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1. 5. 3. 23:46

2011 5 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벧전 1:3-9

제목: 산 소망

 

13개월 만에 무대에 섰던 김연아가 2등에 그쳐서 아쉬움을 자아냈습니다. 대중매체는 온통 아쉬웠던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경기를 보도했습니다. 1등을 하나 안 하나 김연아는 대한민국, 그리고 지구촌의 관심거리입니다.

 

같은 날, 어느 매체는 노숙하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를 냈습니다. 몇 년 전 사업에 망하고 과대망상증에 사로 잡혀 사는 아버지와 함께 어린 세 아들은 공중화장실에서 노숙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었는데도 이 아이들은 공중화장실 앞에서 셋이 뛰어 놀았습니다. 몇 년 째 이러고 있는 턱에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데도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보았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는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취재진이 전화통화를 통해서 아이들을 다시 만나고 싶냐?’고 물어봤지만 미안하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했습니다.

 

세상은 이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더 관심을 가질까요? 물론 김연아의 세계선수권대회 참가 소식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노숙하는 아이들은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김연아가 1등을 못하고 2등에 그쳐 시상대에서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연아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노숙하는 아이들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위의 두 기사 중 어느 것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김연아의 기사와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가슴은 찡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노숙하는 아이들의 기사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노숙하는 아이들같은 일, 쉽게 잊혀지는 일, 그리고 관심 밖의 일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고. 과연 그 때 내가 살고 있었다면 나는 서른 세상 먹은 한 청년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성난 군중 틈에 끼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을지 모릅니다. 사실 그랬을 확률이 더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고 내 눈으로 봤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있어도, 내 눈으로 봤어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니까요.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 못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일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는 일은, 우리 육신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도 증거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도 우리처럼 예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왜 사랑했습니까? 바로 예수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더 마음에 와 닿을 겁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너희가 그에게서 돈다발을 받았음이라.”

 

그런데 성경은 아쉽게도(?) 그렇게 증거하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가운데 있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돈다발이 아닌 구원받았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돈다발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은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참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그리스도인이 나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즉 기복신앙을 가지고 교회 나오는 사람과 구원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과 차이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 짧은 이 시간에 다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삶과 같아서 칼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오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을 사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나누어 볼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
우리가 날마다 외는 사도신경에는 이를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일이 예수에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됩니다.

 

아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이 여느 사람과의 죽음과 같지 않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에게서 일어난 부활 사건이 똑같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다 죽은 자들 중에 사흘 만에 부활 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믿음이 성령을 통하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교회를 잘 나온다 안 나온다’, 이것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예수를 믿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우리 삶의 실존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믿는 자에게 그와 똑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믿는 자의 삶 속에 부활이 실증적으로 당장 일어나는 것을 아니지만, 이것을 믿고 사는 자들은 삶 속에서 다른 면에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갑니다.

 

우선 부활의 주님을 믿고 사는 자들은 부활의 주님으로 인하여,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아십니까? 산 소망을 지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 밝혀 놓은 것이 바로 6, 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좀 느껴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십니다.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산 소망입니다. 사는 것처럼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죽은 것처럼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는 것처럼 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살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산 소망을 가지지 못하고, 죽은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지 않고, 죽은 소망에 온 맘과 정성을 쏟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 아무리 제가 이 말씀 드려도 여전히 못 알아들으시는 분은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산 소망입니다. 그 분께서만이 산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십니다. 다른 것은 죽은 소망, 썩어질 소망일 뿐입니다.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져야 합니다.

 

무슨 소망을 품고 사십니까? 예수 믿어서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에 있는 욕심 가득한 헛된 소망을 얻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는 산 소망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져다 주실 겁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산 소망, 구원을 가져다 주십시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5. 1. 01:07
* 아래 작품들은 이번 2011년도 봄 호 <창조문학> 신인문학상 당선작들입니다. 이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시인되었습니다. <창조문학>지에 실은 당선소감으로 감사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당선소감

 

나는 모든 것이 그립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그립고, 나의 살던 고향도 그립고, 친구도 그립고, 아버지도 그립습니다. 무엇보다 나의 존재가 그립습니다. 그리움은 내 시의 모티브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움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에 미련과 한을 남기겠지만, 나의 그리움은 지나간 것에 있지 않고 앞으로 올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늘 희망찹니다. 그래서 나의 그리움은 희망찬 그리움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은 파루시아(종말)의 삶입니다.

