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4

2010 12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10-18

제목: 인간의 굴레와 그리스도의 구원

 

어느덧 2010년도가 다 지나고 마지막 주일을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선한 싸움을 함께 싸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한 해를 이렇게 보낼 때마다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많이 느낍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은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고,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한 해가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니까, 즐거워야 할 성탄절기가 각종 사고로 얼룩이 졌다고 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성탄절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네 개의 촛불을 켰습니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의 촛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 예배를 드리면서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그 촛불을 켜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것들,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을 가져다 주셨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그런 소식이 아니라, 각종 사건 사고 소식과 더불어 여전히 희망 없고, 평화 없고, 기쁨 없고, 사랑이 없는 아프고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크리스마스 자체가 그렇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왠지 마음이 기쁜 것 같고, 분위기를 살려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추리도 하고 선물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해서 가족들과 또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마음이 이전보다 더 허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탄절을 복음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복음을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받은 사람들은 그 기쁨이 날로 자라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받은 사람에게는 그 기쁨이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심리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크리스마스를 심리적으로 이용합니다. 우리는 거기에 쉽게 휘둘립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깨어 있던 선지자들도 성경에서 이 점을 계속해서 지적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든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합니다. 아닌 것을 자꾸 심리적으로 그렇게 믿으라고 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 선지자와 대립했던 하나냐 선지자는 철저하게 남유다 백성의 심리를 이용해서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절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거라는 말씀을 전했는데 비해,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손에서 저들을 구원해 줄거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냐의 예언이 더 좋아 보입니다. 누가 항복하고 정복당하는 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달랐습니다. 외롭게 힘겨운 싸움을 했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토록 연약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도 쉽게 병들고, 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는 모두 그렇게 연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심리적 장치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서 기분에 따라 살아갑니다. 요즘 우리가 맞는 성탄절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성탄절을 보내고, 이제 2010년도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여러분과 심리적인 복음이 아닌, 심리적인 신앙이 아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 복음, 참 신앙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의 핵심 개념인 성육신대속적 고난에 대해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이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셔야만 했는가?”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그냥 한 말씀만 하시면 되지, 뭐 하러 번거롭게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사실을 전하면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간의 실존을 이야기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의 실존은 혈과 육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많은 한계에 부딪히면서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혈과 육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고통 가운데 신음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씌워진 굴레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굴레가 인간의 궁극적인 약점이고,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존재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가 됩니다.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합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러한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 대왕을 통해서 마귀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죽음으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요셉에게 피신하라고 알려주었고,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의 삶은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질병과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시고 어루만져 주셔서 그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끊임 없이 예수님과 대립했습니다. 제자들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제사장들과 빌라도와 헤롯까지 한 통속이 되도록 공작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무리를 돌아서게 하고, 유다를 꾀여 음모를 꾸미게 해서 예수님을 결국 죽음에 몰아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귀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죽음의 권세로 결국 예수도 죽게 만들었다는 승리의 미소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군중들도 모두 그렇게 그냥 끝나는 줄 알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잃고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 있는 것처럼,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마귀를 멸하시는 방법이, 바로 그 죽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통쾌한 역설이고, 기막힌 역전입니다. 죽음과 죽음의 폭군을 이긴 방법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되어 성육신 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혈과 육에 속한 인간이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으셔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을 취하시고 잠시 천사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혈과 육의 한계에 묶여 있는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을 체험하신 분이기 때문에 혈과 육의 한계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우리를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One of us, 되신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를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하고 소망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은 이 복음이지, 세상이 조작하는 심리적인 장치들이 아닙니다. 네온 사인이, 크리스마스 캐롤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들이, 분주하고 활기찬 쇼핑몰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에 속한우리 인간들처럼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처럼 인간의 굴레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그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이 복음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끝났는데도,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질병과 고통과 죽음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뉴스를 통해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삽니다. 뉴스를 통하지 않더라도, 예수를 믿고 있는데도,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내 삶에 여전히 질병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 심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게 뭐야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잖아라면서 투덜거리지만, 복음을 인격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서 받아들인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내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질병과 맞서 싸웁니다. 이런 사람은 고통 가운데 기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합니다. 내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 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따라 신앙생활을 합니다. , 인간의 굴레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봅니다. 이게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따라가면 이게 보입니다. 이게 보이시는 분은 복음을 잘 따라가고 계신 중이고, 이게 안 보이는 분은 좀 더 분발하셔야 합니다.

