽에서 이행해야 하는 명령인 할례를 곧바로 시행합니다. 할례는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지금이야 마취의학이 발달해서 할례를 행할 때 아픔이 없지만,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살갗을 조금만 베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포피를 베어내는 일은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팠으면 할례를 받은 며칠 동안 남자들은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훗날 할례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동생 디나를 욕보인 세겜 사람들을 도륙한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의 유명한 일화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시행한 나이가 99세입니다. 하갈에게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3세였습니다.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는 것은 은혜로운 처사입니다. 아이는 고통을 잘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베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그리고 아브라함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약속입니다. ‘언약이라고도 하고, ‘계약이라고도 합니다. 구원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피조물) 간의 약속에서 일어나는 은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그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 하나님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믿는다는 의미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우리들의 믿음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깨달아지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 이유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는지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책임적으로 할례를 행한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믿음은 아픈 겁니다. 믿음은 마음에 받는 할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픔이 이 마음에 새겨지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음이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 아픈 마음,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믿음의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낌 없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갈대처럼 가벼운 마음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영혼(존재)의 울림입니다. 약속이니까 아픈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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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6. 04:53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대림절은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무엇이든 재깍재깍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시대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덕목이 바로 기다림(인내)입니다. 이런 시대에 기다림을 인생의 가장 큰 틀로 설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학생은 성적표, 또는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젊은 숙녀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젊은 청년은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결혼한 부부는 자식의 탄생을 기다리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기다리고,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그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만), 부모는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립니다.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늦은 귀가>입니다. 제가 소시 적에 쓴 시입니다.

 

조심해서 다녀!

일찍 들어와!

 

매일 아침,

조심일찍을 강조하시는 어머니

 

나의 늦은 귀가에 어머니는

니가 늦게 들어오니까

간이 오그라 들었다 늘어났다 하잖아라고 꾸짖으신다

정말 그걸 느끼셨단다

  

조심일찍

어머니의 사랑의 열매

 

나는 오늘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고

어머니가 토해낸 그 열매의 씨앗을

어머니의 肝에 심어 놓았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기다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합니다. 성경이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하고 있다는 뜻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다림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5:7a).

 

야보고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원망(grumble)은 불평, 불만, 푸념 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원망(grumble)’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원망하면 주님께 심판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원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기쁨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은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억제하겠지만, 무엇이든지 억지로 강제로 하면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힘든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 문턱 드나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믿고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1. 주께서 강림하신다. 2.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원망하지 않는 삶이 그것입니다.

 

주께서 강림은 하시는데 심판주가 아니시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심판주이시긴 한데 강림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심판주가 아니시거나 강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의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한다는 뜻은 우리가 죄를 정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만큼 교만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법정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죄를 정하는 일은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판사를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죄다 아니다결정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판사를 무시한 죄로 법원경찰에게 끌려 나갑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우리가 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인생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배웁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 욥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그에게 닥친 괴로움, 자식이 죽고 재산을 잃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일들을 보면 주님께서는 무자비하시고 괴팍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러한 괴로움을 당한 이유는 그의 삶이 불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서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욥의 삶은 의로웠고,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 결말을 보게끔 해 준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면, 욥의 삶은 불의한 삶으로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인식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욥은 기다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회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당합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당한 일은 잘 기억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가해자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살면서 부당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정의를 세우려고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그 부당한 일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내가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살펴 보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내가 저지른 부당한 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불평, 불만, 푸념을 늘어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인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도덕적으로 그것이 안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주이신 우리 주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인내)은 주님의 강림에 대한 기다림이요, 그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길이 참으십시오. 억지로 고통 가운데 참지 마시고, 기쁨으로 참으십시오. 주께서 곧 강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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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9. 00:37

왜 회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3:1-12)

 

요한만큼 사명이 확실한 나실인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만남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사갸랴의 집에 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 만남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1:41).