 

마음이 환합니다. 그리워하던 당선소식이 내게로 왔기 때문입니다. 봄꽃이 피듯, 내 마음에도 하얀 봄꽃이 핀 기분입니다. 시를 쓰기 시작한지 정확히 20년 되는 해에 세상에 이름 석자를 내놓게 되는군요. 마음 속에서 감사가 팝콘처럼 튀어나옵니다. 먼저, 무디어진 시심(詩心)을 다시 갈고 닦을 수 있게끔 격려해 주신 최선호 목사님과 지인식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 부족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고 윤동주처럼 시인의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 정현종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한국 떠나오고 연락 한 번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삶에 가장 큰 그리움의 샘물인 아버지(고인이 되셨지만…) 그리고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사랑으로 키워주신 덕에 제 마음에서는 사랑의 샘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삶의 봄날, 길벗, 아내 안영숙에게 당선의 기쁨을 수줍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정담
情談

 

오랜만에 친구와 저수지에 올라

개울가에 앉아 情談 나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사는 이야기

깊어만 가는 여름 밤

이야기는 물소리와 함께

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데

문득

새 한 마리 情談 가로채

하늘로 푸드득 날아 오른다

 

별빛이 푸르다



늦은 귀가

 

조심해서 다녀!

일찍 들어와!

 

매일 아침,

“조심”과 “일찍”을 강조하시는 어머니

 

나의 늦은 귀가에 어머니는

“니가 늦게 들어오니까

간이 오그라 들었다 늘어났다 하잖아”라고 꾸짖으신다

정말 그걸 느끼셨단다

 

“조심”과 “일찍”은

어머니의 사랑의 열매

 

나는 오늘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고

어머니가 토해낸 그 열매의 씨앗을

어머니의 심어 놓았다



맑은 호숫가에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물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하늘은 온 몸을 담그고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해질 때까지

 

 

 

비 오는 날의 기억

 

먹구름에게는 힘이 부치는지

하늘이 낮게 주저앉고 말았다

울지 말라고 아무리 달래 보아도

하루 종일

하늘은 눈물만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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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5. 11:52

2011 4 24일 부활 주일 예배

본문: 24:1-12

제목: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지난 금요일, 성금요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 한 구석에는 한원경 성도님께 미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물론 제 잘못은 아닙니다만 목사로서 도의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생전에 좀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에 참여시켜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한원경 성도님께서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드리지 않아도 대부분의 분들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분의 삶을 꼬집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도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고 싶으셨겠습니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힘들게, 고난 가운데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행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암병에 걸리셔서 병석에 누워계실 때 한원경 성도님은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손에 잡힐 듯이 예수님께서 앞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병석에서 환상 중에 본 분이 예수님이라고 확신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본 본인은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한원경 성도님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삶의 복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지난 14일 목요일에 심방 갔을 때 한원경 성도님은 키모를 받고 계셔서 힘들어 하셨지만 그래도 정신도 있으셨고 정옥순 권사님이 끓여다 주신 잣죽하고 물김치를 드시면서 살 것 같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금요일 점심 때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서 코마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하고 전도사님하고 금요일 오후에 병상 세례를 베풀려고 준비해 가지고 갔었는데 그 때는 이미 코마 상태에 들어가서 중환자실로 옮긴 상태였습니다. 그 앞에서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그냥 가시는 한원경 성도님이 가여웠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제 평생 잊지 못할 세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사한 것은 숨이 멎기 전에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세례를 베푼 하루 뒤, 지난 16일에 한원경 성도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 상 곧바로 장례식을 올리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올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장례식을 집례하기 위해 다운타운에 있는 한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저는 또 한번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허름한 장례식장은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초라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유가족의 뜻을 따라 영어로 진행을 하고 30분 이내로 짧게 장례식을 집례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한원경 성도의 죽음을 속 시원하게 애도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미 하나님 곁으로 가신 분의 애석한 이야기를 들춰내서 이 기쁜 부활 주일에 분위기를 망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한원경 성도는 지금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우리보다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그분의 개인적인 삶이 어찌되었든,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 곁에 가신 그분은 우리보다 복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과 너무도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 한원경 성도님의 장례예배 때 오지 않은 분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 실존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죽음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죽음보다 지금 나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살아갑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고작 그 사람과 생전에 깊은 친분이 있었던 가족들, 친지들, 또는 친구들뿐입니다. 이들도 그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데, 유독 이 사람의 죽음에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입니다. 바로 예수의 죽음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한원경 성도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죽음과 우리들의 삶이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렇게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느 한 사람의 죽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한원경 성도님의 죽음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슨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주목하고 거기에 우리의 존재를 기울이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는 한 사람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왜 구원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간단하게 말씀으로 누구누구야 구원 받아라!”라고 하셔서 구원해 주시면 편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베푸시는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에 100% 정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이유를 100% 아십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는 믿음을 통해서 삶의 혁명을 맞이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당하는 것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고난 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끝이 고난이었고 죽음이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끝에 예수님께서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고난 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 우리가 무슨 고난 못 당해서 안달이 난 매조키스트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도 수많은 고난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고난을 당하려고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아도 인생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은 고난에 대한 통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난은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받는 거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허무해 하고 수치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빛 아래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저항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고난 당하는 자는 실패한 자, 어리석은 자, 힘 없는 자, 약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통념을 갖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역사를 일구어냈다는 것은 기쁜 소식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의 제자들은 꽁꽁 숨어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나마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신실한 여인들이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바르려고 예수님이 죽은 다음날 무덤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뿐이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여인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리고 두 천사는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여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전부터 당신의 부활을 예언했던 것이죠. 고난과 죽음을 예언했던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예언했던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그 여인들의 증언을 실없는 소리 취급합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한 성경에는 그 의미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정신착란 상태에서 횡설수설하는 말 정도로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고,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을 자꾸 무덤 가운데, 죽음 가운데서 찾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려면, 무덤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부활의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송장 냄새 나는 곳에서 빨리 나오십시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죽음은 더 이상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죽을 것처럼 살지 말고, 살 것처럼 죽으십시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는 이해관계가 맺어진 만큼만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우리의 온 존재를 기울여서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예수님의 죽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덧입혀 집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무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습니다. 이 증언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를 믿으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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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2. 04:24