 

성탄절기를 보내면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굴레에 매여 질병과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면서 살고 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이, 성육신과 대속적 고난의 복음이 우리들의 희망이요, 평화, 기쁨이요, 사랑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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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28. 08:42

2010 12 1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7:10-16, 마태복음 1:18-25

제목: 사랑하면 들린다

 

아하스 왕을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유약하다고 해야 할까요? 무지하다고 해야 할까요? 믿음이 없다고 설명해야 할까요? 아무튼,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대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하스 왕은 지금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아람 왕 르신하고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연합해서 자기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당시 남유다 왕국은 세력이 매우 약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예를 들면, 북한하고 중국하고 손잡고 한국을 치러 오는 형국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아하스 왕은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그의 마음을 7 2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오늘 말씀은 이렇게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나라가 망할까봐, 벌벌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굉장히 흥미로운 말로 표현을 합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이죠?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쓰인 말씀입니다. 14절입니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에서의 핵심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징표를 말하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에서 아하스 왕은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었어야 합니다. 임마누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시는 말씀이, 이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기도 이전에, 아하스 왕과 남유다 왕국을 괴롭히던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람은 주전 732년에 앗수르에게 병합되었고, 북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졌는데, 아하스 왕은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고 신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한 일이 앗수르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습니다. 안방에 적을 들여 놓은 일을 한 것이지요. 앗수르의 도움을 받아 지금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앗수르는 결국 가장 큰 적이 될 나라지 아군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역대하 28장의 말씀을 보면, 앗수르는 도와주러 와서는 남유다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남유다를 침략해서 약탈해 갑니다.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인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에게 같은 말씀이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법은 약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약혼이 곧 결혼은 아니지만 약혼한 사이는 결혼한 사이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이때부터는 서로에게 구속력을 가집니다. 만약 약혼 한 시기에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사이인데, 그만 마리아가 합방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한 겁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지금이야 혼전 임신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들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아무런 해가 끼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조용히, 아무도 눈치 못 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19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때 의롭다는 의미는 율법을 잘 지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의로움과 명성에도 손상이 안 가고, 마리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서 요셉에게 말합니다. 20절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그리고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내려졌던 말씀이 요셉에게도 내려집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 왕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오히려 마음이 강팍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리고 왔다고 오늘 말씀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고, 요셉과는 달리 살아 있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눈 앞에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보이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전해진 말씀은 현실이 아니라 꿈 속에서,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씀 중 어떤 말씀이 더 확실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더 신뢰하십니까?

 

물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꿈을 통해서 전해진 말씀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똑 같은 말씀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진 말씀이 더 확실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이니까요! 꿈 보다는 현실이 더 확실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꿈을 오히려 더 확실하게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긴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꿈을 통해서 뭔가 봤다, 들었다 하는 것 자체를 무슨 신통력을 지니고,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여기는데, 매우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직접 듣고, 요셉은 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습니다. 둘 중에서 더 확실한 방법으로 전해진 것은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누가 더 잘 들어야 할 상황입니까? 아하스 왕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요셉은 그것이 꿈으로 전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마음만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들음과 행동은 곧바로 연결 되는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듣고 행동하게 됩니다.

 

손쉬운 예로, 자식과 남편이 하는 말 중에 누구의 말을 더 잘 듣게 됩니까? 자식이 엄마, 이리로 와 보세요! 엄마, 이거 해주세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자식의 말에는 능력이 있는지, 그래..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부르거나 뭐 해달라 그러면, “왜 자꾸 불러싸요! 왜 자꾸 사람 귀찮게 해요!”하면서 핀잔을 줍니다. 이미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똑 같은 말씀이 주어졌는데, 아하스 왕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분부대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아하스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는지는 아하스 왕의 행적을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평소에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19절에서 그리고 있듯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의 다른 말입니다.

 

요즘에 한국에서 식사와 관련해서 이런 농담이 유행한답니다. 하루에 한 끼도 집에서 안 먹는 남편을 일컬어 영식이 양반이라고 부르고, 하루에 한 끼만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일식이 분, 그리고 하루에 두 끼를 집에서 먹는 남편을 일컬어 두식이 놈, 그리고 하루에 세 끼를 집에서 챙겨 먹는 남편을 일컬어 삼식이 새끼라고 한답니다. 그러면 하루에 세 끼와 간식까지 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아십니까? 삼식이 간나 새끼라고 한답니다.