 

요한과 예수님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있던 요한은 이제 겨우 잉태된 예수님을 만나자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다. 시작부터,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요한을 준비하셨던 것이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나실인으로 태어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요한의 소개를 직접 들어 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요한은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기로 예언된 자이고, 그를 일컬어 주님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가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천국만 갈 수 있다면, 그것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처든 공자든 알라든, 또는 돈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무엇으로든 천국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요한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한 인물에 집중시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행색에 대해서 나오는데, 가히 기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 뭔가에 집중한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삶은 너저분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이토록 심플합니다. 받은 사명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면서 살았던 요한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7-10).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요한이 외치고 있는 이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만약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외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는 분이 있으시거나 돌을 들고 저한테 던지려고 흥분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이 말이 그렇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불편한 말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니리”(4:5). 복음서는 요한을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엘리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엘리야처럼 유대 광야에서전파합니다. 우리가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듯이, 엘리야가 아합 왕조를 향해 불 같은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야는 곧바로 아합 왕의 아내, 왕비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지금 요한의 선포가 엘리야의 선포와 다르지 않고, 요한 또한 목숨을 내 놓고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요한의 외침이 한 사람에게 모아진다는 겁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요한의 행동이 참으로 특이한 겁니다. 요한은 요단 강에서 물로 세계를 베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2).

 

우리는 물로 몸을 씻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회개란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물로 깨끗하게 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는 불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불도 물처럼 깨끗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물보다 위험합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입니다. 오고 있는 천국에 대한 준비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 천국을 맞을 준비를 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물의 개념이었습니다. 요한에게서 천국은 내 뒤에 오시는 이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라고만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가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임한 천국인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습니다.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의 회개와 당장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어떠한 보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천국 가는 것을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예수를 잘 믿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을 보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예수님과 거래를 할 뿐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잘 보일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를 꼭 천국 보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중요한 것이지,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요한이 소개하는 천국, 천국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 회개한다는 것은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틀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의 삶 자체를 그리스도에게로 트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친구를 심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귐을 갖는다면, 친구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친구 사이는 정죄하는 사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사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물이 아니라 불로 하시는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방향을 틀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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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5. 06:41

엘샤다이

창세기 13

(창세기 17:1-14)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인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이민자로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언어의 문제입니다. 영어가 한국말처럼 편하지 않다 보니 당하는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단순한 소통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미국 땅에서의 존재 자체가 여러 가지로 힘듭니다. 그 이유는 영어가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주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달라집니다. 만약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면 지금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겠죠.

 

영어니 한국어니, 이러한 언어뿐만이 아니라, 언어에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쓰는 언어가 있고, 부모자식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친구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비즈니스 사장과 고객 간에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발음과 발성은 같지만 언어를 통한 관계나 친밀감은 너무도 다릅니다. 또한 법조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의료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정치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언론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경제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종교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어느 분야 등 그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그 분야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그 분야에서 소통되는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합니다.

 

이렇듯, 교회에는 교회만의 독특한 언어가 존재합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뜻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 언어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계는 매우 독특한 세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울고 웃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존재가 만들어가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세 존재는 매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상, 우리 자신(인간)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자연,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매우 필수적입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하여, 과학은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세 가지 분야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면 자연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자연에 대해서 말하려면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개념인 삼위일체의 개념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 특별히 우리처럼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이는 것처럼 배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의 언어, 예수 그리스도와 소통하기 위하여 배워야 하는 언어는 바로 엘샤다이입니다. 이 언어를 배운다면,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잘 될 것입니다.

 