2011 4 20일 수요예배 설교

본문: 스바냐 2:1-3; 3:17

제목: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라

 

스바냐는 선지자 계의 엄친아입니다. 그의 족보를 보면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 유명한 히스기야 왕이 그의 고조 할아버지입니다. 선지자들 중 스바냐처럼 족보가 자세히 나온 선지자도 없습니다. 스바냐는 젊은 선지자입니다. 나라가 젊을 때는 나이 많은 이들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이제 나라의 역사가 오래되자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예레미야, 요시야 왕 등 젊은이들을 사용하셔서 백성을 의의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들은 젊은이들이 뭘 알아하고 젊은이들을 무시하기 일쑤지만 새로운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늙고 안일한 세대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아무 젊은이나 택해서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스바냐처럼 경건한 유산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들어 쓰십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은 세대를 거쳐 훈련시키시고 필요할 때 그 전통에서 자란 젊은이를 들어 쓰시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스바냐를 보면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를 들어 쓰실까?’라는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젊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유산은 전통이 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저를 쓰시려고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10년만 더 있으면 저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주님을 섬긴 지 100년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요?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유다 왕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선 때였습니다. 므낫세의 불신앙과 폭정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를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상숭배가 판을 치고,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고, 불의와 부패가 널려 있는 시기였습니다.

 

스바냐는 1 4절에서 6절에 유다가 어떤 죄를 하나님께 범하고 있는지를 나열합니다. 첫째, 바알종교를 통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바알 종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다산종교로 성과 종교가 밀착된 음란한 종교였습니다. 바알숭배를 통해서 이들은 배교뿐만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의 죄도 함께 범했던 것입니다.

 

둘째, ‘그마림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우상숭배자 또는 우상의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끄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음란한 바알신을 섬기게끔 이끌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고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사람들의 감성만 자극하고,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일들만 해서 부와 명성을 쌓는 제사장들이 가득했다는 뜻입니다.

 

셋째, 천체숭배입니다. 천체숭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앗수르-바벨론 지역)에서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천체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천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신처럼 섬기는 것은 명백한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넷째, 밀감, 밀감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밀곰은 요단 강 동편에 살던 암몬 사람들이 섬기던 신으로서, 솔로몬 왕 때부터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미혹시켰습니다.

 

스바냐가 선포하기를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절하신고 합니다. “멸절하신다는 말은 카라트(karath)”를 번역한 말로 카라트자른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을 잘라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동화줄 타고 하늘로 오르던 나쁜 호랑이를 혼내주기 위해 동화줄이 잘라지는 것 같은 겁니다.

 

위의 네 가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들 외에, 스바냐는 또 다른 죄를 범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곧 여호와를 배반하고 좆지 아니한 자, 즉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다는 것과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는 뜻이 무엇인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에서 찾는다는 히브리어로 비케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은 금식하며 밤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삼하 12:16). 여기서 간구했다는 말이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밤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또 다윗 왕 때 3년 간 가뭄이 들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 때 쓰인 단어도 비케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최고의 신앙행위입니다. 현대인들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꺼려합니다. 단순히 바쁘고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11:6).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기도의 자리에 나오십시오. 살면서 하나님께 아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스바냐 시대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1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이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자리에 나아와 하나님을 찾는 것은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하나님 주신 삶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자리, 기도의 자리에 나아옵니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구하지도 아니했다에서 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다라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알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은 성전에서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의 자격요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라쉬)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비케쉬) 자로다”( 24:6).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주실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고 어떤 일을 하는 거랑 그냥 내 맘대로 하는 거랑은 천지차이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잘라버리시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앞 길이 꽉 막힌다는 뜻입니다. 인생이 형통이 아니라, 먹통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십시오. 우상숭배 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들에게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거라고 선포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의 날은 좋은 날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자들을 물리쳐 주시는 기쁜 날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모스 이후 이사야, 스바냐, 요엘,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의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심판과 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은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에게는 기쁜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로 바뀔 것입니다.