 

사랑이 식으면, 밥 차려 달라는 말도 듣기 싫어집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서, 가족들 간의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또는 부인이 하는 말이, 또는 자식이 하는 말이 들리십니까? 그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까?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만큼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끼리도 때로는 말이 안 통한다, 하면서 서로를 헐 뜯고 미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부족하니까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마시고, 상대방을 사랑하려고 하십시오. 사랑하지도 않는데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이해해 보려고 하니까 그게 잘 안 되고 힘들고 그런 겁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말이 귀에 들리고,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저절로.

 

우리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만큼 듣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고 싶어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는 겁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 있는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내 마음에 합한 것만,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임신한 여인을 데려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입장에서 이 일을 묘사합니다. 거기에서도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위기요 위험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자는 잠시 위험에 처해질 수 있으나, 결국 위대한 신앙의 선조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는 잠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으나 결국 멸망 당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면 들립니다. 사랑하는 만큼 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저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징표요 말씀입니다.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전해졌던 말씀과 천사를 통해서 꿈에서 요셉에게 전해졌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사모하십시오. 그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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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인생은 생로병사입니다. 삶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겁니다. 삶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 대한 묵상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 문명은 이것을 부정합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을 모른 채 합니다. 그것들을 삶과 분리시켜 놓는데 혈안입니다. 웰빙(Well-Being)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늙은이와 병든이 그리고 죽은이가 한 구역 안에 또는 한 집안에 함께 살았습니다. 요즘처럼 요양시설과 의료시설이 없어서 그런 면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차원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에서 생로병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삶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잠언 31:16)이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가 복이었고 백발의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발의 노인은 존경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늙음이란 부끄러운 일처럼 여겨집니다. 늙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늙은이를 짐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늙어야 합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병든이는 병원으로 또는 요양시설로 옮겨집니다. 물론 분주한 사회구조 속에서 병든이를 돌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병든이를 돌보는 일이 남의 일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병원은 치료의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대의 병원은 병을 우리의 일상에서 분리시키는 역할도 합니다. 병듦과 분리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병듦에 서툽니다. 병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서툴고 병을 다루는 방법에도 서툴고, 특별히 병든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에 서툽니다. 병든이를 위한 위로의 말이 겉돌 뿐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염도하고 매장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알고 삶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죽음은 전문가가 대신 처리해 줍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물 몇 방울만 찔끔 흘리기만 해도 어느새 내 앞에서 죽음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집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로병사에서 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나머지 세 가지, ‘로병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은 반쪽 짜리 삶도 못 되는 사분의 일 쪽 짜리(Quarter Life) 삶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빈곤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대인의 빈곤한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사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늙는 것, 병드는 것, 그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기쁨을 충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은 늙고 병들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생로병사를 철저하게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 마십시오. 그 앞에서 비굴해지지 말고 당당 하십시오. 이 세상의 생로병사를 잠깐 지나 우리는 곧 영원한 생명, 부활의 삶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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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14. 14:27

2010 12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야고보서 5:7-10

제목: 기쁨은 인내의 열매다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차 뒷자석에 앉아서 몸을 비비 꼬며 하는 말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 보려고 노래도 듣고, 책도 읽고, DVD 시청도 해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달리는 차 안에서 점점 몸을 지쳐가고 더 이상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입에서는 “Are we there yet? 아직 멀었어요?”라는 투덜거림이 튀어나옵니다. 인내를 가지고 조금만 더 참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루함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너무 지루하다 보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지루해 보인다는 생각뿐입니다. “.. 지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기다림일까요?

 

이 동요를 기억하시죠?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서울에 왜 갔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빠는 서울을 가면서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겠노라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서울 간 오빠는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도 없고 소식도 없습니다. 오빠를 기다리는 이 소녀의 심정은 어떨까요?

