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13. 14:19

갑절과 겉옷

(왕하 2:7-14)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다. 복음서(마태 17:1~9, 마가 9:2~8, 누가 9:28~36)에서 전하고 있는 산상변모 사건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제자도에 대한 제시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파악된 예수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몸으로서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우리는 과연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평생에 걸쳐서 묵상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몇 가지 나눌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척도는 유일신 신앙에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의 척도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삶 속에서 얼마나 인정하면서 사는냐에 달려 있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3).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은 왕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제 1계명을 무시하며 살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인이었다.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아합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엣바알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데, 역모를 일으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 한 자이다.

 

바알신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였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왕실의 신앙을 허물기 시작했다. 바알의 사당을 전국 곳곳에 세우고, 바알의 짝 신이라고 숭배되었던 아세라상을 만들어 바알 신당에 두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의 욕심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 비난 받은 이유는 그가 단순히 나봇이라는 사람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서가 아니다. 그것 자체로도 말할 수 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이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제 1계명을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았다.

 

엘리야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한 정치권력에 맞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과 맞서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다.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이긴 뒤, 정치권력의 위협 때문에 망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서, 로뎀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지 않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토대이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 자체를 내어놓아야 한다. 그만큼, 신앙은 진지한 삶의 성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생명)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바빠서 그런 게 아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신앙의 속성 자체가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중에 열심히 일한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 일은 그 자체가 고된 노동이다. 신앙은 그러한 생명 유지에 대한 심화이다. 신앙은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발견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열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우리의 노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다. 노동은 소중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노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잇닿아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노동의 노예로만 살게 될 뿐이다. 생명의 해방은 노동을 열심히 하는 데서 오지 않고, 노동과 하나님을 연결지어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데서 온다. 그럴 때,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이 복 주신 즐거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노동은 지겨워진다.)

 

엘리야가 한 일은 단순히 타락한 정치권력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노동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잘 마치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엘리사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선지자 생도 문하생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동네 아이들이 그를 놀리던 것을 보면,아마도 그렇게 인기 있는 문하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인기 있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엘리야를 끝까지 따랐던 엘리사였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두루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 마지막 여정에 끝까지 함께 했던 엘리야의 문하생은 엘리사였다. 그 여정을 전하고 있는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사는 룻기서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붙좇은 룻과 같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6).

 

요단강에 이르러 이제 하늘로 들림을 받기 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는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 그에 대해 엘리사는 이런 간구를 한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 엘리사의 간구를 엘리사의 욕심으로 보면 안된다. 엘라사의 간구에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

 

여기서 어려운 일이란 엘리야가 엘리사의 간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정녕 네가 내가 지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엘리야가 했던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엘리사는 지금 스승이 하던 그 일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이 짠한 상황이다.

 

갑절이라는 뜻은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욕심의 표현이 아니고 계승의 표현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는다. 그래서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배(갑절)를 받는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한 것은, 그가 스승 엘리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장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곳저곳을 다닌 이유는 그의 문하생 중에 누가 자신의 유업을 물려 받는 장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엘리야에게는 50명이 넘는 문하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멀리 서서 엘리야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사만이 엘리야 곁에서 엘리야의 부르심을 지켜보았다.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장자가 되어 엘리야가 행한 일을 이어서 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엘리야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물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 엘리야의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표현이다. 엘리야의 인생은 에너지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서 보야 하는 말씀은 엘리야의 죽음 뒤에 벌어지고 있는 엘리사의 행동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죽자 이렇게 소리지른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 이것은 이제 자신이 아버지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서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에 선포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은 이것이다. “이에 엘리사가 자시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12). 이것은 괴로운 마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버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제 엘리사는 더 이상 이전의 엘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엘리야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행동이다. 겉옷을 영어로 ‘mantle’이라고 한다. ‘mantle’에는 겉옷이라는 뜻의 심화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임지다의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 이유는 이제 그가 엘리야가 하던 일을 이어서 책임지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지고 가던 십자가를 집어 든 후,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포를 다시 확인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책임지고 사는가?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노동하는가? 우리의 노동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맞닿아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나와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게 살고 있는가?

 

흑인해방신학자 제임스 콘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흑인해방신학(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이런 말을 했다. No one can be free until all are set free. (James Cone,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 “모두가 자유롭게 될때 비로소 나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상대방에게 자유가 없는데, 어찌 나만 자유를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가난한데, 어찌 내가 부자로 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안식이 없는데, 어찌 나만 안식을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나만 구원에 이를 수 있나.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안식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번 수요일에 드리는 재의 수요일예배를 통하여 사순절에 들어간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이유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신에 채우는 절기이다.

 

우리는 그 절기를 평화 기도회로 시작하려고 한다. 평창올림픽을 통해서 남북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세워 나가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 기도회를 하려고 한다. 외신들의 보도에 의하면, 현재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남북관계 개선되면 트럼프 정부와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고, 트럼프 정부와 뜻을 같이 하면 남북 평화가 깨지거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남북 단일팀이 입장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환영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미국의 펜스 부통령의 행동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조국,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한국인으로서, 통일을 위한 기도와 노력,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 우리의 조국,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보다 더 간절하고 바쁜 일이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갑절의 영감과 겉옷을 두른, 십자가의 군병들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을 위해 변화산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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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