 

스바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을 한 번 보십시오. 스바냐서 1 14절부터 18절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파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같이 행하게 하니리,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도 멸절할 것임이니라( 1:14-18).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삶을 삽니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오는 심판의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귀한 생명을 엉뚱한데 내어줍니다. 영혼을 팔아 먹습니다. 은과 금()이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것들은 모으는 데만 모든 정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구원 받을 길은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스바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에 세 가지를 행하라고 촉구합니다. 첫째로 스바냐는 먼저 여호와를 찾으라고 합니다. 둘째, 스바냐는 공의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셋째, 스바냐는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찾으라는 말은 잘못된 길에서 회개하고 돌아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쩨데크를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바탕이 된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저 하늘의 별들처럼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현재 자신에게 자식조차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하나님께 대한 그 신뢰를 말합니다. “라는 것은 이렇게 관계의 개념이지, 율법의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한 의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공의라는 말은 사회적인 정의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때는 다른 낱말이 쓰이는데 그것이 미슈파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아모스의 말씀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아모스는 아모스서 5 24절에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 공법이 미슈파트이고, 정의가 쩨다카입니다. 공법(미슈파트)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억울한 자의 누명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힘이 세다고 돈이 많다고 거기에 넘어가서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공의를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에서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셋째로, 겸손을 찾으라고 합니다. 겸손은 오만(교만)의 반대말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조물주인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오만(교만)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은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만(교만)하게 굽니다. “니까짓것 필요 없어! 내가 너 없이 못살 줄 알아? 꺼져!” 이러한 오만(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더불어 서로를 높여주며 살아갈 줄 모르고, 자신이 무슨 왕이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람들을 부리면서 삽니다. 재물이 많거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그렇다고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더 강팍해지고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많이 가졌나 적게 가졌나, 많이 배웠냐 덜 배웠냐가 아니라, 이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셔야 하는데, 나 자신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오만(교만)해집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스바냐의 예언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 겁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떻게 임하게 될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지금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앞으로도 별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으시고 화도 내리지 않으신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마음 놓고 죄 짓지 마십시오. 그 날이,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고도 심히 빠르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바로 그날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모여서 찬송 부르면서 기도하면서 밥해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자고 이렇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됩니다. 여화와의 날을 준비하는 자는 이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나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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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4. 20. 03:54

눈물은 엄마다

 

눈물은 엄마다

눈물에는 엄마가 들어있다

힘들어 눈물 흘릴 때

눈물 속 엄마는 두 뺨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신다

기뻐 눈물 흘릴 때

눈물 속 엄마는 핑그르르 밝게 웃어주신다

엄마 사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

내 삶에 가장 어려운 순간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

엄마는 늘 나와 함께 계신다

 

그래서 난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엄마를 기억한다

눈물을 흘리면 엄마가 나온다

내 눈물은 엄마다

* 눈물과 엄마의 공통점을 생각하면서 오버렙을 한 번 시켜봤습니다.
사람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리고 그 단어를 떠올리면
영락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습니다.
눈물이 엄마고, 엄마가 눈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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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1. 4. 18. 20:37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1

 

밤새껏 비가 내리더니, 날씨는 개고, 밤이 되니

스산한 바람이 부네요.

나무를 지나칠 때 나는 바람 소리는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사람인양

소리만 무성할 뿐,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합니다.

요즘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할 말은 많은데, 바람처럼 할 말들이 가슴 속에서 맴돌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저는 오늘도 식구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사진 찍는다고 좋아하면서 사진관에 갔던 그 날.(초등학교 1학년이었죠 아마도..)

빛 바랜 흑백 사진이지만,

그 사진 속에서는 칼라처럼 생생한,

빛 바라지 않은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오늘은 얼마나 편한 잠을 청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행복이 가슴을 간지럽히기 때문이지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잠을 청하렵니다.

보고싶은 아버지 음성이 들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해설
아버지께 받은 사랑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글로 표현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들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리고 아들들에게서 받는 사랑으로,
그렇게 삶으로 그 사랑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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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1. 4. 15. 07:47

배꼽

 

태어난 지 6주가 지났는데도

아들 녀석 배꼽은 떨어질 줄 모른다.