 

이와 비슷하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그린 소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춘향전입니다.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어서 서로 정인이 된 두 사람, 성춘향과 이몽룡. 두 사람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이몽룡은 과거시험을 치르러 한양(서울)에 갑니다. 이도령을 떠나보낸 성춘향! 이도령이 과거급제 해서 다시 돌아와 자신과 혼인할 거라는 걸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도령을 기다리는 성춘향은 마을에 새로 부임한 변 사또에 의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성춘향은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서까지 저항하고 투옥까지 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성춘향은 굳게 믿었습니다. 이도령이 돌아올 거라고. 그러나 성춘향의 마음 속에는 점점 한이 서려갔습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수모를 언제까지 참아야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위의 동요에서 등장하는 오빠를 기다리는 여동생도, 성춘향도 누군가를 인내 가운데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속에는 한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내, 우리의 기다림은 이런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입니다. 인내하라, 기다리라 합니다. 표면 상으로는 “Are we there yet?”의 기다림과 뜸북새 그리고 성춘향의 기다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릴 때 지루해서 온 몸을 빌빌 꼬면서, 그리고 이 마음에 한을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인내,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모티브는 농사일입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농부가 열매를 바라고 그리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가나안 땅에서의 농사 문화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굉장히 척박한 땅입니다. 땅이 척박하다는 것은 물 구경하기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아무리 비옥해 보이는 땅도 물이 없으면 쓸모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는 대개 강물이 흐르는 곳을 중심으로 발달했습니다.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짓기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요단강이 흐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의 지형입니다. 요단강은 해발 -200미터 정도 지역을 흐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계곡을 흐르는 물입니다.

 

요즘에야 한일 자동펌프같은 것을 이용해서 물을 끌어다 쓰면 되지만, 고대 사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 200미터 밑에서 흐르는 물을 퍼다가 농사짓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농사 지을 때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물의 원천은 빗물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 땅에는 비가 잘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타이밍입니다. 비가 제때 와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내리는 비, 그곳도 농사가 잘 되기 위해서 제때 와주어야 하는 비, 그 비가 바로 이른 비와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는 11-3월은 비가 오고, 5-9월은 비가 오지 않습니다. 10,11월에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고, 3,4월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를 합니다. 파종과 수확에 있어서 이 비는 생명과도 같은 비입니다.

 

비가 내리느냐 안 내리는냐에 따라서 농사의 결과가 달라졌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제때 잘 와줘야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는 생명줄과도 같았고 비를 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었으니, “이른 비와 늦은 비신앙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농부는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자라나 맺게 될 열매를 상상합니다. 이미 농부는 그 씨앗의 열매를 보면서 씨앗을 뿌립니다.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입니까? 그 비가 안 오면,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비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씨앗에서 이미 열매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지만 그 마음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실 거라는 확신입니다. 비를 내려 주셔서 씨를 뿌리면서 보았던 열매를 거두게 하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야보고서 기자는 지금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기다림이 어떠한 기다림인지 분명하게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쓰이고 있는 인내, 기다림에 대한 용어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한 용어입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 단어를 쓸 때 어떠한 뜻으로 썼는지 원어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헬라어 원어를 인내, 기다림 정도로 번역하고 있지만, 영어에서 이 단어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해줄 단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Spirited”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에너지가 가득한 상태, 결의, 결심, 또는 용기가 가득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Are we there yet?”이나 뜸북새, 춘향전에서 살펴보았던 인내, 기다림과는 성격이 다른 인내,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의 인내, 기다림은 지루함이 가득한, 한이 서린 그러한 인내고 기다림이었지만, 야고보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인내, 기다리는 그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너지가 넘치고, 결의, 용기가 가득한 인내, 기다림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어 단어에서는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로 “Generosity, Magnanimity”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관대함, 기꺼움정도로 번역하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은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그 씨앗 속에 있는 열매는 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나, 현재의 관점에서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과거나 현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곳에 임했습니다.

 

이게 보이십니까? 이게 보여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씨앗에서 열매를 보지 못한다면 그 수고가 헛되고 고단하게 됩니다. 지루하고, 불안하게 됩니다. 열매가 맺어질 지 알 수도 없는 씨앗을 무슨 이유로 뿌립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뿌리는 정도 밖에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농부의 씨앗입니다. 열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종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입니다.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서 열매를 이미 보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인내, 기다림이 어찌 에너지가 넘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어찌, 기꺼운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기 백배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대림절 기쁨의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쁘십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생의 복들을 누리고 계셔서 기쁘십니까?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 주시는 소중한 기쁨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거는 인내, 기다림에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인내이고 기다림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대한 인내,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기쁨은 인내의 열매입니다. 기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오는 필연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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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0. 12. 9. 23:52

나는 여기서 2천 년을 살았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는 말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았다, 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들이 신기해 하는 것은

내가 단순히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기 때문이라는 것도 나는 안다.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썩은 음식을 먹어도 괜찮나, 생각 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왜 썩은 음식을 먹는지.