도대체 전능한(Almighty)’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죠. 일반적으로 전능한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형상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가 떠오르면서 수퍼맨같은 형상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인간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면, 전능한 존재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이고, 자연법칙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수퍼맨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죠. 수퍼맨은 연약한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 자연계에서 말하는 중력의 법칙 같은 거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퍼맨과 같은 존재일까요? 만약 수퍼맨과 같은 존재가 이 땅에 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 숭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러한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100세 노인에게 자손을 약속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연법칙에 의하면, 100세 노인은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 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 노인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자에게는 폐경기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난자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노인들에게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아브라함과 사라와 언약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오해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상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법칙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습니다. 땅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해 알아낸 자연법칙들이 즐비합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아닙니다. 자신의 만든 법칙을 어겨가며,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인간과 자연)을 골탕 먹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리 말했다, 저리 말했다, 요리조리 자기가 유리한대로 말을 바꾸시는 사기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하신 말과 법칙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를 틀림없이 징벌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판이라는 말이 무서운 것이고,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후반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라는 뜻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례를 똑바로 알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살이 탑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니 뜨거운 불을 가까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뜨거운 불에 손을 댄 자의 살을 태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기 때문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높은 곳을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린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 자를 죽이실 것입니다. 운전할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운행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대신 운전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 놓고 신호등을 어겨가며 과속하는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교통사고 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식사를 불규칙하게 하고, 잠을 충분히 안 자고, 정기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해주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거나 막 먹고, 잠도 충분히 안 자고, 꼼지락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필코 건강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좀 되시는지요? 이것은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을 깨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이 정하신 법칙은 꼭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언뜻 보기에 자연법칙이 깨지는 것 같은 역사를 행하실 때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를 행하실 때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당신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만드시는 거라는 겁니다. 기존에 하나님 당신께서 이미 정하신 법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창조 활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은 창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므로 창조를 거스르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창조의 사건을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발견합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건은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계의 혼란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뜻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할례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언약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시고, 야곱을 주시고, 그 후 열 두 명의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인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새로운 피조물,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의 새창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뜻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체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거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자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지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배운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셨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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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 11:02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4:36-44)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달력을 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교회력을 삽니다. 세상 달력은 12월을 맞았지만, 교회달력은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Advent)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절기입니다.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정신 차리게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릴 대()와 임할 임()으로 구성된 말로,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어로 표현되는 Advent의 뜻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Advent의 기본적인 뜻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있는 하나님의 개입(역사)’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2천 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가운데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때에 이루십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고, 생각지 못한 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은총 받은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42).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2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은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일컬어 언약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 자체의 뜻이 언약입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것이 옛언약’, ‘새언약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매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분인데, 그분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약속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 “삐삐(호출기)”가 등장합니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전자기기인데, 그 당시 삐삐(호출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누군가 호출하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호출한 사람과 연락을 취하는 형태의 전자기기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공중전화가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는데, 삐삐를 차고 다니다 호출이 들어오면 공중전화에 줄을 서 연락을 취하곤 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출기를 지니고 다녔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통화하면 뒷사람들의 원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통화를 길게 하는 앞사람과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 간에 시비가 붙어 칼부림까지 나서 사람이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발전된 전자기기가 핸드폰입니다. 핸드폰의 보급으로 삐삐와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그만큼 인간사회가 편리해지긴 했지만, 인간은 더욱더 조급한 존재가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터넷을 보급을 통해 우편물 또한 감소했습니다. 옛날에는 손으로 손수 쓴 편지를 상대방에게 부치고,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설렘은 없습니다.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이메일로 전하거나, 간단한 것은 핸드폰의 메시지 기능 또는 카톡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늦게 오면 짜증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 시대는 기다림의 미덕이 없어지고, 온통 짜증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대림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뜻즉시알기 위하여 신접한 사람인 무당을 찾아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을 쥐 잡듯이 뒤지거나 게임 하듯이 펼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조급한 욕망을 채우려는 종교적 열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의 끝은 그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 즉 부활생명이 시간의 끝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대림절은 이것을 더욱 붙드는 절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의 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땅에서 일어난 부활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이들을 당신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시간의 끝,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살지 않습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이유는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간 이도령이 꼭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춘향이에게 이러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춘향이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변사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춘향이는 목적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꼭 돌아올 이도령을 맞이할 몸과 마음을 유지했던 것이죠.

 

목적의식을 대림절의 용어로 바꾸면, ‘희망라고 합니다. 춘향이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좀 더 넓은 개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희망은 ‘Advent’입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은혜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지만,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절망의 순간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이 번쩍 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듭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구원 받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외 모든 사람은 갑작스럽게 임한 홍수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정황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이것은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를 겁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꼭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꼭 다시 오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즉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실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 없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분의 얼굴을 기쁜 낯으로 바라 볼 수 있게끔 성결하게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사시는 동안 너무 걱정 근심 가운데 살지 마십시오. 희망 가운데 용서하고 내려놓고, 화평 가운데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