의사는 괜찮다고 하지만

부모 마음이야 어찌 괜찮으랴.

알코올로 소독을 할 때마다

아들 녀석은 울어 대기만 한다.

저렇게 울어서야 어디 배꼽이 떨어지겠나 싶다.

알코올 소독을 집어 치우고

다른 방법을 궁리 중이다.

……

배꼽은 울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배꼽은 웃어야 떨어진다.

배꼽이 떨어지도록 웃었다 라는 말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아들 녀석 웃길 방법을 궁리 중이다.

……

오늘밤,

아들 녀석은 배꼽이 떨어지도록 웃을 것이다.

걱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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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1. 4. 15. 07:43

우면산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고 있었을 때,

우면산 계곡을 타고 내려오던 물도 마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람을 품으려 하지 않고 있었을 때,

우면산도 더 이상 겨우내 내려 쌓인 눈을

3월까지 품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우면산이 품고 있던 땅 안으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학교가 들어서고,

도심에서 살던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었을 때,

그 땅에서 논과 밭을 일구어 삶을 꾸려나가던 토박이들은

그 땅을 떠나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 사람들이 우면산 정상을 향해 길을 놓고 있었을 때,

우면산에서 살아오던 동물들은 살기 위해 산을 버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교통체증 해소와 시간 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우면산의 가슴을 파고 들고 있었을 때,

물과 눈과 땅과 토박이들과 동물들, 그리고 우면산이 만들어 낸 추억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지난달,

우면산 터널 준공식은 일정대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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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12. 11:23

2011 4 10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37:1-6; 8:6-11; 11:39-44

제목: 마른 뼈가 되라!

 

오늘 우리가 읽은 세 개의 본문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산다! 한 마디로,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잘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진짜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무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계시록은 새로운 생명, 즉 새하늘과 새땅이 창조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일컬어, “생명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 즉 살아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죽음, 즉 죽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별별 행동을 다 합니다. 자신의 삶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일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을수록 주목 받고 싶어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이 지니고 있는 아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겔서를 보십시오. 얼마나 죽음이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마른 뼈가 가득하다는 말은 죽음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있는 상황입니다. 마른 뼈는 그들의 삶이 절망 자체요, 죽음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이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온통 죽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 뿐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들었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삶의 보금자리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절망 가운데서 적군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짐승처럼 남의 나라에 끌려왔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마른 뼈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어 누워 있는 것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론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만큼 대량의 죽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온 우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른 벼 꼴짜기에서 발견하는 죽음이나 요한복음의 나사로의 죽음이나 그 본질은 똑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뭉뚱그려서 표현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지진 쓰나미로 인해서 2만 여명이 죽었습니다만, 그건 쓰나미로 인해 2만 여 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라, 2만 여 가지의 사연을 가진 2만여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도 마찬가지 입니다. 6백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라는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6백만 가지의 죽음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얼마나 죽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건들입니까? 우리는 TV 매체나 역사교과서를 통해서 이러한 일들을 접해서 남의 일 같아 별로 신경 안 쓰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숨이 콱 막히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나사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오셨다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탓은 아니지만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이 원망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후에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혹시 살아나더라도 마지막 날에, 즉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지금 당장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해서 그들을 위로하며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의 입술에서는 엄청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믿음의 고백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향해 엄청난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4)이나 지나서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아무리 꾸미고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가려지지 않는 인간의 본래의 냄새입니다. 죽음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사는 동안도 그 죽음의 지독한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살고 있으니까 생명 냄새를 더 풍겨야 할 사람인데, 그렇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도 죽음의 냄새를 더 풍기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생명보다 죽음과 더 가깝게 지냅니다. 참으로 비통한 인간 현실입니다. 나사로처럼 송장 냄새 펄펄 풍기면서 죽어 누워 있는 것 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른 뼈 골짜기 환상이나,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나 모두 죽음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도 절망하고 있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눈물에 젖어 있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끝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허무에 젖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까지가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이나 똑같이 보는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단순히 이것을 보고 너희의 현재 상태를 좀 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이렇게 마른 뼈가 가득한 죽음의 상황이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런 마른 뼈까지도 생명을 입히실 수 있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 말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 골짜기를 보여주시면서 질문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에 대해 에스겔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성경이 점잖게 기록하고 있어서 그렇지, 에스겔의 대답은 점잖은 대답이 아닙니다. 절망과 공포가 가득 한, 그리고 짜증이 가득 한 대답입니다. 한 마디로 볼멘 소리입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 하시듯이 마른 뼈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무덤에 누워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겁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죽음에서 일어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대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도대체 깨달아지거나 믿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생기가 넣어져 살아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막 일어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해 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렇다고 생각하고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것 같지만, 믿음의 전혀 없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의 실제를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 싸여 생명을 간구하는 능력이 상실됐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언을 한 번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죽음의 일 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을 하는 자들은 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평안을 봅니다. 그러면 육신을 가지 우리가 어떻게 육신 너머에 있는 영의 일, 생명과 평안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안에 품을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고,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생명을 보게 됩니다. 온통 생명의 일만 보는 우리의 삶 속에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게 되겠죠.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의 상황이 마른 뼈 같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절호의 기회 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그저 마른 뼈로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기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십니다. 어려우세요? 힘드세요? 죽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그러면 생명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보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생명을 보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을 보니까,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자처럼 생기가 넘치게 살아갑니다. 어깨를 좀 펴십시오.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살을 붙이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 복음을 한 번 들어보십시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마른 뼈 같은 우리의 삶에 생명이 넘쳐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4. 10. 04:09