기껏 생각해봤자,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는

돈이 없어서, 그야말로 거지여서 쓰레기통을 뒤져

썩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2천 년을 로마에서 살아온 나에게

가장 정다운 냄새는 바로 썩은내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도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썩은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면서

신기한 듯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지 않는가?

당신 손에 들려 있는 빵조각을 더 힘차게 움켜쥐면서.


* 떼르미니 역은 이탈리아 로마의 중앙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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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0. 12. 9. 23:29

2010 12 5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마태복음 3:1-12

제목: 기본으로 돌아가라 하나님 나라가 정의다

 

영국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려서 엄마에게 버려진 형제가 있었습니다. 한 명은 입양을 갔는데, 한 명을 그렇지 못해서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는 평생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40년이 넘도록 이 사람은 엄마를 찾았습니다. 나이가 50세가 넘어서 비로소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엄마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지독한 당뇨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리면서 찾았던 엄마 앞에 자신이 갑자기 나타나면 엄마가 충격을 받을 지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 앞에 나타나는 것을 잠시 접어두고 엄마가 병원에 가서 병 치료를 먼저 받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병원에서 치료 받던 중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은 40년이 넘게 찾다 겨우 찾아낸 엄마를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만날 걸, 후회했습니다. 죽은 엄마 유품에서는 아들들을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유서들이 나왔습니다. 엄마도 힘든 인생을 살았고, 아들도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둘은 만나지 못하고 영영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미혼모가 두 아들을 키우다가,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다며 이제 겨우 3살과 1살 먹은 아이들을 집에 놓아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집을 나갔습니다.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려 주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집에 가서 문을 두들겨도 아무 소리가 없어 경찰은 그냥 되돌아 갔습니다. 열흘이 지난 후, 세 살, 그리고 한 살 먹은 아이들은 엄마를 그리워하면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경찰에서 이 아이들의 엄마는 단순히 아이들을 키우기 귀찮아서 그랬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식을 몇 명 살해한 싱글맘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세 번째 아이가 죽었는데, 이상하게 먼저 죽은 두 아이의 상황과 똑같은 바람에 경찰에 의심을 사 붙잡혔습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이상하게 똑같이 장염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아이들 앞으로 사망 보험이 들어져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고 나서 엄마는 보험금을 탔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명의 아이들을 죽였는데, 그 중에 두 명은 입양한 아이들이고 한 명은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죽일 때 수법이 이랬습니다. 젖병 등 아이들의 입에 들어가는 기구를 소독하지 않았습니다. 소독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병균이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갔고 서서히 아이는 병균에 감염이 되고 결국 장염을 일으켜서 죽었습니다.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죽인 이유가 어이 없습니다. 애들이 딸린 몸으로 어디 취직하기도 힘들고, 돈도 필요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가슴이 아프죠? 여기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평화가 보이십니까? 정의가 보이십니까? 이러한 이야기는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 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셀 수 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 어이 없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는 끊임 없이 우리 인생을 흔드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깨는, 우리 삶에 평화를 깨는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옳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순간, 평화는 깨집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지는, 아니면 생각과는 다르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결국은 허망할 뿐입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공적은 결국 다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아무리 큰 공적을 쌓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우리 삶 속엔 참 평화가 없습니다. 그저 상대적인 평화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 마저 쉽게 쉽게 깨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사실 세상을 향해 외칠 말이 참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쳤고, 공자 같은 분은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을 외쳤고, 수많은 선각자들이 세상을 향해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은 하필이면 그 많은 말들 중에, “회개하라!”를 외쳤을까요? 이는 세례 요한만이 외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향해서 외친 첫 마디가 회개하라!”였습니다.

 

여러분! “회개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잘못한 것을 뉘우쳐라, 정도로 들립니다.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산다고, 교회만 오면 회개, 회개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오늘 교회 오시기 전에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50, 60, 70대의 세 남자가 모여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50대 남자가 먼저 말했습니다. 형님들 나는 오늘 배가 고프길래 집사람한테 밥 좀 차려줘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요. 그랬더니, 60대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집사람이 어디 가길래, “어디가?”라고 물어봤다가 뒤지게 맞았어!. 그랬더니, 70대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들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오늘 아침에 눈 떴다고 집사람한테 뒤지게 맞았어!

