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8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왕상 3:1-15)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먹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것은 뱀의 속임수였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능력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뱀은 인간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욕망을 이용하여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도한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의 고유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하는데,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불합리해 보이지만, 우리의 눈에 보기에 선한 것도 하나님이 악하다고 판단하면 악한 것이고, 우리의 눈에 보기에 악한 것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판단하면 선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개념인데, 자칫 잘못하면 오용되기 십상이기도 하다. 일례를 들어서, 사무엘하 11~12장은 다윗의 죄와 나단의 지적, 그리고 다윗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요즘 실정법에 의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를 범한다. 그런데 다윗은 구속되거나 실형에 처해지지 않는다. 다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우화를 통해 그의 잘못을 지적할 뿐이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다윗이 회개했다는 진술이 나오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다윗의 회개가 그의 법적 책임을 피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me too 운동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미투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나도 당했다는 고발은 피해자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기까지,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가해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거나 피해자에게 제 2차 피해(합의 하에 진행된 일이라는)를 가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보다 더 헷갈리고 당황스러운 상황은 가해자가 스스로 용서 받았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아이를 죽인 가해자는 감옥을 찾은 아이의 엄마에게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선언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 안태근 검사 간증 사건을 통해 보듯이, 그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간증집회를 통해서 선언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예이다.

 

위의 상황이 바로 회개와 용서가 오용된 경우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해자 중심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회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고, 용서도 가해자가 받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경에 나와 있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복음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피해자가 무시된다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는 심판을 받아야지,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회개를 통해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가 피해자에게 입힌 상처를 심판 받는 것이다. ,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졌을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인간에게는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문학계에서는 고은 시인의 불의한 행동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다. 수원 시와 맺은 협정이 파기되었을 뿐 아니라, 수원 시에서 제공한 집에서 고은 시인은 방을 빼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교과서 제작 업체들은 교과서에 실린 고은 시인의 시를 걷어내는 작업을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 왕의 불의한 행동을 보면서도 여전히 다윗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편을 성경에서 걷어내거나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애독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성경은 왜 다윗 왕의 치부를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최고의 신앙인으로 추앙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그것이 다윗에게 드러나고 있다. 다윗은 비록 불의한 행동을 했지만, 회개를 통하여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상식선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로 처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적 주권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여전히 의인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이야기에서 솔로몬이 간구하는 것은 보통 엄청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기브온 산당 제사 사건은 여러 가지를 말해 준다. 우선,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 다윗의 신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새로운 왕이 된 솔로몬에게는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제스쳐이다.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되고 있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왕위는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기까지 전개된 살얼음판 같은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수많은 왕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앉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 입증이었다. 기브온 산당 제사는 그러한 갈망에 대한 성취이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사람들은 그 제사를 받은 하나님의 반응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응답을 하신다. 성경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 날 밤에 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Ask what you wish me to give you?)” (5)

 

하나님 앞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어 자기를 작은 아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또한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선악을 분별하는 것재판을 연결시킨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그래야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보통 사람은 장수와 부, 그리고 복수를 간구한다. 지극한 인간의 마음이다. 오래 살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자기에게 못되게 군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인간의 평범한 마음이다. 사실, 우리의 간구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솔로몬이 구하는 듣는 마음선악 분별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겠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은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솔로몬의 욕망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솔로몬이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얻고 싶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의 성취라기보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간구한 것이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일천 번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얻는 지혜를 가지고 통쾌한 재판을 하고 있지만, 결국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 또한 솔로몬의 죄악 때문인 것을 확인한다. , 우리가 아무리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려고 한다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판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선악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해야 하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제단을 끊임없이 쌓는 것이다. , 끊임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여 평화를 누릴 것이고, 이것을 불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평안치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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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