엄마의 젖가슴

 

우리 엄마는 젖꼭지가 없지요.

어렸을 때는, 엄마의 젖꼭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어요.

근데 말이에요,

우리 외할머니는 어땠는지 아세요?

우리 외할머니는 한 쪽 젖꼭지만 있고 한 쪽은 없었어요.

언젠가 난 엄마에게 물어보았지요.

"엄마, 엄마는 왜 젖꼭지가 없어? 외할머니도 보니까 한쪽 젖꼭지가 없더라."

낮은 목소리로 엄마는 대답하셨죠.

", 너네들 젖 먹여 키우느라 그렇지 뭐.. 엄마는 젖이 잘 안 나와서

피젖을 먹일 때가 많았어.."

엄마는 원래부터 젖꼭지가 없었지요.

젖꼭지가 없는 건,

유전이거나 신체적 결함이라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난 그렇게 믿지 않아요.

엄마의 젖꼭지가 없는 건,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그보다, 나오지도 않는 젖을 짜내시느라,

엄마의 젖꼭지는 닳아서 없어진 것이라고,

그래서 엄마의 젖은 피젖이었다고,

난 믿고 있지요.

 

꼭지도 없는 우리 엄마의 젖가슴을

내가 왜 좋아하는지 아세요?

그건,

피거름으로 자라난

엄마의 사랑이 담겨있는 곳이라서 그렇지요.

그런 엄마의 피젖을 먹고 자란 내가,

어떻게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내게 있어

죽는 날까지 가장 그리운 건,

엄마의 꼭지 없는 젖가슴,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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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2011. 4. 7. 13:37

뜨레비 분수

 

고불고불 로마의 골목길을 가로질러 찾아간 뜨레비 분수.

오드리 헵번처럼 로마에서 한가로움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저녁 어스름,

조각상을 좀 더 환상적으로 만들어 줄 조명이 켜지기를,

조명이 켜지면 자신의 삶도 환상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오감을 다 열어 놓고 기다린다.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아 어둠이 짙지도 않은데

기다리는 사람을 의식한건지 배려한건지

어둠과 환함의 어정쩡한 공기를 타고

조명이 찬란하게 켜진다.

설익은 조명인데도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들의 한가로움은 설익은 한가로움이라서 그럴까.

그들의 삶은 설익은 삶이라서 그럴까.

설익은 것들이 어우러져 찬란함을 겨우 일궈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일제히 분수를 등지고

분수 속으로 동전을 던져넣기 시작한다.

던지기 전 그들은 잠시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은 분명 오감이 행복해할 수식어들이 가득찬

환상적인 소원일 것이다.

 

그 때,

배를 낮게 깔고 힘겨운 움직임으로

뜨레비 분수 앞을 지나는 거지가 눈에 들어온다.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시간과 절망을 딛고 사는 거지의 시간이 교차되는 순간,

소원을 빌기 위해 분수 속으로 던져지는 동전은 있어도

마땅히 빌 소원도 없는 거지의 깡통 속으로 던져지는 동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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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詩)2011. 4. 5. 12:21

비와 벌

 

처마 밑을 맴돌던 벌 한 마리가

주저 앉다 말고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곤충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다만 빗속에서 비 맞고 돌아다녔다고

나처럼 그 벌도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걱정된다

 

빗속으로 뛰어드는 벌을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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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5. 11:58

2011 4 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9:1-12, 5:8-14

제목: 보이면 안 그런다!

 

레슬링 선수와 소방수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소방수가 이깁니다. 왜요? 소방수는 물불 안 가리니까요! 그러면 소방수와 눈 먼 사람(장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아십니까? 눈 먼 사람(장님)이 이깁니다. 왜요? 보이는 게 없으니까요!