 

뭐가 그렇게 잘못입니까? 교회 올 때 스탑 싸인 좀 안 지키고 온 것이 그렇게 잘못입니까? 법규를 잘 지켜야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교회 와서 회개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까지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지켜야 합니다만). 오늘 교회 오기 전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뭐가 그렇게 잘못을 했습니까? 무슨 죄를 그렇게 고백해야 하고, 무엇을 그렇게 회개해야 합니까?

 

이건, , 회개, 이런 것을 말하는 교회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겁니다. 죄나 회개를 위에서 말한 것 정도로 하찮게 생각하니까, , 회개 등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이죠.

 

회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라!”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 개념의 죄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와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더 근원적인 죄를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신학적 개념의 죄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을 일컬어 의인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옳은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우리가 잠깐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할 수 있을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지혜가 없다는 겁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고, 불의의 상태입니다.

 

오늘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칩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두 말은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회개를 이끌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피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통치의 개념이,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말씀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여기서 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에서 요한의 모습을 기이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그가 종말론적 인물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종말이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사람으로서의 요한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묘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한 사람에게로 모아진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하는 뜻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고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퍼붓고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임박한 진노, 즉 하나님의 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처럼, 거부한 자는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 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을 정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는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11, 12절 모두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일상에서 옳지 못함을 끊임 없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평화가 없습니다. 평화는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삶 속에서 절망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다면, 다른 용어로 표현해서, 그를 믿는다면 우리는 옳지 못함 속에서 옳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평화롭지 못한 세계 속에서 평화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어코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 보여도, 이 땅은 정의로 물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곧 정의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의인되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입니다. 이 기본으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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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19세기 중엽, 청나라(중국)는 영국과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발달한 옷감제조기술을 바탕으로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습니다. 영국 상인들은 이에 대해 아편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창출해 보려고 했습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 사이에 아편은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는 아편 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 상인들을 홍콩으로 내쫓았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은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영국이 승리함에 따라 청나라는 영국의 여러 가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습니다. 일명 아편 전쟁입니다.


19
세기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아편은 마약입니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정제 역할을 합니다.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청나라의 하층민들이 아편을 찾았던 이유는 육체적 노동에서 오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마약을 찾는 사람은 현재의 고통에서 탈출하려는 욕구 때문에, 그리고 쾌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약을 합니다. 고통에서 탈출한다는 측면에서 마약은 종교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게 되면 마약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칼 마르크스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감사를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내 삶은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 안에는 여전히 기쁨이 없는데 자꾸 감사하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를 강요합니다. 신앙이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신앙의 형태가 이쯤 되면 신앙이 아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조작된 감사요, 거짓된 감사입니다. 뒤돌아 서면 금방 사라져버릴 감사입니다. 내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고, 내 삶은 여전히 공허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지칩니다. 그러다가도 교회 와서 박수 치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눈물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고 마음이 시원해 지는 것 같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은 또 먹먹해 집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아편 맞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앙생활인지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적 환각생활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억지로 감사를 만들어 내는 종교적 아편에 손대지 마십시오. 정말로 내 삶을 변화시켜 영원한 안식에 거하게 하는 복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신앙은 아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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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파루시아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합니다. 날이 세상의 , 종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새창조의 시간입니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참된 안식의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파루시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오늘로 앞당겨 사는 사람들입니다. 눈물을 훔쳐내고,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을 십자가에 못박고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는 것입니다. 한자로 구속(拘束) 구속(救贖) 매우 차이를 지닙니다. 구속(拘束) 행동이나 의사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을 의미하고, 구속(救贖) 신학적인 용어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옮기면 그리스도가 삶을 구속(拘束)하는 역할 밖에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중심을 옮기면 안에서 구속(救贖) 역사, 자유의 삶이 발생합니다. 신앙은 구속(拘束) 아니라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拘束)하기 위해서 못박히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못박히셨습니다.

사실을 알고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속에서 하나의 율법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나를 구속(拘束)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속(救贖)하는 것입니다.

파루시아를 산다는 것은 바로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으로 들어가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救贖) 은혜를 입은 자는 필연적으로 파루시아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참담해도 희망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시는 것을 보고, 믿음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루시아를 사십시오. 신앙인의 삶은 파루시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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