 

제가 설교 시간에 이러한 농담은 잘 안 하는데요. 단순히 웃겨드리려고 이 말씀 드린 건 아니고요. 우스갯소리 할 때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웃고 즐기지만 남의 신체적 장애를 빗대어서 하는 말은 늘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경각심을 좀 드리고자 일부러 이러한 농담을 택해 보았습니다. 농담할 때도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보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고, 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두 부류의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명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이고, 다른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눈 먼 자는 나면서부터 어둠 가운데 살았습니다. 눈 먼 것까지 힘겨운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 눈멂은 이 사람에게 인생 전체에 새겨진 주홍글씨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이나 신체장애는 죄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신체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는 것이죠. 

 

종교는 이처럼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세상 곳곳에서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종교적 폭력이 가해지면 사람들은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저항하지 못하고, 평생 자기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서 낮고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을 돌아보셨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종교적 관습에 젖어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난 것은 본인이든 부모이든, 누구든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사람이 저렇게 맹인으로 난 것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실 위대한 일을 보아라!” 예수님은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그 당시의 통념을 뒤집으셨습니다. 물론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그렇게 몰아 넣는 것은 불합리한 종교적 폭력에 불과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혹시 질병에 걸렸거나 자기 신변에 우환이 생기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싸인인가?’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싸일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좀 잘못된 것이 있다 싶으면, 하나님께 나아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의 깊이보다, 우리의 죽음의 깊이보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는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못 고칠 질병이 아주 없고,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아주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맹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전해주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빛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건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부모까지 불러다가 확인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바리새인은 그 사람의 눈 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눈 뜸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듣습니다. 보십시오. 맹인은 계속해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바리새인들에게 진술합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그 사람(예수)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답답한 맹인은 이렇게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 말에 격분해서 바리새인들은 눈 뜬 그 사람에게 욕을 하면서 말합니다.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랬더니, 눈 뜬 사람이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면서 눈 뜬 사람은 그 사람,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다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일을 듣고 예수님은 그 눈 뜬 사람을 만나 위로해주십니다. 그를 당신의 제자 삼으시고,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를 알아보았고, 눈을 뜨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보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까? 이렇게 다시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 우리가 말로는 예수님이 보인다 안 보인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장성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은 맹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몸에 익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8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몸에 익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이 눈을 뜨면, 마냥 좋기만 할까요? 제가 지금 눈 뜨지 말고 그냥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떠야죠, 병이 나아야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눈을 뜨고 병이 낳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보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빛 가운데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눈을 떴는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의 자녀로 살지 못할 거면 오히려 눈을 그냥 감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필연적으로 빛의 자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안 그럽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맹인이 눈을 뜬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찾아와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병든 것들을 고쳐주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지긋지긋한 질병도 좀 나았으면 좋겠고, 지긋지긋한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예수님의 은혜로 남편, 부인, 자녀 등 가족이 모두 잘 되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보기 원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맹인처럼 행동합니다. 어둠에 휩싸여서 어두운 일을 합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왜요? 맹인이니까,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삽니다. 마음이 어둡고 행동이 어둡습니다. 남을 헤칠 생각만 하고, 남을 헐뜯을 생각만 하고, 남을 미워할 생각만 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을 채울 생각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생각만 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킬 생각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내 눈 앞에 보이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데, 어두운 마음이 들고 어두운 행동을 할 겨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보이면 안 그럽니다. 예수님이 보이면, 에베소서 5 9절 말씀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도와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의 허물을 어떻게 덮어줄까 만 생각하고, 형제 자매를 어떻게 용서할까를 생각하고, ‘나는 무익한 종이로소이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줄 알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내가 지금 예수님을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상을 보고 있는 건지. 자신의 행실을 돌아보면 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보이며 안 그럽니다. 어둠의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예수님이 보이면 빛 가운데 거해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려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빛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설교를 음성으로 듣고 싶으시면 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십시오.
columbus.onmam.com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1. 4. 2. 03:42

2011 3 31일 목요찬양예배 설교

본문: 이사야 53: 1-12

제목: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살면서 이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구원은 왜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가?” 무조건 믿는 신앙을 맹신이라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맹신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수많은 질문들을 불러일으킵니다. 모든 질문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믿음의 조건에는 질문들이 넘쳐나야 합니다.

 

오늘 질문에는 세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구원, 그리스도, 그리고 고난입니다. 각각의 키워드가 너무도 큰 주제라서 우리의 일생을 다 바쳐도 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교만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질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일어나는데,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일생을 바쳐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니라서 질문에 답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이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도, 그것을 온전히 파악할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깎아 내려서 인간 존재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떤지를 온전히 파악해야만 정확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간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삶을 일구어 나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사람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김연아 같은 피겨스케이팅의 1인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줄 코치가 필요한 겁니다. 코치의 말을 잘 따라서 자신의 문제점을 보안해 나갈 때 더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이 갈립니다. 교만은 마음이 완악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눈과 귀를 닫는 것이고, 겸손은 마음이 부드러워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눈과 귀를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분노가 표출되고 증오가 표출됩니다. 결국 그 마음이 실제적인 죄를 낳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고 삽니다.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는 것을 내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변화와 새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신앙생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구원, 그리스도, 고난은 하나님과 관련된 신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종말에 스스로 드러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절대로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 12절에서 이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고난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이들도 당연하게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은 꼭 고난을 당해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인데, 고난 없이 우리이게 구원을 베푸실 수는 없는 건가요?

 

사디스트’, 그리고 메조키스트라는 말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신병적 증상을 일컫는 전문 용어입니다. ‘사디스트는 상대방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메조키스트는 사디스트와는 반대로 가학적인 행동을 당할 때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용어를 빌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해 보면, 메조키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학적인 행동, 즉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견디어 낼 때 오히려 믿음이 큰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난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당해야만 무슨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고난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 고난이 정당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것 묻지 않고, 그냥 고난의 길로 곧바로 가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죄와 연결이 됩니다. 오늘 말씀 중 5절 말씀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것도 조심해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죄인 만들어서 우리를 죄책감에로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지게 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을 심리학적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나쁜 짓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는 신학적인 용어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상태를 일컬어 4절 말씀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질고는 질병을 의미합니다. 슬픔은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오는 아픔을 말합니다. 질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 감기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은 허술합니다. 그냥 조금 생명을 연장시키거나 약간 완화시켜 줄 뿐이지 우리 인간에게 문득 찾아오는 질병의 늪을 완전히 제거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슬픔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 많은 슬픔을 당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자식을 잃었을 때, 또는 부모님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픔에 잠깁니다. ? 우리의 힘으로 자식을, 부모님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에 잠기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한계 상황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한계 상황인, 질고(질병)와 슬픔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의 한계 상황을 대신 지시고 그 한계 상황을 넘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죄 된 세상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승하던지, 이 죄 된 세상이 승하던지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 당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성육신 신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불가능 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말씀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십시오. 2절 말씀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이 땅의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당장 한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미국에서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타락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 하나님 나라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는 3절 말씀처럼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귀하게 여김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죄 된 세상이 그리스도를 고난으로 몰아넣었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필수여서 그리스도가 고난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를 고난 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이 나빠서, 의도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긍휼히 여기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허물과 죄악을 담당시키셔서 그것을 지고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거기에서 허물과 죄악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생명, 부활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약간 고난의 신비가 손에 잡히시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심리학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도 마시고, 죄책감에 휩싸이지도 마십시오. 고난에 저항하시고, 죄책감에 저항하십시오.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지,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부활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몸을 입은 거룩한 백성이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죄인처럼 비굴하게 살지 말고, 의인으로 당당하게 사십시오.

 

심리적인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구원이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고난의 신비를 심리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고난의 신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말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잠겨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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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시편사색2011. 3. 30. 22:25

시편 19

계시: 해와 율법과 그리스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가? 그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 “계시(Revelation)”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

 

시인은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토라)이다. 자연이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하는 인식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천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다. 물론 자연에게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3). 말을 해야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서로의 존재를 가슴 속 깊이 느끼듯이, 피조물은 조물주의 사랑을 말 없이 드러낸다.

 

특별히 시인이 주목하는 피조물은 해이다. 해를 통해서 시인은 자연의 질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시인은 아침이 되어 해 뜨는 장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텐트, )을 지어 주셔서 밤새껏 해가 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에서 밤새껏 쉬다가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해는 얼마나 큰 기쁨을 전해주는가! 아침에 떠오른 해는 저녁이 되어 질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나누어 준다. 그 열기, 그 사랑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6)

 

시인은 다음으로 율법에 주목한다. 시인에게 율법은 단순히 지켜야 할 어떤 규율, 법이 아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한다. 율법 자체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되고 있는, 율법에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을 베풀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이 세상 그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참된 지혜를 주며, 참 기쁨과 의로움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그래서 시인은 율법을 사모한다. 그것은 순금보다 더 귀하고, 꿀보다 더 달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연과 율법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시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았다면 무슨 고백을 했을까? 이런 고백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드러남은 모두 여기에 모아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이 아니라, 궁극적인 계시, 즉 하나님 스스로를 세상에 보이신 절대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이상, 자연도 율법도 그 빛을 잃고 우리의 모든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시, 드러남 그 자체이시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